긴급동의, 소비자를 위하여 건배하자
 

윤 여 임 (조란 목장 대표)
joran1958@naver.com
 

  농민은 돈도 별로 없지만, 혹여 돈이 있어도 좋은 차를 타면 안 되고, 좋은 집에 살아도 시선이 곱질 않고....., 세상은 어쩐지 농민들에게 적당한 연민을 자극할 정도의 초라한 행색과 소박한 이미지를 요구하는 것 같다. 정신없이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오로지 농민들에 대한 이미지만은 삼사십년 전 그대로 변함이 없다. 주름투성이에다 검게 그을고 언제나 한숨을 쉬어야 하는 고정불변의 수식어, 가난하고 정말 불쌍하기만 한 농민들.

  ‘우리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 주어야 하나?’하고 깊어 가는 밤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민하는 학자·연구자들이 많다.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낙농을 한다니까, ‘주어도주어도 달라고 떼만 쓰는 낙농가’라며 낙농하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철부지 취급해 버리는 전직 고위공무원이었다는 어떤 분의 쓴 소리를 들으며 왠지 쓸쓸한 마음이 든다. 농업·농촌 걱정하는 이들의 가슴 밑바닥에 혹시 우리를 우매하고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물론 아닐 것이다. 나는 물론 농정 전문가도 아니고 많은 것을 알지도 못한다. 그냥 농민으로서 그냥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정말 우리는 그렇게 가난하고 불쌍한가 곰곰 생각해 본다.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농촌도 예외가 아니다. 간신히 텃밭이나 일굴 정도로 고령화 된 농민들은 첨단의 교통·통신수단에서 소외된 채 그렇게 골동품처럼 세상과 유리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젊고 기동력 있는 사오십대 농민들도 자신들에게 보내는 세상의 염려가 명확히 무엇인가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이들의 서투른 의식화는 오히려 영농의지를 방해 할 수도 있다. 그 보다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 더 필요하다. 이제 농촌에는 정말 아이들이 없다. 일단 아이들을 붙잡아 두고 싶어 하는 부모도 없지만,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거리가 없다는 것이 더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애들은 고향에다 터전을 버젓이 두고도 기를 쓰고 도시의 임금노동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들의 교육비로 혹은 전세금 충당을 위해 문전옥답은 팔려나가기 일쑤며, 빚을 져 농가부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예전에 우리 부모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논밭 팔고, 소 팔고, 빚내서 자식을 공부시켜 농사에서 면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남아있는 사람들은 거기서 제외된 사람들이고, 능력 없어 시골에 눌러 앉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도 알고 남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불쌍하기만 해야 하나?  언론에서는 한 번씩 국민들의 동정표 몰이를 위해 최대한 가난하고 불쌍한 농민들의 모습을 클로즈업한다. 선거용으로 선심 쓰며 풀어 놓은 자금들이 부채로 목을 옥죄는 사실도 부인할 생각은 없다. 농업의 쇠퇴는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그런 농업·농촌을 살리기 위해 다양한 계층에서 부단한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 밖에 나가보면 농업·농촌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에 놀라곤 한다. 어쩌면 그러는 가운데 우리 농민들은 자립하는 방식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스스로 한 번 나서보는 것이다. 네(정부) 탓으로 가난하고 억울하다는 식의 생각은 이제는 접었으면 좋겠다. 내 탓도 네 탓도 아니고 시절이 하수상한 탓이라고 치자. 농정부재라고 정부를 탓하고, 세계자유무역체제로 다 죽게 되었다고 하소연 하러 비행기타고 가서 시위하다 이국의 구치소 신세를 지는 기운을 추슬러 한번 소비자들하고 직접 부딪혀 보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해 좋은 농산물을 생산해 내면, 소비자들은 우리 농산물을 사먹어야지 별도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바다건너 힘센 나라들이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라고 을러대는 상황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 국민들에게 그들의 농산물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요즘 몇 군데 농업관련 행사에 참석해서 나는 이런 말을 한다. ‘대한민국사람들은 국민과 농민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농민들은 이분법적으로 별종화 되어있다. 그런 농민의 이미지를 이젠 사양하고 싶다’고. 건배제의를 하라는 자리에서는 나는 또 이렇게 말을 한다. ‘이젠 정말 억지로라도 희망을 갖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안 그렇다 해도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제부터 나는 농업·농촌을 위하여 건배 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소비자를 위하여 건배할 것이다’라고.

  그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당연히 우리 농산물을 선택하는, 그런 현명한 소비자들이 줄을 서야 우리는 살 수 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여 달라면 보여주어야 하고, 와서 쉬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고 하니, 이제 방향을 바꾸는 거다. 한바탕 신명나는 잔치마당으로 만들어 가자. 말이 문서(씨)가 된다고 한다. 매일 죽겠다고 하면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 자꾸 도와주어야 된다는 불쌍한 사람들을 속으로는 슬쩍 외면하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심리이다. 이제 그만 우리 스스로 불쌍해 보이는 것을 거부하자. 농정을 개혁하고 농업에 대한 이미지 개선은 학자들, 연구자들에게 맡기고 우리들은 그저 신명나는 판을 벌여보는 거다. 분명 사람들이 모여들고 일이 될 거란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GSnJ인스티튜트의 이정환 이사장이 지적한대로 농민은 쟁점을 바꾸고 정부는 관점을 바꾸면 당연히 소비자들도 선택을 바꿀 것이다. 우리 농산물을 사달라고 애걸복걸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 여러분! 건배를 위한 긴급동의 있습니다!!”

  “소비자는 하늘입니다! 우리 모두 소비자를 위하여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