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nJ 농정전략연구센터 소장  고영곤

 폴란드의 중세 민주주의, 축복인가 저주인가

  폴란드는 동쪽으로는 러시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이루고 있고 남쪽으로는 슬로바키아 그리고 서쪽으로는 체코, 독일과 인접해 있는 국가로서 주변 강대국들과의 끊임없는 접촉과 교류, 갈등의 역사를 가진 나라다. 인구는 약 4천만 명으로 우리나라보다 적은데 국토면적은 31만k㎡로 우리나라의 3배를 약간 넘는다. 더욱이 이 나라는 남쪽 슬로바키아와의 국경지대를 제외하고는 대 평원지역이어서 국민 1인당 경지면적은 우리나라가 약100평인데 비해 1천 평에 가깝다.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아 크라카우 남쪽에서부터 흐르는 비스툴라 강이 북쪽 발트해로 흘러가고, 국토가 거의 정방형 내지 둥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동서간 거리가 680km 남북이 650km이다.

  폴란드는 10세기 후반 피아스타 왕조가 통일국가를 이루어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는 크라카우를 중심으로 황금기를 누렸다. 일찍이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문화 종교 사회 전반에 걸친 선진화는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지동설을 주장하는 책을 펴낸 것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또한 일찍이 귀족중심이기는 했지만 상·하원 제도를 도입할 정도로 앞섰고 리투아니아와 연합하여 러시아의 팽창을 막아낼 정도로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던 적도 있다. 절대왕정시대였던 당시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의회에서 국왕을 선출했고 의회에서 정한 룰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당시로서는 선진화된 민주주의가 중요한 원인이 되어 불운과 시련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아픈 역사를 만들어 낸다.

  의회를 구성하는 귀족들은 무능한 국왕을 뽑아놓고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는 유혹에 넘어갔다. 표면적으로는 국왕의 독주를 막는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귀족들의 기득권보호를 위해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으로 국왕의 지도력은 상실되고 국력은 쇠약해지기 마련이었다.

더욱이 17세기에 들어와서는 어떤 법률도 의원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통과하지 못한다는 만장일치 제도를 도입하였다. 어떻게든 기왕에 지니고 있는 것들,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변화를 막아보겠다는 의도로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와 변화의 기회를 차단하고 봉쇄하는데 만장일치제도는 참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제도가 도입된 후 의회는 10여 년 동안 단 한 건의 법률도 처리하지 못하는 등 병폐가 나타났다. 국력이 급격히 소진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정말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할 만한 자격을 갖춘 구성원들에게는 축복이지만 그렇지 못한 구성원들에게는 저주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민주주의가 축복일 수도 있고 저주나 족쇄일 수도 있음은 국가수준에서는 물론 지방자치나 협동조합, 종교단체나 시민운동, 심지어는 동창회나 종친회 향우회 등 모든 공적 사적조직에 공통적이다. 구성원의 의식수준이나 가치관 그리고 행동양식에 따라 민주주의는 향기로운 꽃일 수도 있고 악취 풍기는 쓰레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폴란드는 그 화려한 시대를 마감하고 18세기에 들어와 비운과 고난의 역사를 걷게 된다. 국력이 약해지자 주변 강대국들의 내정간섭을 피할 수 없게 되고 급기야 1772년에는 폴란드 분할조약에 의해 영토의 1/3을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내 주는 이른바 폴란드 제1차 3국 분할이라는 수모를 당한다.

3국 분할이 이루어지자 뒤늦게 고질적인 의회의 거부권이 폐지되지만 이미 쇠약해진 국력은 터키와 스웨덴과의 영토분쟁을 겪으면서 더욱 약화되어 결국 러시아의 도움을 요청한다. 러시아는 이를 빌미로 폴란드를 침공하여 더 많은 영토를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내주는 2차 분할을 겪는다. 결국 국민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으나 러시아의 군사력 앞에 무력하게 진압되고 바르샤바까지 점령당하여 남아 있는 영토까지 내 줌으로써 1795년 폴란드는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맞는다.

  그 뒤 나폴레옹이 침공하여 바르샤바공국(1807-1815)을 세웠던 기간을 제외하고 폴란드 영토는 줄곧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의해 3분할 된 상태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윌슨 미국대통령에 의해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된 1918년까지 영토 없는 쓰라린 역사를 경험한다. 1830년에는 망명정부가 수립되어 1831년 대대적인 민중봉기로 독립투쟁을 벌인 적도 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약 1만여 명의 폴란드인들이 해외로 망명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유명한 ‘피아노의 시인’ 쇼팽이 조국을 떠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지속된 수난과 연민

  1918년 독립을 얻었으나 120년 이상 서로 다른 3개의 국가에 의해 지배를 받던 폴란드가 경제나 행정에 있어서 큰 차이를 극복하고 다시 한 국가로 통합한다는 것은 쉬운 일 아니었다. 혼란과 갈등의 늪에 빠져 대통령 당선자가 다른 정치세력에 의해 암살되기도 하고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동쪽에서는 부동항을 찾는 소련이 발트해와 대 평원지역을 가진 폴란드에 눈독을 들였고, 서쪽에서는 독일이 동쪽으로의 세력 확장을 꾀했다. 마침내 1939년 8월 23일 소챨?나치 독일이 상호불가침조약(Ribbentrop-Molotov nonaggression pact)을 체결한 후 9월1일 히틀러의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하고 2주일 뒤 9월17일에는 러시아 군대가 침공하여 폴란드의 서쪽은 독일이, 동쪽은 러시아가 장악하는 비운을 맞는다. 독일과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은 사실상 폴란드를 양분하여 각각의 영토로 삼고자 하는 밀약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약소국 폴란드를 둘로 나누어 점령하겠다는 탐욕을 감춘 위장된 평화 즉 강대국 독일과 러시아간 불가침 조약의 효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2년 뒤인 1941년, 나치독일이 이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폴란드는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완전히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폴란드는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한편 망명정부를 세웠고 소련은 이제 이 망명정부를 지지한다. 이 나라의 운명은 참으로 비극적이어서 2차 대전 중 4만 명의 폴란드인이 강제징용 되어 나치 독일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고, 소련이 연합군에 합류하자 폴란드인 20만 명은 망명정부의 지휘를 받으며 연합군 쪽의 병력으로 전쟁터에 나간다. 약소국 피점령국의 국민으로서 세계정세에 휘말려 전쟁터에서 동포에게 총을 맞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운명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지하 레지스탕스운동에 대한 나치의 잔인한 억압으로 육백만의 폴란드인이 희생되고, 이백오십만 명이 강제노동자로 독일에 끌려간다. 이처럼 참혹한 6년 정도의 2차 대전이 끝났으나 폴란드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 우리나라 남북분단의 단초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바로 그 회담의 결과로 폴란드는 그해 6월 새로운 임시정부를 세웠으나 이듬해 공산당이 집권하고 결국은 소련의 위성국가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989년 4월 정부와 민주노조가 원탁회의를 통해 정치 경제의 개혁에 합의하고, 뒤이어 6월 전후 최초의 자유총선이 실시되고 이듬해인 1990년 헌법을 개정하여 폴란드 공화국(Republic of Poland)이 출범할 때 까지 40년 이상을 공산당 지배하에 있었다.

새로 세워진 폴란드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공산당과 투쟁해 왔던 유명한 노조지도자 레흐 바웬사가 취임하였다. 그러나 40년 이상을 공산당 교육을 받은 국민들의 의식과 사고방식,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확립된 공산당체제를 하루아침에 허물고 민주질서와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험난한 시련과 고통의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폴란드는 어쩐지 애잔한 느낌이 드는 나라다. 주변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을 받아온 나라, 그래서 어쩔 수 없는 피점령국 백성으로 동족상잔의 전투에 끌려갔던 서러움과 쓰라린 과거를 안고 있는 나라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슬라브계의 단일민족으로 폴란드어를 쓰고 있고 종교적인 신앙심이 높은 백성들의 나라인 폴란드는 어딘지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참 많은 나라 같은 느낌이 든다.

쇼팽과 폴란드의 사람들  

  폴란드 사람들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이나 재능도 그리고 애절한 애국심도 어쩌면 우리와 비슷한 것처럼 느껴진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1810-1839)이 조국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에 살면서 폐질환으로 고생하면서도 조국 폴란드와 관련된 연주회에는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든가, 조국의 한 줌 흙이 담긴 술잔을 평생토록 간직한 그의 애국심이 그렇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면서 몸은 비록 프랑스에 묻히지만 심장만은 조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지금도 쇼팽의 시신은 파리에 묻혀있으나 심장은 바르샤바의 한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마치 일제 강점기 북간도 땅에서 우국충정을 불사르던 애국지사들을 연상시킨다.   

 폴란드는 또 학술분야에서도 역사적인 인물들을 배출한 나라다. 일찍이 1543년,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당시 여건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고 또 당시 인간의 지혜로 상상하기 어려웠던 지동설을 책으로 펴낸 코페르니쿠스를 배출했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자교수가 되어 1903년에 그의 남편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고, 8년 뒤에는 노벨화학상을 받음으로써 노벨상을 두 개나 받은 여성 마리아 퀴리(1867-1934)를 배출한 것도 폴란드였다.

  폴란드는 또한 로마를 불태우고 그 죄를 기독교도들에게 뒤집어씌우는 폭군 네로 황제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와 학살 속에 피어난 남녀 간의 사랑과 질투를 다룬 「쿼바디스」의 원작 소설로 1905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센키비스(Sienkiewisz)를 비롯하여 네 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죄 없는 기독교도들이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고, 리기아를 등에 태운 황소와의 숨 막히는 싸움장면 등 기억에도 생생한 영화 「쿼바디스」는 세계적인 배우 로버트 테일러와 데보라카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다. 견디기 어려운 압제를 피해 로마를 떠나는 베드로 앞에 선명히 나타난 그리스도를 향한 베드로의 외침,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쿼바디스 도미네)” “네가 나의 어린 양을 버렸으니 나는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가야겠구나.”라는 예수의 대답에 베드로는 크게 깨닫고 로마로 되돌아가 선교활동을 벌이다가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는 내용은 많은 기독교도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오랜 수난의 역사 속에서 폴란드인들은 어쩌면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어떤 질기디 질긴 한(恨)같은 것을 종교와 음악과 문학으로 승화시켜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맺혀진 가슴 깊은 곳의 응어리가 뜨거운 열기로 터져 나와 결국은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의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폴란드는 동구권에서 가장 먼저 민주화를 이끌어낸 나라가 되었고 바웬사는 노벨 평화상을 받고 또 대통령이 되고 했으나 다음 선거에서는 결국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니 참으로 선거와 인기, 시대적 사명과 역사의 평가는 과연 어떤 관계에 있을까.

  우리를 안내한 유학생 출신의 박식한 현지 가이드는 폴란드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담아 열심히 이야기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