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nJ 농정전략연구센터 소장  고영곤

 시련과 죽음 그리고 삶의 의미

  인간은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고 프랭클은 역설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는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으로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한다.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존재가 되느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되느냐의 선택권은 바로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도처에서 인간은 운명과 시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만나게 된다’  

  프랭클은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창조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어떤 목표를 성취하는 것으로 삶을 이해한다. 이런 삶의 의미는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삶과 죽음, 고통 받는 것과 죽어가는 것 까지를 폭넓게 감싸 안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무시하거나 거짓 상상을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낸 낙관적인 환상으로 고통을 감소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권력욕으로 그 좌절을 대신 보상받으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권력욕인 돈에 대한 욕구도 포함되어 있고,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인간은 또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고민과 권태의 양 극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로서, 오늘날 권태로 인한 정신 질환자가 많음은 바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의지의 상실에 그 원인이 있다고 그는 본다.

  프랭클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아우슈비츠 기차역에 도착 즉시 가스실로 보내진 사람들의 누더기 옷으로 갈아입는 순간, 통계적으로 그 곳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스물여덟명중에 한명도 채 안 되는 상황에 처해지면서부터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직면했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수용소 안에서 그 처절하고 치열한 삶 속에서의 관찰과 사색을 토대로 심리치료법 로고테라피(logo-theraphy)의 창시자가 되어 비엔나대학에서 85세까지 정신과 의사와 교수로 일하다가 1997년 92세로 세상을 떴다. 그는 27권의 저서를 남기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강의하고 많은 상을 받았다. 그의 제자가운데 한 사람이 프랭클의 사상과 심리치료법을 소개하는 삶의 지침서, 우리나라에서도「의미 있게 산다는 것」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책의 제1장 첫머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시작된다.

  비터는 우편배달부다. 그녀는 매일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항상 즐겁고 신나는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우편물을 배달한다. 그녀에게 물었다. 매일 매일 반복적인 일을 하면서 도대체 뭐가 그리 당신을 즐겁게 하느냐고. 비터의 대답: “저는 단순히 우편물을 배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소중한 일을 합니다.”

  정말 단순히 우편물을 배달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사랑과 우정과 애정을 배달하는 귀하고 소중한 역할을 하는데 즐겁고 신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것이 바로 프랭클이 말하는 ‘의미’아니겠는가. 바로 그런 의미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그 수많은 죄수중의 한사람 빅터 프랭클을 위대한 정신과 의사요 철학자로 만들어낸 원동력 아니었을까.

  현지 가이드에게 혹시 빅터 프랭클 이야기를 들어보았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젓는 그에게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을 소개해 주었다. 흐리고 음산한 날씨, 가랑비가 내리다말다 하는 쌀쌀한 날씨였다. 우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우슈비츠 정문을 나오며 ‘노동은 자유롭게 한다.’는 간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웃어 주세요.”를 외치는 카메라맨이나 그 앞에 폼 잡고 늘어선 일행들 모두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우리는 인간이 저질러놓은 그 참혹한 장면들 때문에 식욕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로 민가처럼 생긴 식당에서 점심을 때우며 일행들 가방에서 나온 팩소주로 머릿속의 어두운 잔영들을 씻어 내렸다. 씻겨가는 암울한 잔영위로 빅터 프랭클의 ‘삶의 의미’가 구름 걷힌 하늘처럼 살며시 다가왔다.

 지동설의 진실, 누구의 삶을 살 것인가

  내키지 않는 점심식사 후 우리는 고난의 근세사를 살아 온 폴란드에 대한 알 수 없는 연민의 정을 안고 체코로 향했다. 체코 제2의 도시 브루노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마지막 목적지 프라하로 갈 예정이다. 브루노까지는 네 시간 이상 걸리는 먼 길이었다. 폴란드를 떠나면서 우리는 버스 안에서 많은 생각들을 하고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2002년 서울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폴란드를 이겼을 때 폴란드에 사는 우리 교포들은 이 나라 사람들의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이 나빠질까 걱정했다 한다. 조국을 떠나 살면서 현지국민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설움 같은 것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그런데 한국에는 졌지만 다른 나라와 경기를 할 때 폴란드 팀을 응원하는 서울시민이 많아서 오히려 우리나라에 대한 인상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폴란드 사람들은‘대우실업’이라는 한국회사가 이 나라 최대의 자동차회사를 인수 운영함으로써 우리나라 사람들을 새롭게 인식하고 아주 좋은 태도로 교포들을 대해 주었으나 나중에 대우가 쓰러져 실망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졌다.

그러다가, 어제는 소금으로 조각된 코페르니쿠스 상(像)을 보았고 오늘은 브루노에서 잠을 자게 되니 이 두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가 생각난다면서 이야기가 이어졌다.

   폴란드 출신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우리나라로 치면 신숙주와 한명회가 실권을 휘둘렀던 성종초기에 태어났다. 당시 유럽은 교황청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어 교황청의 규율에 반하는 것이면 바로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에 회부되던 시절이었다. 교황청의 우주관은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것이었고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것은 어쩌면 천지개벽에 견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천동설을 근거로 할 때 바다의 밀물 썰물의 예측이 정확치 않아 항해에 심각한 위협을 미치는 등, 인간의 믿음이나 지배자의 권위로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려 든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크라카우 대학에서 철학과 천문학을 공부하고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으로 유학하여 그리스어, 철학, 천문학을 공부한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확신을 가지고「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썼다.

전4권으로 된 이 책은 아마도 1525년부터 1530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종교적으로 이단자가 되어 어쩌면 화형을 면치 못할 게 분명한 상황에서 그는 오랫동안 이 책을 출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중풍으로 쓰러진 1542년에야 제자의 권유에 따라 인쇄소에 원고를 넘겨주고 이듬해인 1543년 6월 그가 임종하는 자리에서 인쇄견본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미 세상을 뜬 그는 종교재판을 면 할 수 있었고 무사히 대교구장으로서의 일생을 마쳤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뒤 이탈리아 출신의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라는 사람은 역시 지동설과 관련된 우주관을 지녔던 죄로 종교재판소의 재판에 회부되어 로마의 감옥에서 6년을 지내다가 신념을 철회하라는 재판정의 요구를 거절하고 “내가 철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들은 이 판결을 받아들이는 나보다 더 큰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 것이다.”라고 독설을 퍼붓고 교황을 비롯한 50여명의 추기경과 수많은 관중 앞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장작더미에 올라 화형 당했다. 1600년 2월의 일이었다.

  다시 33년이 흐른 1633년 6월, 브루노가 화형판결을 받은 바로 그 재판정에 죄수복을 입고 끌려나온 나이 칠십의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진실이라고 여기지도 말고 옹호하지도 말며 말과 글 어떤 방법으로도 이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어기고 지동설의 근거를 제시하는 죄를 범했음을 참회하고, 앞으로 그런 이단적인 생각들을 철회하고 또 이를 저주’하겠다고 서약한 다음 종교 재판소에서 풀려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 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이를 책으로 인쇄한지 근 한 세기가 지난 뒤였음에도 인간의 헛된 믿음과 지배세력의 권위는 여전히 변치 않았던 것이다.

갈릴레오는 법정에서 풀려난 뒤 가택연금에 들어갔고, 여행의 자유를 되찾으려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79세의 나이로 죽는 날 까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뜬지 100년이 훨씬 지난 1757년에야 지동설을 주장한 모든 책들은 교황청의 금서목록에서 해제되었고, 1829년에는 코페르니쿠스의 동상이 제막되었으며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인쇄된 뒤 4백년 이상이 흐른 1984년에야 갈릴레오에 대한 교회의 판결은 잘못이었음을 공식선언하고 그의 죄를 사면하였다.

  코페르니쿠스와 브루노 그리고 갈릴레오 이들 세 사람 가운데 누구의 삶이 참되고 가치 있는 것이며 지혜로운 것이었는가? 이야기를 들은 우리 일행들은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인생이 어디 그리 간단한 것인가. 일제하의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 유신시절의 반독재 투쟁가들이 떠올랐고 그들의 용기가 새롭게 느껴졌다.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었던 얀 후세, 마르틴 루터, 칼빈의 용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