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nJ 농정전략연구센터 소장  고영곤

짓밟힌 프라하의 봄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우리는 바츨라프 광장으로 갔다. 프라하의 봄이 꽃피었던 현장, 벨벳 혁명의 현장은 평화로웠다. 프라하 구시가지와 국립박물관을 잇는 너비 60m, 길이 750m의 도로가 바로 바츨라프 광장이었다. 광장 좌우에는 5-6층 높이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유명한 크리스털 제품, 가죽제품, 귀금속 등을 파는 화려한 상점들과 은행 호텔들이 즐비한 번화가였다. 이곳 바츨라프 광장이 역사의 현장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체코의 현대사와 직결된다.

  나치 독일이 점령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1차 대전에서 오스트리아를 위해 전쟁터로 끌려 나갔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2차 대전에서 독일을 위해 전쟁터에 나갈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에 처하였다. 그리고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면서 프라하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점령하여 독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된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북한 지역이 공산화된 것과 유사하다. 처음에는 공산당 주도의 연립정부로 출발하였으나 1948년 2월 공산당이 전권을 장악하여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사회로 진입하여 1960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고 나라 이름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1956년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이면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일부 민주화 요구가 일어났으나 큰 진전은 없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열망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지식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여 1967년 10월에 프라하의 대학생들이 기숙사의 열악한 생활환경 개선과 부패한 공산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고, 경찰의 강력한 진압으로 시위는 진정 되었다. 그러나 오랜 강압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자유와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열망은 끝내 잠재울 수 없었다. 경찰력으로 소요는 진압되었으나 언제 어떻게 다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열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소련의 꼭두각시 노보트니 공산당 제1서기를 실각시키는 것으로 사태의 진전을 막으려 했다. 그리하여 개혁파 지도자 알렉산더 두브체크(Alexander Dubcek)가 공산당 제1서기를 맡게 되었다. 68년 1월 출범한 두브체크 체제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4월 중앙위에서 소련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국민의 편에 선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민주 자유화 노선을 제창하는 강령을 채택한 것이다. 재판의 독립, 의회제도 확립, 사전 검열제 폐지 등 언론 출판의 자유, 민주적인 선거제도 창설, 국외여행의 자유화 등이 포함된 이 강령이야말로 얼어붙은 동토를 녹이는 ‘프라하의 봄’ 소식이었던 던 것이다. 곧 이어 6월에는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지식인들의 ‘2천어 선언’이 발표됨으로써 개혁의 요구는 거대한 물결로 체코사회에 번져 나갔다.

  소련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체코의 민주화가 이웃 동구권국가들로 확산되는 것이 더 두려웠는지 모른다. 봄이 가고 여름이 한창인 8월 20일 바르샤바 조약국 군대 20만 명이 모스크바에서 프라하로 공수돼 온 소련 탱크를 앞세우고 체코를 침공하였다. 점령군과 시위대의 충돌이 불가피하였고 결국 58명이 생명을 잃고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은 피로 물들었다. 두브체크를 비롯한 개혁파 지도자들은 소련으로 압송되고 시위는 진압되었다. 체포, 고문, 투옥, 유배, 숙청 등 ‘사회정화’의 거센 바람이 프라하에 불어 닥쳐 50만 명이 공산당에서 추출되고 수많은 지식인이 직장에서 쫓겨나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강제로 출국 당했다. ‘인간의 얼굴’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야수의 얼굴’로 회귀한 것이다. 결국 1969년 4월 두브체크는 해임되고 공산당 강경파로서 브레즈네프의 충견으로 불리는 후사크가 강압정치를 이어나간다.

 이처럼 ‘프라하의 봄’은 소련제 탱크가 실어온 시베리아의 칼바람과 함께 어두운 동토로 바뀌는데, 사실 ‘프라하의 봄’은 1946년 체코필하모니의 창단 50주년을 기념하여 열리기 시작한 이래 매년 열리는 프라하 최대 문화행사의 하나인 음악축제 이름이다.

이 세계적인 음악축제 ‘프라하의 봄’은 체코 작곡가 스메타나의 기일(忌日) 5월 12일에 그의 교향시 ‘나의 조국’ 공연으로 시작되어 6월 초 베토벤의 ‘교향곡9번 합창’을 마지막 곡으로 하여 끝난다고 한다.

프라하의 봄은 또 뒷날, 체코출신으로 프랑스에 망명하여 활동하던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가 1984년에 발표한 원작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을 미국의 필립 카우프만이 감독해서 내 놓은 1988년판 영화의 이름이기도 하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프라하의 가을’ 햇빛을 받으며 우리는‘프라하의 봄’에 울려 퍼지는 웅장한 베토벤의 합창과, 자유를 외치는 군중의 함성, 그리고 이를 압도하는 소련군의 탱크소리가 함께 들었다. 기미년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총칼에 쓰러지는 흰 옷 입은 백성들과, 군부의 총부리 앞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쓰러져간 광주의 영령들을 보았고 금남로의 함성과 공수특전단의 총소리도 들려오는 듯 했다. 최근에 본 영화 ‘화려한 외출’도 떠올랐다.

다시 피어난 프라하의 봄과 벨벳혁명의 현장

 소련군 탱크에 짓밟혀 민주화의 시위는 수면 밑으로 사라졌으나 그 자유를 향한 욕구는 지하에서 살아 꿈틀거리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음에 틀림없다. 프라하의 봄 이후 10년 가까이 지난 1977년에 들어와 체코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이자 극작가인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 1936- )을 중심으로 지식인 241명이 민주화 자유화를 위한 투쟁을 다짐하는‘지하선언문’(77헌장)을 작성하였으나 철저한 탄압정책으로 빛을 보지 못하였다. 공산당 정권은 79년에 들어와 77헌장에 서명한 하벨 등 10여명을 구속하였고 이로써 체코의 반체제운동은 뿌리 채 뽑힌 듯하였다.

  그러나 다시 10여년이 지나, 1988년 소련의 고르바초프에 의한 개혁바람이 동구권에 불어 닥치고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20여 년 전 좌절되었던 프라하의 봄기운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1989년 11월 17일, 나치 독일에 의한 대학생 학살 50주년 추모기념일에 학생들의 휴업과 시위가 시작되었고 이에 극장들이 동참하였다. ‘자유와 진리’의 이상을 지지하는 선서와 함께 시작된 1천5백여 젊은이의 시위는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사흘 뒤에는 시위군중이 20만으로 늘어난다.

 프라하의 봄 이래 세 번씩이나 구속되었던 바츨라프 하벨이 그 수많은 군중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역설하는 연설을 한다. 이 무렵 슬로바키아의 블라트슬라브에서도 10만 명의 군중이 거리를 장악한다. 무력진압으로 사태수습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공산당 정부는 12월 9일 연립정부 구성을 제의하면서 체제연장을 꾀했으나 국민의 열망을 꺾지 못하고 마침내 후사크는 1당 독재 체제의 폐지와 헌법 개정을 약속한다.

 서구 언론은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을 무대로 한 이 무혈혁명을 ‘벨벳혁명’으로 불렀다. 1989년도 기울어가는 12월 29일 ‘프라하의 봄’이 진압된 후 집권했던 후사크가 20년 이상 이끌어온 체코 공산당의 1당 독재는 막을 내리고 공산주의연방의회는 바츨라프 하벨을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하벨은 부잣집 출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열세 살 때인 1948년 공산정권 수립 후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박탈당하고 택시운전사 등 노동일을 하다가, 뒤에 프라하 예술학교를 거쳐 극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반체제 성향 때문에 20여 년 간 작품 활동을 금지당하고 ‘프라하의 봄’이후에는 시골에 은거하며 맥주회사 직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77선언을 주도하는 등 반체제운동을 벌였다.  

 어떻든 이제 하벨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국가 지도자가 된 것이다. 그는 즉시 대대적인 사면을 단행했다. 수감자의 2/3가 풀려나고 이듬해 실시된 자유선거에서 하벨은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체코슬로바키아연방공화국을 출범시키지만 1993년 1월부터 슬로바키아가 분리 독립하게 되면서 체코는 다시 국가 이름을 체코공화국으로 바꾸었다. 극작가이자 철학자이며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던 하벨은 이제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1998년 재선되어 2003년까지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뒤 2004년에는 서울 평화상을 수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