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에세이는 박병원 전 재정경제부 차관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기행문이라는 것도 수필에 해당하는 것이고 필자가 남이 읽어 줄 만한 감칠 맛 나는 글을 쓸 능력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GSnJ의 이정환 원장님의 강권 때문이라는 점을 먼저 밝혀 둡니다. 그간 너무 신세를 많이 진 터라 원장님의 청을 거절할 처지가 못되기 때문에 오래 망설이다가 노트북을 펼쳤습니다.

원래 야생화, 원예종, 나무, 풀을 가리지 않고 꽃 사진을 찍고 다닌 지는 무척 오래 된 저이지만 아몬드 꽃을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데는 각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10 여년전 런던에 살 때 고호 미술관에 갔다가 꽃 핀 아몬드 나무를 그린 그림을 본 후 실물을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지만 남불 지역으로 가야 되겠거니 하고 미루다가 잊어버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몇 년 전 서울에서 고호 전시회를 할 때 또 그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몬드 꽃 피는 시기에 맞추어 아몬드 과수원을 찾아 간다는 것은 생각 뿐이지 쉽게 결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그렇게 세월이 가던 중 제가 6개월 실직 끝에 스탠포드 대학에서 한국경제 강의를 맡아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9개월 머무르게 되는 기회가 왔습니다. 캘리포니아도 아몬드로 유명한 곳이지요. 이곳에서 세계 아몬드의 70%, 미국 아몬드의 90%를 생산한다는 것은 이곳 아몬드 농장을 방문해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만요. 마침 대성 그룹의 친구가 이곳에 아몬드 농장도 가지고 있어 해서, 미국에 오면서부터 아몬드 꽃이 피면 연락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해 놓았지요.  

 기다린 끝에 연락이 왔는데 2월 27, 28일 주말이 그 지역에서 아몬드 축제를 하는 날이기도 하고 꽃도 가장 좋을 때라는 것입니다. 당시는 제가 매주 세 시간씩 강의를 해야 되는 때였기 때문에 주중에는 갈 수가 없다고 전제하고 있었는데, 27, 8일이 이미 약간 피크를 지난 시기라 일주일 후에 와서는 안 될 거라는 판단과 함께 연락이 온 것입니다. 아몬드 꽃이 벚꽃과 아주 닮아서 쉬 지는 모양이더군요.

그런데 2월 25, 26일에 하와이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는 김에 주말을 거기서 보내고 월요일에 돌아오는 계획 하에 예약들을 다 해 놓았기 때문에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목요일 강의도 준비해야 하고 하와이 회의 참석 때문에 결강한 것을 메꿔야 하기 때문에 엄청 힘이 들게 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10년을 기다린 아몬드 꽃을 보러가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강의 준비 자료를 다 싸들고 하와이로 가서 강의 준비를 짬짬이 하고, 하와이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인 화요일 3월 2일 메르세드로 향했습니다. 비까지 오는 아침이었지만 이 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아몬드 꽃을 볼 거냐는 생각에 무리를 한 것입니다. 

  미국의 서부는 해안에서 록키산맥까지는 평지인 줄 알았는데 가보니 종주하는 산맥들 사이사이에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마다 마을이 있는 그런 곳이더군요. 그리고 내륙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고도가 높아져서 예컨대 네바다에 이르면 주 전체의 평균고도가 1500m가 되는 식이지요. 저희 집이 있는 빨로 알또와 목적지인 메르세드 카운티의 리빙스턴,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입구인 마리포사 카운티는 위도는 거의 비슷하지만 그 사이를 이런저런 산맥들이 종주하고 있어서 이들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20여 마일 올라가 Interstate 580을 타고 동진한 후 Interestate 5를 타고 남하를 한 후 다시 동쪽으로 들어가야 하는 두 시간이 넘는 길이었습니다.

 아몬드 꽃을 굳이 보겠다고 철 맞추어 여기에 오실 분은 거의 없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마는 혹시 2월말에 샌 프란시스코 일대나 요세미티에 오실 경우에는 한 번 시도를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의 요세미티는 아직 완전히 눈 천지니까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겠지만 금강산을 철따라 네 번은 가야하듯 요세미티도 그런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진해에 벚꽃이나 광양에 매화를 보러 가신 적이 있는 꽃을 좋아 하시는 분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습니다. 홍쌍리 여사의 매화마을과 비슷한 정취를 느끼겠지만 Interstate 5를 타고 달리는 내내 이어지는 아몬드 꽃의 벌판을 볼 때의 그 아득함은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네요. I5는 시속 70마일을 허용하고 실제로는 80마일로 달리는 길이고 vista point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내려다 보면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만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저는 대성의 아몬드 농장을 지키고 있는 박병철(이름만 봐서는 딱 제 동생이지요) 씨와 점심이라도 같이 하려고 굳이 리빙스턴까지 찾아 갔지만 이 일대는 천지가 아몬드 농장이고 굳이 지키는 사람도 없으니 고속도로만 벗어나면 길 가다가 아무데나 차를 세우고 꽃은 보면 되는 판입니다. 저도 고속도로를 벗어나 얼마 가지 않아 참지 못하고 차를 세우고 남의 농장에서 시진을 실컷 찍고 들어갔으니까요. 비가 오고 꽃이 지고 있는 상황이고, 가면서 보니 농장에 따라서는 이미 꽃이 거의 진 곳도 있어서 좋은 상태의 꽃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대성의 농장의 아몬드 꽃은 거의 져 있었으니 잘 한 일이지요.

아몬드 농사는 농장주가 짓는 것이 아니고 거의 영농대행회사에 맡긴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수분을 위해서는 양봉업자에게 외주를 주어야 한다고 하니까요. 아몬드는 딸 때도 기계를 가진 대행사가 와서 나무를 흔들어 따 준다고 합니다. 농장주나 관리인은 게약을 하고, 영농대행회사가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 뿐이지요. 하기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부분의 와이너리의 포도 재배도 이런 식이라고 들었습니다. 영농이라는 것이 때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 법인데 영농대행회사들은 이렇게 계절성이 심한 인력수요를 어떻게 관리를 하는 것인지 궁금했으나 거기까지는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이곳의 농사를 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브로콜리 밭만 해도 끝이 보이지를 않았고, LA를 가는 길에 본 어떤 포도 밭은 시속 80마일 속도로 하염없이 달려도 끝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넓은 땅을 필요로 하는 농사는 미국과 경쟁을 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본, 기술, 가공, 마케팅 등을 통한 차별화와 고부가가치화가 가능한 분야에 기대를 걸어야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