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에세이는 박병원 전 재정경제부 차관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도종환 시인님의 시의 제목을 차용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하는 시귀는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고 옳은 말씀이기는 하지만 꽃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는 좀 야속한 일이지요. 가만히 있던 꽃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일이 실제로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꽃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바람을 제일 싫어하지요.

 그런데 꽃 사진을 찍다가 보면 점점 우리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은 이미 다 찍고 결국은 높은 산, 해변, 사막, 초원 등 새로운 꽃이 있는 곳을 찾아 다니게 마련인데 이런 곳들이 다 바람이 많은 곳들입니다. 숲 속에는 비교적 바 람은 많지는 않습니다마는 그 대신 빛이 부족해서 사진을 찍기 어려운 경우가 생 기지요. 바람보다는 덜 힘들게 합니다마는...

오늘은 샌 프란시스코에서 금문교를 지나 북쪽으로 조금 가다가 바로 왼쪽으로 틀어서 타말파이스(Mt. Tamalpais)를 넘어가면 있는 타말레스 곳(Tomales Point)을 다녀온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원래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국립공원을 다녀온 이야기를 쓰던 중이었는데 엊그제 다녀온 이곳이 너무 환상적이어서 그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이곳부터 소개하기로 한 것입니다. 요즘은 제 기억력을 그다지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사진을 많이 찍고 다니는 저 같은 사람들은 요즈음 디지털 카메라가 많은 것을 기록해 주기 때문에 특히 시간과 관련된 것, 이미지와 관련된 것은 기억을 되살리는 데 많이 도움이 됩니다.  
 

이 타말레스 곳 트레일(Tomales Point Trail)을 구글에서 찾아 보시려면 우선 레이곳 국립해안(Point Reyes National Seashore)을 찾으시는 게 좋습니다. 이 트레일은 좁은 반도 가운데를 따라 북상하는 도로의 끝에 어퍼 피얼스 곳(Upper Pierce Point)이라는 목장이 있는데 이 목장의 주차장에서 시작됩니다. 왼쪽으로 조금 더 가면 그 끝에는 해변으로 빠지는 트레일 입구가 있고 주차장과 화장실이 있습니다. 토말레스 트레일은 편도 4.7 마일이지만 되돌아 나올 수 밖에 없으므로 왕복 15km 가 넘는 길입니다. 오르막 내리막은 많지만 가장 높은 곳에서 잰 고도가 155 미터니까 높이는 별 것 아니지요. 길도 사람 셋 이상이 나란히 갈 수 있는  정도의 넓은 길에서 시작해서 쉽게 알아 볼 수가 있고 외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일부(1/3 정도?)는 사람 키를 넘는 노란 꽃이 피는 류핀나무(tree lupine)와 야생무우(wild radish), 그리고 거미집 엉커퀴(cobweb thistle)을 비롯한 엉겅퀴 들이 가득 들어차 길을 덮고 있기 때문에 길을 쉬 알아 볼 수가 없는 곳도 많았습니다 (결국은 찾을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마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네 시간, 쉬면서, 사진을 찍으면서 걸으면 대여섯 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땅이 거의 모래사장이나 다름이 없어 걷기가 힘들다는 점도 알려 드립니다.

 여기서 어떤 꽃들을 볼 수 있는가를 먼저 말씀을 드리면 이 시기에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꽃들이 거의 모두 다 있습니다. 그런데 트레일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 에 길 양쪽을 메우고 있는 야생무우 꽃들을 먼저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야생무우 꽃은 십자화과의 무, 배추, 유채 등의 꽃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차이는 꽃의 색깔이 원색적이 아니고 부드러운 색이라는 점과 꽃잎에 자주색의 엽맥이 뚜렷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꽃잎 한 장 안에서도 색깔이 점점 변하는 오묘한 색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그루에서도 조금씩 다른 색깔의 꽃을 피우면서 유채처럼 가지가 위로 뻗기보다 사방으로 뻗기 때문에 서로 다른 색깔의 꽃들이 뒤엉켜 있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룹니다. 그렇게 무질서하게 군집하여 피어 있어 제가 제일 좋아하는 꽃입니다. 고속도로 변 공터에서 많이 보았지만 차를 세울 수가 없어서 늘 안타까워하던 차에 여기서 제대로 만난 것입니다. 
 

 유채와 야생무우는 이 시기에 이 일대 들판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꽃입니다만 이 일대의 풀밭은 거의 목장이고 소 들이 이 풀들을 좋아하는지 목장 안에는 이 풀들이 남아나지를 않습니다. 다른 풀들도 자랄 겨를이 없이 다 먹어 치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말뚝을 박고 철사를 걸쳐 놓은 정도의 엉성한 울타리여서 소들이 이 울타리를 무너뜨릴 힘이 있을 것 같은데 소들은 그럴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울타리 안의 풀들은 10 cm 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바로 그 울타리 밖에는 유채나 야생무우가 사람 키 보다 크게 자라 있는 모습, 그리고 소가 울타리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울타리 밖의 먹이를 뜯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소들은 풀들이 자라서 제대로 꽃을 피울 겨를도 없이 다 먹어 치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중간의 1/3은 이 트레일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인 셈인데 고도의 차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야생무우는 거의 없어지고 풀밭이 계속되면서 주로 벽안난(blue-eyed grass: 일명 grass iris라고도 하며 난과에 속함)과 해변난(coast iris)이 많이 눈에 띕니다. 
 

물론 민들레나, 골드훌라워(goldflower), 미나리아재비(buttercup), 크림컵(cream cup), 부엉이 크로바(purple owl’s clover), 선명한 새파란 색을 자랑하는 일년생 류핀(lupine), tidy tips, 칼리포니아 양귀비(California poppy) 등 작은 꽃들이 경쟁적으로 자라고 있습니다마는 두가지 난이 가장 많이 보입니다. 어떤 부분은 거의 해변난(coast iris)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크림컵(Cream cups)은 여기서 처음 보았고 제 가슴이 두근거리게 했지만 여섯 시간 트레일 중에 두 번 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야생무우 천국에서는 사람 키까지 자라는 야생무우와 햇볕을 받기 위한 키 겨루기를 할 수 있는 나무 류핀과 유채, 그리고 카나다 엉겅퀴 이외에는 다른 꽃들은 보기가 어려운 만큼 이 부분이 이 트레일의 가치를 더 높여 준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아무리 보기 좋은 야생무우 천국도 종일 보면 좀 그렇겠지요.  

 마지막 1/3은 다시 야생겨자가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곳은 노란 나무 류핀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캐나다 엉겅퀴 이외에 거미집 엉커퀴 (cobweb thistle) 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어쨌던 다시 키 큰 놈들의 세상이 되어서 작은 풀꽃들은 보기가 어렵습니다. 길도 모래 천지가 되고 좁아져서 마지막에는 결국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됩니다. 어쨌던 거미집 엉겅퀴를 처음 본 것에 너무 행복했지요. 원래 엉겅퀴종류를 다 좋아하는데 가장 우아한 엉겅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왼쪽에는 태평양이 철썩거리고, 새바위(Bird Rock)에는 새들이 가득하고, 오른 쪽에는 좁고 긴 토말레스 만(Tomales Bay)이 길게 펼쳐져 있는데 모래톱이 많이 발달해 아주 좁은 곳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경치도 그만인 곳이지요.  
 

 사실은 이곳이 너무나 좋아서 제가 다녀 온 며칠 후 한국에서 부부 동반으로 저를 찾아 놀러 온 친구 두 부부를 그 전에 세워둔 계획을 다 취소하고 좀 멀지만 이곳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안개가 자욱해서 바다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안개 속의 목장과 야생화 화원, 그리고 보이지는 않고 파도 소리만 들리는 분위기도 너무 좋았습니다. 바닷가, 그것도 태평양을 직접 면해 있어 일기가 변화무쌍하고 내륙보다 기온이 낮으며 일교차가 매우 크니까 (저녁이 되면 언제나 기온이 빠르게 떨어지고 바람도 많이 붑니다.) 한여름이라도 옷은 따뜻하게 입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우면 벗을 수는 있지만 그 반대는 아니니까요.

 시간이 있으시면 레이 곳 국립해안(Point Rayes National Seashore)의 땅끝이라고 할 수 있는 등대를 가 보십시오. 등대 쪽 트레일은 300여m로 별 것 아닙니다. 그래도 토말레스 트레일(Tomales Trail)의 중간 부분처럼 풀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끝의 반대편에는 굴뚝 바위(Chimney Rock)로 가는 왕복 2마일이 안 되는 트레일이 있습니다. 제가 걸어 보지 못해서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만 트레일 입구에 꽃사진 게시판이 있는 것을 보아서는 야생화를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서남쪽 끝 부분에 있는 팔로마린 트레일 입구(Palomarin trailhead)에서 도둑고양이 야영장(Wildcat campsite)까지 가는 길도 왕복 11마일, 18킬로 정도 되는데 태평양을 굽어 보면서 걷는 경치는 물론 나무, 관목림, 풀꽃 등을 다 볼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둑고양이 캠프장은 모든 캠프 사이트가 유채 밭 안에 숨어 있습니다. 4월에 유채가 만개했을 때 갔습니다만 이곳은 모든 꽃이 개화기가 길어서 5월까지도 그대로 있을 것 같습니다. 저를 이곳으로 안내한 일행은 본래 이 유채꽃 밭을 자랑하러 저를 안내했습니다마는 트레일 도중에 너무나 다양한 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레이 곳(Point Reyes)은 국립해안(National Seashore)로 지정이 되어 공원처럼 관리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땅은 아직도 목장입니다. 남쪽에서부터 A로 시작해서 알파벳으로 이름이 붙여진 목장들이 아직도 일부는 운영되고 있지만 일부는 관광 대상인 고적으로 취급 받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 정도면 유적지(historic)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제가 사는 집에서는 여기가 두 시간 남짓 걸립니다. 하루 밤을 묵기에는 숙박비가 아깝고 당일치기로 하기에는 좀 부담스러운데 결국 아직 1박 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오셔서 어차피 어디에선가 묵어야 하는 분들은 인버니스(Inverness)나 조금 떨어진 레이곳 역(Point Reyes Station)이나 스틴슨 비치(Stinson Beach) 등에서 묵으면서 레이곳(Point Reyes)을 완전 정복하는 것도 괜찮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오가며 아담한, 운치 있는 숙박시설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레이곳 역(Point Reyes Station)에 있는 스텔리나(Stellina)라는 이태리 식당은 이 지역의 100대 식당에 뽑혔다고 할 정도로 괜찮습니다. 값은 전혀 부담이 없고요. 차 한잔을 마시더라도 이 마을에는 한 번 들려 보십시오. 아주 작은 서부 마을의 원래 모습을 아직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을 중심가가 총 100m도 안되니까 시간 부담도 없습니다. 한 번 가 보시기를 강력히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