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행기는 GS&J 회원회 회장이신 윤여임 대표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 신비주의 시인, 메블라나 루미를 만나고 파묵칼레로 가던 길  

  셀주크투르크의 수도였던 콘야의 메블라나 루미박물관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흐린하늘 아래 루미 박물관의 코발트빛 원통 탑이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는데, 빨간 튤립과 히아신스가 돌 조각품 사이로 피어있어 이국적 정취를 더했다. 비닐덧신을 신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눈길을 확 끄는 것은 금박과 갖은 문양과 색채로 치장을 한 우아한 각종크기의 쿠란들이었다. 이 쿠란들은 어찌나 아름답던지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촬영금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메블라나 루미는 13세기의 사람으로 신비주의(수피즘)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내면을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음악과 춤이라고 했던 루미는 메블레뷔춤을 고안했다. 메블레뷔춤 경연대회가 루미를 기념하는 축제의 형식으로 해마다 12월 둘째 주에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여든 가운데 열린다고 하니, 루미에 대한 터키인들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짐작 할 수 있다.

  음악은 자신의 내면을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식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세대를 초월한 정서를 공유하는데 그만이라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진행되었던 ‘밤의 세미나’에서 몸소 체험을 하였다. ‘사단법인 유정천리’ 라는 우리가요 모임의 회원이기도 한 유교수의, 가요는 물론 철학과 문학과 역사에 대한 지식의 넓이와 깊이는 한이 없었다. 유교수 방에서는 밤마다 세미나가 열렸다. 서먹했던 사람들이 하루 밤 세미나의 추억을 갖게 되면 더 할 수 없이 친해지고 이야기 거리가 많이 생겼다. 유교수가 진행하는 세미나는 다소 철학적이고 정서적이면서 재미가 그만이었다. 둘러 앉아 맥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첨예한 시사문제는 물론 사회전반에 걸친 고민과 관심사항들이 오갔다. 때론 문학이나 철학 혹은 문화사 강의처럼 샛길(?)로 빠지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세미나의 본 목적인 음악을 통한 내면여행은 터키여행 내내 충실히 진행되었다.

 박물관 밖으로 나오니 모여 있던 터키 소년들 중 하나가 내 소매를 잡아 다니더니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이리저리 포즈를 잡고 함박웃음을 웃는 소년들을 일행과 함께 카메라에 담고 이메일 주소를 받았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코리안이라고 하면 쪽지에 적어 온 한국말로 된 인사를 건네는 많은 소년 소녀들이 한국사람과 사진을 찍고 싶어했다. 알고 보니 그것이 다 한류의 영향이란 소식을 전해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인기있는 그룹은 특히 ‘동방신기’인데 한국인으로서의 처신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서 받은 이메일 주소는 hotmail이었는데, 돌아와서 간단한 영어편지와 함께 보냈던 사진들은 모두 발송실패가 되어 되돌아왔다. 휴면메일이라는 안내였다. 본의 아니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버스는 파묵칼레를 향해 출발하였다. 차창 밖으로는 대부분 양치기 한명과 커다랗고 순해 보이는 개 두 마리 정도가 함께 있는 양떼가 종종 지나갔다. 날은 간간히 볕이 나기도 했으나 여전히 흐릿했다. 차창 밖을 지나는 풍경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이삭이 팬 밀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무가 한층 푸르러지고 있는 걸로 보아 고원지대에서 벗어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휴게소에서 쉬면서 홍차도 마셨다. 터키 어디를 가든 투명한 유리잔에 하얀 각설탕이 곁들여 나오는 홍차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일행과 웃고 떠들다가도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은 어딘가 하는 생각이 들면 한 순간 막연한 슬픔 같은 것이 가슴언저리를 지나갔다. 아슬아슬하게 참고 있던 하늘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차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보며 그 어느 날의 여행길을 생각했다. 폴란드의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수용소)을 둘러보고 슬로바키아의 타트라 호수로 넘어가는 길에 저렇게 비가 뿌렸었다.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울 수 없었던 순간, 슬픔인지 분노인지 정체모를 마음으로 인간이었던 것이 스스로 부끄러웠던 그 순간에 버스유리창으로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내리는 그 빗물의 서글픈 추억이 하필 이곳에서 생각이 났다.

 비가 그친 뒤 구름 저 건너편에 황홀하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지는 노을은 저리도 황홀하건만 인생의 마지막은 어찌도 그리 힘들기만 한 걸까.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마지막 ‘그날’을 향해 가까스로 병상의 나날을 보내고 계시는 아버지와, 여행 중에 무슨 일이라도 닥칠까봐 노심초사하는 엄마 생각으로 명치끝이 바늘로 찌른 듯 아파왔다.

 황혼은 여전히 우리를 따라 오면서 차츰 푸른 어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세상의 어지러운 일을 덮어버리기라도 하듯 밤의 여신이 내려앉은 길가엔 간간히 야트막한 지붕아래 하나 둘씩 등불을 밝힌 집들이 지나갔다. 따스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저 지붕아래 사는 이방인들에게도 내가 떠나온 동쪽 먼 나라의 삶의 애환과 작은 기쁨들이 한가지로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버스는 여전히 어둔 길을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