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행기는 GS&J 회원회 회장이신 윤여임 대표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 즐거운 방랑자들의 ‘맨발의 청춘’

(베르가마의 페르가몬 유적지와 고대 종합병원 아스클레피온)

  헬레니즘 시대의 유적지 페르가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케이블카를 타야했다. 케이블카 안에서 멋진 광경을 카메라에 담아보고자 했던 시도는 그만두어야 했다. 어쩐지 흔들림이 편편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케이블카 멀미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언덕 위에 비스듬히 자리 잡은 페르가몬의 무너진 유적에는 산지사방 노란색과 하얀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히에라 폴리스의 빨간 양귀비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자잘한 야생화는 아무렇게나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를 절경으로 연출하고 있었다.

 비스듬히 올라가니 아테나 신전 터 옆의 도서관 터인 돌무더기가 보였다. 이곳은 장서를 20만권이나 보유했던 도서관이라 하니 그 규모가 어땠을지 짐작이 잘 되질 않는다. 에페소스의 켈수스 도서관을 비롯하여 유적지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도서관 유적지를 보며 이들이 얼마나 학문적인 열정이 컸던 사람들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물론 이시대의 도서관이란 것은 지배계급에 속한 아주 극소수 사람들의 전유물이었겠지만, 사람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기록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욕구는 종족번식 본능처럼 매우 강한 인간의 본능임이 분명하다. 트라이아누스 황제 신전에서는 한쪽이 무너져버린 기둥을 앞에 두고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으로 만든 기둥 양식을 공부했다. 기둥의 꼭대기에는 메두사를 새겨놓았는데, 헬레니즘 시대에 뱀은 지혜로운 존재로 믿었다고 한다. 지진의 영향 때문에 여러 도막으로 잘려 땅위에 누운 대리석기둥 조차도 이국적이고 운치가 있어 보였다. 대리석 구조물의 폐허는 다른 것과는 달리 을씨년스럽질 않게 느껴지는 것은 계절 탓인가, 마음 탓인가 분간이 안 갔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언덕 아래쪽으로는 굉장히 큰 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결국 사람들은 살기 좋은 곳을 따라 다 아래로 이동해 갔고 성터는 비어가면서 쇠락 해 갔던 것이다.

  아스클레피온신전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봉헌된 신전으로 기원후 1세기경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죽음이 임박한 사람과 임산부를 못 들어오게 했다고 한다. 신성한 곳을 죽음이 더럽힐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치료효과를 높여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함이었을까? 성스러운 길을 지나가는데 대리석 잔해에 긴 이끼 꽃이 2000년 풍상의 세월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정신요법을 사용했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정신요법을 받는 환자들이 지나가는 통로 위로는 하늘이 다 보이는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그 위에서 의사가 환자들에게 치유의 확신을 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이 시대에 이미 육신의 병 못지않게 정신질환의 존재를 알아 치료했던 사람들의 혜안이 정말 놀라웠다.

 아스클레피온에도 원형극장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전날 밤에 맹렬히 연습한 ‘맨발의 청춘’ 공연을 하였다. 남성 4인조 합창단의 ‘맨발의 청춘’ 공연은 정말 잊을 수 없는 행사였다. 가사에 밝은 나는 그들 뒤에 우산을 쓴 채 쪼그려 앉아 가사도우미를 했다.

‘눈물도 한숨도 나 홀로 씹어 삼키며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의 목숨을 걸었다.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마라

그대를 태양처럼 우러러 보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 줄 날 있으리다.’

우리는 원형극장을 보면 노래를 불렀다. 원형극장의 음향체계는 어찌나 과학적인지 기기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 많은 객석에 고루고루 음향이 전달되는 놀라운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노래를 부르는데 음정 박자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마음은 하나. 단 하나의 목숨을 건 사랑,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비장한 한 남자의 청춘이야기를 노래로 들으며 우리는 그저 즐거운 방랑자였다. 고대 유적지엔 봄비가 내렸고 21세기를 사는 동방의 방랑자들의 마음속엔 훈훈하고 즐거운 감동의 빗물이 흘러내렸다.

 공연이 끝나고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신전 안을 돌아다녔다. 여기저기 보이는 소나무와 잣나무에서 느끼는 야릇한 동질감이 이 먼 땅을 가깝게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날씨가 환상적으로 좋았다고 터키 여행자들이 말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처음 터키 땅에 발을 디뎠던 이스탄불로 돌아가기 위해 이즈밀 공항으로 향했다. 유재원교수와 터키에서 일정을 마치는 몇몇 일행들과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