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행기는 GS&J 회원회 회장이신 윤여임 대표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네 번째 이야기

  시간은 잘도 흘러간다. 비 온 뒤 연두 빛은 한결 장해지고, 처녀처럼 도도하고 싱그러운 신록이 숲을 가득 채우는 숨결이 산들바람에 실려 오는 듯하다. 이제 그리스로 갈 시간, 그리스는 예전의 그리스가 아니다. 내 발길이 지나 간 그리스, 신전에 두고 온 어느 동양여인의 꽃씨같은 그리움을 가진 그리스는 예전의 그 곳이 아니다.

 - 태양의 나라 그리스

 화창하고 맑은 날은 확실히 축복이다. 지난밤엔 일정이 늦어져 서너 시간도 채 못잔 것 같은데 그리스에서 맞은 아침은 깃털처럼 가볍고 명랑했다. 제우스신이 장난을 치다 파란 물감 통을 엎지른 듯 하늘은 온통 파랗고 황금빛 태양이 만상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당한 후, 그리스의 학문과 예술을 사랑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 걸친 광대한 제국 건설에 의해 헬레니즘문화를 탄생시키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운 그리스는 동방교회의 중심지로,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비잔틴 제국이 정복당할 때까지 문화를 꽃피운 곳이다.

 남부유럽, 발칸반도 남단에 위치한 그리스는 동쪽으로는 에게 해와 남쪽으로는 지중해연안에 위치한 반도국가다. 여행하는 동안 어디에 눈길을 두어도 바다가 보일만큼 바다 사이에 기름하게 위치한 그리스에서 터키의 학술답사성격보다는 다소 느슨한 일정을 보낼 수 있어 몸도 마음도 상당히 여유로웠다. 야트막한 구릉에 한없이 이어지는 올리브나무와 오렌지 나무를 보며 정말 지중해에 와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아테네 시내에는 가로수가 대부분 오렌지 나무인데, 가로수 오렌지는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호기심 만발한 우리들은 오렌지를 주워 식당에서 씻어서 먹어 보았다. 왜 못 먹게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시고 떫고 쓴 맛이 질긴 속껍질 속에서 우리를 놀라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지방의 식용 오렌지는 어찌나 달고 물이 많아 맛있는지 모른다.

 또한 양젖으로 만든 요구르트는 찰지고 양젖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아 정말 별미중의 별미였다. 우리나라의 산양유는 품질이 좋음에도 냄새 때문에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닌데 무슨 비법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고린토 운하를 돌아보고 거리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미케네 유적지를 돌았다. 완만한 산길을 따라 영욕의 역사 속에서 소임을 마감한 옛 삶의 자취를 찾아 올라갔다. 늙은 돌들 틈에 피어있는 들꽃들이 사랑스러웠다. 잔잔한 그리움, 오래 된 역사에 대한 영감 같은 것이 바람결을 따라 흘러갔다.

- 파르테논 신전과 남대문의 운명

 파르테논 신전은 보수공사중이라 좀 어수선하기는 했으나,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문화의 보물 제1호라는 수식어가 걸맞게 장대하고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신전 기둥은 여러 개의 둥근 조각을 쌓아서 만든 것인데, 만든 비법이란 것이 넓적한 원통형대리석조각을 쌓아놓은 후에 한꺼번에 홈을 파내었기 때문에 그렇게 여러 조각임에도 고르게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신전을 건립하기 위해 기금을 모금했는데, 어찌나 많은 성금이 들어왔는지 자금이 넉넉해 신전건립에 동원된 노예에게도 수당을 지불해서 신전이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라고 입담 좋은 가이드 선생이 전한다.

 2500년 전, 아크로(높은)폴리스(도시)에 대리석으로 신전을 세웠던 그리스인들의 예술적 안목도 탁월했지만 무엇보다 대리석을 진흙처럼 자유자재로 건축 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던 자연적 혜택도 부러웠다. 금강송을 대들보로 세웠던 조선의 세심하고 수려한 건축물, 대한민국 국보 1호인 남대문이 얼빠진 시민 한 사람의 불장난으로 인해 잿더미로 변한 뼈아픈 역사를 지닌 우리에겐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컸다. 결국 세월이 지나갈수록 풍상의 연륜을 더해만 가는 돌로 된 유적들과, 나무와 흙으로 된 유적들이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은 그 무엇으로도 뛰어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