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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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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야기(3), 일본의 통일과 豊臣秀吉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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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야기(3), 일본의 통일과 豊臣秀吉의 등장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1) 일본의 정치와 막부(幕府)

 

 (1)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12세기 말경 일본에서는 천황권의 계승을 둘러싸고 상황과 천황이 대립하였다. 귀족들도 두 패로 나뉘어 다툼이 벌어졌다. 양쪽 모두 자체의 무력이 없어 사무라이 무사단을 고용하였다. 이 싸움은 천황 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논공행상을 둘러싸고 무사단이 대립하였다. 5년 동안의 내전 끝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이끄는 겐씨(源氏) 무사단이 헤이씨(平氏) 무사단을 제압하고 스스로 쇼군(將軍)이 되었다. 요리토모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무가정권(武家政權)을 창시하였는데 이것이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였다. 막부의 장군(쇼군)은 천황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모든 권력을 행사하였으나 천황제도는 그대로 존속시켰다.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 통치자가 된 요리토모는 자신의 휘하에 들어온 유력 가문 및 무사들과 주종관계를 맺었다. 그는 슈고(守護)와 지토(地頭)라는 이름의 관직을 많이 설치하였다. 장군 요리토모는 대소 무사단의 지도자를 슈고로 임명하여 영지를 주거나 또는 지토라는 벼슬을 주었다. 슈고는 영지를 받아 지방을 통솔하는 대신 장군을 수호해야 하는 의무를 지녔다. 장군은 한 영국(領國 또는 領地)에 1인의 슈고를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영지 내의 백성을 통솔할 수 있도록 행정권과 사법권, 군사권을 주었다. 이 시대의 영주를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이라고 한다. 장군과 지방 영주와의 관계는 토지를 주고 충성을 바치는 주종관계로 봉건제도와 다름이 없었다.

 

 (2)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가마쿠라 막부는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침공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많은 비용을 지출하였다. 막부는 고갈된 재력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무리를 범하여 무사들의 불만을 샀다. 결국 무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하였다.

 

 가마쿠라 막부가 망하자 고다이 천황은 막부가 세운 천황을 폐하고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하였다. 이에 반발한 아시카가 다카우찌(足利尊氏)가 무사들을 끌어 모아 천황의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를 점령하였다. 아시카가는 1336년 새 천황을 옹립하고 자신은 쇼군(將軍)이 되어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창건하였다.

 

 15세기 중반에 들어와 4대 장군이 후사가 없자 유력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당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슈고 다이묘(守護大名) 가운데 두 가문이 서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장군의 후계자로 만들겠다고 싸움을 벌였다. 전국의 다이묘들도 양편으로 나뉘어 전면적인 내란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내전을 오닌(應人)의 난(亂)이라고 한다.

 

 2) 戰國時代와 戰國大名

 

 1464년에 시작된 오닌의 난은 11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수도인 교토는 궁궐은 물론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로마치 막부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슈고 다이묘들은 더 이상 막부의 통제를 받으려 하지 않고 세금을 내는 것도 거부하였다. 막부가 힘을 잃자 다이묘(大名)들은 마음대로 군사를 동원하여 이웃의 영지를 빼앗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극상(下剋上)도 만연하여 힘이 있는 무사들이나 토호들도 주인을 몰아내고 영주가 되었다. 슈고 다이묘들 가운데는 자신의 부하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오닌의 난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하여 전국 통일의 기초가 마련될 때까지 약 100년 간을 일본의 센고쿠 시대(戰國時代)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전국의 군웅들이 제멋대로 다이묘를 자처하고 군사를 일으켜 다른 다이묘의 영토를 빼앗고 빼앗기기를 계속하였다. 쟁투의 시대를 거치면서 막부와 관련 없이 독자적으로 힘을 키워 대명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센코구 다이묘(戰國大名)라고 하였다. 센코구 다이묘는 직접 농민으로부터 연공(年貢,토지세금)을 징수하였다. 센코구 다이묘는 토지와 농민을 직접 장악하고 무력과 경제력을 갖춘 일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봉건영주가 되었다.

 

 3) 室町幕府시대와 戰國時代의 경제발전

 

 (1) 무로마치 시대의 산업발전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와 일본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농업과 상업ㆍ수공업이 꾸준히 발달하였다. 이 시대에는 사원(寺院)이나 영주에 예속되어있던 수공업자는 독립하여 시장을 위한 생산에 나섰다. 그 가운데 철물업(鍛冶와 鑄物業)과 직물업(織物業)이 특히 발달하였다. 철물업자들은 영주들의 보호를 받아 질이 좋은 도검을 생산하였다. 도검은 명나라에 수출도 하였다. 직물 생산은 마직물(麻織物)이 발달하였다. 견직물은 각지에서 만들었으나 고급품은 明으로부터 수입하였다. 면직물(綿織物)은 조선과 명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였다.

 

 (2) 상업발전

 

 일본에서는 수공업 생산이 증가하면서 상품 유통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지방에도 3일시, 6일시가 생겼다. 시장의 운영은 처음에는 영주의 관리 아래 있었으나 곧 상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도시에서는 단일 상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도매시장도 생겨났다. 오사카의 미곡시장, 요도(淀)의 어시장 등이 생기고 도매업도 전문화되었다. 상설 점포를 가진 소매업자도 증가하였다. 특히 교토에는 큰 상업지구가 형성되었다. 지방 생산업자---지방상인---도시 전문시장(問屋)---도시 소매상---소비자라고 하는 상품 유통기구가 성립하였다.

 

 상인들은 상대적으로 시장이 좁고 수요가 적기 때문에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동업자 조직인 자(座)를 결성하였다. 각종 영업 부문에 자가 결성되었다. 수공업자들도 자를 결성하여 독점적 영업을 하였다. 자는 운수 부문과 예능 부문에도 있었다 육상에는 말과 마차를 빌려주는 마부(馬夫)座가 활약하였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화폐가 사용되었다. 주로 동전이 통용되었는데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이었다. 당시 사용된 동전은 명나라의 홍무전(洪武錢)ㆍ영락전(永樂錢)ㆍ선덕전(宣德錢)이 많았다. 한때 명나라의 해금 강화로 동전의 수입이 금지되자 사주전도 나타났다. 금융기관도 생겨났는데 주로 술집이나 전당포를 경영하며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카야(酒屋)ㆍ도우라(土倉)등이 성업하였다. 사원(寺院)에 의한 고리대도 많았다. 민간의 상호 금융조직으로 무진(無盡)이 발달하였다.

 

 (3) 전국시대의 산업발전

 

 戰國大名들은 오직 실력으로만 살아 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부국강병에 뜻을 두고 서로 경쟁적으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농업부문에서는 경작면적의 확대와 수리사업의 개선이 중심이 되었다. 일본의 경지 면적은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 99만 정보였는데 전국시대 말기에는 163만 정보로 확대되었다. 농지 증가분의 대부분은 戰國大名들에 의하여 개발된 경작지였다. 대명들은 하천에 제방을 쌓고 용수로를 건설하는 한편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지로 만들었다.

 

 (4) 居城의 축조와 도시의 건설

 

 16세기 중엽부터 대명들은 경쟁적으로 거성(居城)을 건설하였다. 성의 주변에는 초카마치(城下町)라는 도시도 건설하였다. 조카마치는 무사가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과 상공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나누었다. 대명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의 경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카마치에 상공업자와 무기를 만드는 장인들도 불러들여 살게 하였다. 대명들은 조카마치를 영국경제의 중심으로 삼았다.

 

 조카마치는 점차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대명들은 상공인들이 조카마치에서 자유롭게 영업할 수 있도록 도로를 개선하고 독점제를 폐지하고 세제를 개선하였다. 수륙교통의 요지에도 미나도마치(港町)라고 부르는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가 생겼다. 원격지에서 다량의 미곡과 상품을 수송하기 위하여 수운(水運)이 발달하였다. 대명들은 군사적ㆍ정치적 목적으로 교통로를 정비하고 숙소와 역마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영국 내의 상거래의 자유화를 위하여 국내의 관소(關所)를 폐지하였다.

 

 (5) 南蠻무역과 鐵砲의 전래

 

 1543년 포르트갈의 무역선 1척이 폭풍을 만나 일본 구주의 남쪽에 위치한 다네가 시마(種字島)에 표착하였다. 이 배에 탄 선원들은 철포(鐵砲)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신기하게 여긴 영주 다네가시마 도키다카(種字島時堯)는 철포를 발사해 보게 하였다. 철포는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며 목표물을 명중시켰다.

 

철포의 위력에 감탄한 영주는 즉시 2천금이란 거액을 주고 철포 2정을 구입하였다. 그는 가신들을 시켜 철포와 화약의 제조법을 배우게 하였다. 그 후 철포는 기슈(紀州)의 네고로(根來), 이즈미의 사키이(堺)로 전해졌고 그곳의 기술자들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되어 일본의 전역으로 퍼졌다.

 

 (6) 남만무역과 중계무역

 

 1543년 포르트갈 선박이 種字島에 표착한 사건을 계기로 포르투갈인들은 매년 구주의 여러 항구를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남만무역은 나가사키(長崎)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1547년부터 매년 무역선을 인도의 고아와 명나라의 마카오에서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총ㆍ화약ㆍ약재ㆍ향료와 명나라에서 구입한 생사와 비단을 일본으로 가져왔다. 일본은 은과 도검ㆍ칠기ㆍ해산물 등을 이들에게 팔았다.

 

 4) 豊臣秀吉의 등장과 일본의 통일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군웅이 할거하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 통일의 초석을 놓은 무장이었다. 그는 짧은 시간 내에 중부 일본을 평정하고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멸망시켰다. 그는 일본의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뜻밖에도 그의 수하 부장인 아께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노부나가의 부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원정 중에 그의 주군이 암살되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재빨리 회군하여 반란군을 격파한 후 정권을 잡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의 대명들을 차례로 정벌하고 1585년 간빠쿠(關白)의 지위에 오르면서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그는 구주의 시마즈(島津)와 오다와라의 호조(北条)를 정벌하고 동북지방의 실력자인 다테 마사무네(伊達正宗)를 복속시켜 전국을 통일하였다. 수길은 오사카에 거대한 규모의 성을 쌓아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그는 통일을 완성하자 간빠쿠 벼슬을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쓰쿠(豊信秀次)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스스로 다이코(太閤)라는 더 높은 직위를 만들어 취임하였다. 수길(히데요시)은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내고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5) 풍신수길의 개혁정책

 

 (1) 풍신수길의 大名 임명과 領地의 재분배

 

 수길은 일본을 통일 한 후 천황제는 그대로 존속시키는 것으로 하였으나 사실상 일본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다이묘(대명)들의 영지를 몰수, 전봉(轉封), 감봉(減封), 증봉(增封)하는 것은 물론 봉지(封地)를 를 새로 줄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수길은 집권한 후 적의 영지는 몰수하고 전국의 토지를 재조사하여 구획하고 농지를 戰功에 따라 다이묘들에게 재분배하였다.

 

 수길로부터 1만석 이상의 토지를 받은 영주는 166명이었다. 이들의 영지에서 생산되는 석고는 총 1천 5백 90만 석이었다. 수길은 풍신정권의 수장으로서 필요 시 휘하의 대명들에게 군사의 동원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수길은 임진왜란 때 이 권리를 행사하여 전국의 유력한 대명들에게 군사동원령을 내렸다.

 

 (2) 太閤檢地

 

 방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국을 통일한 수길은 그의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검지(檢地)와 병농분리(兵農分離) 정책이다. 검지는 토지 소유관계를 명확히 하여 연공(年貢)의 수취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토지조사사업을 의미한다. 수길이 실력자가 되면서 본격적인 검지가 시작되었다. 검지는 1582년부터 시작하여 1598년까지 계속되었다. 수길은 전국의 농지 면적과 평균 생산량을 파악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였다. 그는 토지면적을 재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동일한 기준인 석고제(石高制)를 채택하였다. 석고는 토지의 생산력을 현미로 환산하여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어떤 마을은 경지가 몇 평, 경작자는 몇 명, 생산량은 몇 석 등으로 파악하여 기록하고 이와 같은 정보는 마을 단위, 군현단위, 다시 대명의 영지단위로 합산하였다. 수길은 전국의 대명에 대하여 각 지역별 조감도를 첨부한 지형, 경작지의 수, 소작인의 수 등을 조사하여 제출하도록 하였다. 검지 결과 전국의 경지면적은 약 150만 정보로 나타났다. 석고는 국가적 중대사, 예를 들면 전쟁이 일어날 경우 석고 1백석 당 군사 몇 명, 말(馬) 몇 필 등을 동원하도록 할당하는 기준으로도 사용하였다.

 

 수길은 전국에서 제출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일본 전체의 인구 지도, 생산 지도를 작성하였다. 연공도 종전에는 5公 5民, 4公 6民 등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수길은 6公 4民으로 통일하여 수확량의 60%로 정하였다. 수길은 연공 이외의 다른 세금은 모두 없앴다.

 

 (3) 兵農分離와 상비군제도

 

 병농분리(兵農分離)는 농민들의 농사와 병역의무를 분리하는 것을 말한다. 농민은 농사만 짓고 군사는 직업 군인제를 통하여 상비군을 운영하는 것을 뜻한다. 수길은 1588년 도검 몰수령인 가타나가리(刀狩令)를 내려 농민들의 무기소유를 금지시키고 가지고 있던 칼ㆍ활ㆍ창ㆍ철포 등을 모두 몰수하였다. 무기는 직업군인인 무사 계급만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길은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은 직업적 무사들이 담당하고 농민들은 종전과 같이 무기를 들고 전쟁에 나갈 필요가 없으며 오직 농사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포고하였다.

 

 수길은 가타나가리 정책을 통하여 농민들의 반란을 사전에 예방하고 농민들은 농사만 지어 농업생산의 안정도 꾀하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가타나가리 정책은 兵農分離로 가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다. 수길은 또 무사가 상인 또는 농민이 되는 것을 금지하고, 농민들이 다른 직업을 갖는 것도 금지하였다. 또 무사가 주인의 허가 없이 그의 곁을 떠나는 것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서 병농이 분리가 되어 무사ㆍ상인ㆍ농민의 신분이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4) 藏入地의 설정과 주요 무역항 및 금은광의 직접 경영

 

 수길은 직속 가신단을 상비군으로 편성하였다. 수길은 자신의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하여 구슈(九州)와 긴키(近畿)지방의 大名 영지 안에 연공을 직접 징수할 수 있는 구라이리지(藏入地)를 설정하였다. 장입지는 수길의 직속 영지와 같은 성격을 지녔는데 장입지에서 나오는 쌀은 바로 히데요시의 미곡창고로 보냈다. 수길이 설정한 장입지의 면적은 약 200만 석 규모였다.

 

 전국시대 말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伸秀吉)는 일본을 방문한 포르투갈 상인들과 예수회 신부들을 통하여 일찍이 세계정세에 눈을 떴다. 수길은 외국과의 무역이 부국강병에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무역과 통상의 독점을 위하여 堺(사카이)ㆍ博多(하카다)ㆍ長崎(나가사키) 등의 무역항과 大阪(오사카)ㆍ伏見(후시미)등의 대도시를 직할령으로 편입시켰다. 수길은 또 은이 세계의 통화가 되었음을 인지하고 일본을 통일하자마자 전국에 있는 금ㆍ은광의 소유권을 직접 장악하였다. 당시 島根(시마네)에 있는 이와미(石見) 은광에서는 막대한 양의 은이 생산되었다. 수길은 이와미 은광을 비롯하여 주요 금ㆍ은 광산을 접수하여 직접 금화와 은화를 주조하였다.

 

 6) 풍신수길의 야망과 명나라 정벌

 

 일본은 일본에서 제련된 은을 이용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상인으로부터 후추(胡椒)와 백단, 약재 같은 남방의 특산물과 중국의 비단과 생사 등을 수입하는데 사용하였다. 일본의 銀은 조총의 탄환과 화약을 만드는데 필요한 납과 초석을 수입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에서 사용한 막대한 양의 탄환과 화약은 포르투갈 등 외국인에 의하여 공급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초석과 납은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아 전량 외국인을 통하여 사들였다.

 

 (1) 필리핀ㆍ유구 복속과 대만 침공 시도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은 오키나와(琉球)의 국왕을 위협하여 신하로 입공(入貢)하도록 하였다. 수길은 1592년 사쓰마 번(薩摩藩)의 시마즈(島津)를 시켜 유구 왕에게 征明(조선침략)을 위한 군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유구 왕은 유구는 작은 섬나라 이므로 인력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병력 대신 군량을 보내주었다.

 

 수길은 또 필리핀에 있는 스페인총독에게 1558년, 1591년, 1593년 세 차례에 걸쳐 사자를 보내 입공을 요구하였다. 수길은 1593년에 타이완에도 사자를 보내 입공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장수들을 보내 정벌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수길은 2백여 척의 배를 보내 타이완과 팽호도를 공격할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는데 명이 이를 먼저 알고 팽호도에 방어망을 구축하자 이 계획은 중지되었다. 수길은 조선에게도 입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수길은 일본을 통일한 후 동남아의 여러 나라를 복속시키고 명나라를 정복하여 대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길이 명나라로 가기 위하여 먼저 조선을 침략한 것을 한 과대망상자의 엉뚱한 꿈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것은 당시 동서양 무역로의 중심이었던 남 중국해로 진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외교적 또는 군사적 시도를 한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2) 조선의 入貢을 위한 외교교섭

 

 히데요시는 九州 정벌에 나서면서 조선 침공을 위한 외교 교섭에 착수하였다. 수길은 대마도 영주에게 조선 국왕으로 하여금 일본에 입조(入朝)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대마도 영주 소 요소시게(宗義調)는 대마도가 경제적으로는 조선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므로 양국간의 분쟁을 원치 않아 조선 출병 대신 공물과 인질을 취하는 선에서 마무리할 것을 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 요소시게는 아들 소 요시모토(宗義智)를 시켜 조선과 교섭하였다.

 

 조선은 일본 사절의 접견은 커녕 국서도 접수하려 하지 않았다. 국왕의 도일은 말할 것도 없고 통신사의 파견도 거절하였다. 조선은 왜구와 내통하여 노략질을 일삼다가 일본으로 도망간 사화동과 손죽오를 송환하고 납치해간 조선인을 돌려보내면 사절을 접견하겠다고 대응하였다. 요시모토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사화동 등과 납치해 간 조선인들을 돌려보냈다. 조선은 소문으로 들려오는 일본의 침략 의도를 확인할 겸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정사는 황윤길, 부사는 김성일을 임명하였다. 조선통신사는 1590년 4월 부산을 출발하여 동년 7월에 교토에 도착하였다. 이때 수길은 관동지방의 호조(北条)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 중이었다. 수길은 2개월 여나 조선통신사를 접견하지 않고 기다리게 한 다음에 접견하였다. 수길은 조선통신사에게 명나라를 정복할 계획을 말하고 조선이 이에 협조할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작성하여 조선 국왕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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