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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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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야기(4), 명ㆍ일의 군제와 병참체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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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야기(4), 명ㆍ일의 군제와 병참체계(2)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2. 일본의 군제와 병참체계

 

1) 전국시대 일본군의 조직과 편제

 

 (1) 다이묘(大名)의 연합군

 

중세시대 일본의 군대는 다이묘(大名, 藩主, 領主)별로 조직되었다. 일본은 쇼군(將軍)이 전국의 토지를 다이묘들에게 나누어주고 충성을 바치도록 하는 봉건제를 택하였기 때문에 나라 전체의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대명군은 중앙집권 국가인 명이나 조선군에 비하여 군세가 크지 않고 군제는 비교적 단순하였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참전한 다이묘들의 군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지휘하는 연합군의 형태를 가졌다.

 

명군이나 조선군은 황제나 국왕이 최고 사령관을 임명하고 법에 정해진 군제에 따라 각급 부대가 있고 지휘관이 임명되지만 일본의 경우는 대명이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대명이 거느리는 군대는 그의 가신이기도 한 무사들에 의해 지휘되었다. 무사 계급은 처음부터 전쟁이나 폭동, 분쟁 등을 무력으로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고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한 사람들이었다.

 

(2) 무사(侍)

 

전국시대 일본 군대의 기간을 이루는 것은 무사 집단이었다. 무사(사무라이)라는 것은 무(武)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평상시에는 주군(主君)의 신변을 호위하고 전시에는 앞장서서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직업적 전사를 말한다. 무사들은 보통 무가(武家)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무술을 연마하여 싸움에 재능을 가진 사람들로 주군에 대해 충성심이 강하며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는 전업군인이었다. 무사는 보통 상층무사와 하층무사로 구분할 수 있다.

 

무사들 가운데는 계급이 높아 주군(大名)을 직접 모시는 상층무사들은 주군으로부터 토지(所領)를 받았다. 상층무사는 그에게 충성을 하는 또 다른 그룹의 하층무사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들은 상층무사로부터 토지 또는 녹미(祿米) 또는 지행(知行)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사무라이(侍)신분을 가진 무사들은 전쟁을 통하여 공을 세우고 이름을 얻기 원하므로 전쟁이 있을 경우 전투를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지위가 높은 상층무사들은 호화로운 갑옷과 투구를 쓰고 말을 타고 전쟁에 참가하였다. 일본의 무사들은 투구와 갑옷, 말 등을 자기 비용으로 조달하였다.

 

(3) 족경(足輕)과 잡병

 

전국시대의 군대는 직업적 무사라고 할 수 있는 소수의 사무라이와 일반 백성으로부터 모집한 다수의 이시가루(足輕)와 잡병으로 구성되었다. 보병가운데 일단의 특공대적 성격을 갖고 있는 병사들을 족경이라 한다. 족경은 무로마치 시대 초부터 생겨난 무가의 전통인데 이들은 적진 돌파, 기습, 방화 등 특정의 임무에 투입되는 날랜 병사들로서 일종의 특수부대원이었다. 족경은 대부분 용병(傭兵)으로 고용된 직업적 전사들인데 무사 신분이 아니었다. 전국시대의 족경은 대명에게 고용된 용병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족경을 지휘하는 사람은 무사가 담당하였다. 족경은 잡병과 달리 대명 또는 그의 가신에게 상시 고용된 군인으로 전투가 직업이며 농사 등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16세기 초반까지의 전쟁은 본래 주군으로부터 토지나 지행(知行 또는 祿米)을 받고 주종관계로 묶인 무사들과 돈을 주고 고용한 족경이 담당하였으나 전쟁의 규모가 커지면서 많은 수의 병력이 필요하게 되자 일반 백성들도 동원하게 되었다. 일반 백성들로 구성된 병사를 잡병이라고 하는데 잡병은 전쟁이 있을 때만 고용되는 임시직 군인이다. 잡병은 평상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다이묘는 자기가 거느리는 가신과 지방 무사들에게 영국 내의 토지를 나누어 주고 그 대신 정치적 복종과 경제적ㆍ군사적 충성을 바치게 하였다. 가신과 영주들이 대명에게 바치는 경제적 부담은 농민들로부터 전조(田租)를 거두어 연공(年貢)을 바치는 것이고 군사적 충성은 유사시 군사를 동원하고 필요에 따라 군역(軍役)을 부담하는 것이었다. 군역이란 소령(所領) 내의 백성들에게 과하는 부역을 의미한다. 전쟁 시 성을 쌓고 다리를 놓고 군수품을 수송하는 일과 같은 것인데 총력전을 펼 때는 주민들을 잡병으로 내보내는 것도 포함되었다.

 

2) 다이묘(大名)의 군대 편성

 

(1) 영주별 편성

 

가신 또는 무사가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주군으로부터 새로운 토지(所領)를 상으로 받았다. 공을 세운 가신은 이것을 다시 아들ㆍ형제 등과 거느리는 무사들에게 재분배하였다. 이들은 이 토지로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이들이 동원 할 수 있는 전투부대의 규모는 무가의 경제력에 따라 달랐다. 수십 명에 불과한 부대가 있었는가 하면 수백 명 또는 천명이 넘는 부대도 있었다. 주군은 이와 같이 구성되는 가신들의 부대를 끌어 모아 스스로 사령관이 되었다. 이것이 일본의 중세시대에 대명이 군대를 편성하는 원리였다.

 

부언하면 한 대명이 군사 동원의 필요성이 있을 때 주종관계에 있는 가신들에게 병력의 동원을 요구하면 영주들은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무사들과 돈을 주고 고용한 병사 그리고 병역을 부과하여 징집한 병사들을 데리고 정한 장소에 집합하는 것으로 동원이 이루어진다. 16세기 전반기의 군대는 영주별 편성을 기본으로 하였으므로 동원되는 병력의 크기는 대명의 영토와 인구의 크기에 비례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大名軍의 지휘체계

 

전쟁이 일어나면 영주들은 대명이 지정한 병종 별 병력과 장비를 소정의 장소에 집합시켜 대명에게 인계한다. 영주가 데리고 온 병사들과 장비들은 다른 영주가 데려온 군사와 합하여 대명이 상황에 맞게 병종별(兵種別)로 재편성한다. 영주가 데리고 온 무사는 마상(馬上)이라고 부르는 侍부대에 배치되어 있다가 철포ㆍ장창ㆍ활 등 특기 별로 구성된 보병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전투에 임하게 된다.

 

대명의 군대를 지휘하는 총사령관 또는 총대장은 대명이 된다. 총대장 밑에 있는 부대장은 대명 일가의 중진이 임명된다. 총대장을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군 전체를 지휘하는 자리는 군봉행(軍奉行)이다. 군봉행 밑에는 여러 명의 사무라이 대장(侍大將)이 있다. 시대장 밑에는 병종 별로 부대를 거느리는 족경대장을 두었다. 족경대장은 병종 별로 철포(鐵砲)봉행ㆍ기마(騎)봉행ㆍ창(槍)봉행ㆍ궁(弓)봉행ㆍ소하태(小荷駄)봉행 등 이 있었다.

 

(3) 소하태(小荷駄)부대의 편성

 

전국시대 일본의 병사들은 작전에 나설 때 보통 3일 분의 군량을 휴대하고 갔다. 이 기간을 초과하게 되면 군량 문제가 생긴다. 작전기간이 길 때 지휘관은 군량 수송을 위하여 소하태(小荷駄)부대를 편성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소하태란 전쟁에 필요한 군량ㆍ무기와 야영을 위한 각종 장비 등을 운반하기 위하여 인부와 말 등을 동원하여 수송하는 것을 뜻한다. 소하태 부대는 현대의 치중대(輜重隊)에 해당한다. 소하태는 기본적으로 짐을 인부나 말이 운반하는데 인부는 군역(軍役)으로 동원된 비 전투원이 담당하였다.

 

3) 일본군의 군량미 조달과 수송

 

(1) 군량미의 자변과 약탈

 

중세의 일본 군대는 각 대명 별로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각 대명의 가신인 영주들은 주군의 부름에 의하여 병력을 제공할 때는 무력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즉 군사ㆍ무기ㆍ말ㆍ군량 등을 스스로 준비하여 참여하는 군량자변(軍糧自辨)이 원칙이었다. 임진왜란 기 각 대명은 각 자가 군량과 군수물자를 준비하여 참전하였다. 그러나 공동작전 또는 군량이 떨어졌을 때는 풍신수길이 이것을 공급하였으나 나중에 갚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군량사정이 악화되었을 때는 현지조달이라는 이름으로 민간의 식량을 약탈하는 것이 일본군의 상례였다.

 

(2) 大名의 군량미 조달과 재정, 모리(毛利)의 경우

 

전국대명들이 큰 전쟁이 있을 경우 어떻게 군량미와 기타 병참물자를 조달하였는가를 모리(毛利)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모리는 주고구(中國)지방에서 1550년 대명으로서 입신한 이후 1582년 풍신수길에게 굴복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 세력을 확대한 강력한 대명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모리는 우선 자기의 영국 내의 농민들에게 부과하는 연공(年貢)으로 군량을 공급하였다. 모리는전쟁을 자주 하면서 연공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자 일종의 토지 면적세인 단전(段錢)을 더 거두어 부족분을 보충하였다. 전쟁이 일상화 되면서 군량이 계속 필요하게 되자 그는 연공과 단전을 담보로 부유한 상인ㆍ社寺(신사와 절)ㆍ가신 들로부터 쌀이나 돈을 빌렸다. 쌀과 돈을 빌려 생기는 적자는 은 광산에서 銀을 생산하여 갚았다.

 

모리는 병량을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전쟁지역의 경계까지 운반하였다. 육로로 병량을 수송할 때는 수송로 연변 백성의 부역에 의존하였다. 해로 수송의 경우는 배를 가지고 있는 유력자나 가신의 배를 사역ㆍ징발ㆍ차용하여 전쟁터에서 가까운 포구까지 수송하였다. 병량이 많거나 거리가 멀 경우는 해로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전쟁 중일 때는 병량을 저장하는 보급창에서 최전선의 장병들에게 군량이 인도되지 않는 경우도 자주 발생하였다. 모리는 병량의 수송로가 끊기거나 적의 방해로 수송이 어려운 경우 현물대신에 은화를 보내어 부근의 상인들로부터 쌀을 구입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당시에는 병량과 기타 군수물자를 매매하는 상인들이 전장 부근에까지 진출하여 장사를 하였다. 전투지역에 가까운 곳에 쌀 시장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군량의 현지조달이 어느 정도 가능하였다. 이들‘전쟁상인’들은 평소부터 대명과 밀접한 경제적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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