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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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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야기(5), 조선의 군제와 병참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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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야기(5), 조선의 군제와 병참체계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1. 조선의 병역제도

 

1) 병역제도의 원칙

 

조선의 기본적인 병역 원칙은 양인개병(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에 기반을 두었다. 노비를 제외한 16세 이상 60세에 이르는 사족과 양인 남자는 누구나 병역의무가 있었다. 병적에 올라있는 양인 남자는 정병(正兵, 현역)이 되거나 또는 현역이 군복무를 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부담하는 보인(保人)이 되어야 했다.

 

조선시대 군역 대상자를 파악하고 관리하는 수단은 병적이었다. 병적은 호적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호적은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원칙적으로 3년마다 군ㆍ현 별로 작성하여 해당 군과 도에 비치하도록 되어 있었다. 호적에는 호주의 성명과 직업군, 주소, 가족과 노비 등의 이름을 기재하였다. 병적은 호적에서 군역 대상자를 뽑아서 작성하였는데 노비는 제외하고 양인과 사족으로 편성하였다.

 

조선은 병농일치제를 채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는 평상시는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으나 유사시에는 군사가 되었다. 군사가 필요한 때는 병조와 관찰사의 요청에 따라 군ㆍ현의 수령이 병적을 보고 배정된 인원을 선발하였다. 병적은 정기적으로 개정하여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향리들이 군사를 징발해서 보낼 때 죽은 사람이 군적에 남아있으면 대립을 통해 인원수를 채우거나 또 뇌물을 받고 군역에서 제외시켜주는 일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전 현직 관원들과 서원ㆍ향교의 학생과 훈도 등은 군역을 면제시켜주어 사실상 사족들은 군역에서 제외되었다.

 

2) 병량자변의 원칙

 

조선은 평상시에는 훈련에 동원되거나 도성의 경비를 서기 위하여 상경하는 번상(番上), 또는 함경도와 평안도의 변경에 부방(赴防)하러 가는 군인들에게 식량과 무기를 지급하지 않고 군사들이 각자 자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양계지방의 국경을 지키려가는 군사도 여행길에서의 식량, 현지에서 먹는 식량과 숙소의 방값도 자담하였다. 가장 고되고 힘들고 고되다는 수군(水軍)도 식량과 무기를 스스로 준비하여 입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울로 번상 근무를 가는 갑사와 기병들은 보통 2~3명의 종자를 데리고 다녔는데 이들의 식량도 주인이 부담하였다.

 

그러나 전시에는 국가가 군사들의 군량을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전시가 아니더라도 특별한 임무를 수행할 때는 국가에서 식량을 부담하였다. 예를 들면 사신을 호송하는 군사들에게는 식량을 제공하였다. 도성의 수축이나 능약(陵役)을 담당할 때는 식사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산이 부족한 정부는 일조의 특수부대원인 갑사나 별시위 등을 선발 할 때는 지원자가 경제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심사하였다. 갑사(甲士)의 경우를 보면 사족출신으로 노비 5~6명과 토지 5~6결 이상을 가진 자에게만 응시의 기회를 부여하였다. 별시위도 갑사와 비슷한 조건으로 사람을 뽑았다. 갑사와 별시위 등도 서울이나 지방의 변경에서 복무하는 동안 필요한 생활비를 자체 조달하여야 했다. 이들에게는 보인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이들에게는 무관직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 때문에 무술시험을 보아 뽑았다.

 

2. 조선의 軍制

 

1) 중앙군

 

(1) 도총부

 

건국 초기의 조선군은 권력자에 예속된 사병적(私兵的)인 성격이 강하였다. 초기의 조선군은 여러 개의 독립적 부대와 다양한 병종으로 구성되었고 지휘체계도 통일되지 않았었다. 세조 때 유사시 명령 체계를 단순화하고 전투력을 효율화하기 위하여 군대를 개편하였다. 조선군은 이때부터 병조와 도총부(都摠府)에 의해서 통제되는 모습을 갖추고 중앙군(京軍)과 지방군(鄕軍)으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도총부는 병조 산하의 아문으로 5위의 중앙군과 지방군의 병마를 통괄하는 최고의 군령기구였다. 도총부에는 도총관 5명, 부총관 5명, 경력 4명, 도사 4명을 두고 군무를 다스렸는데 경비의 절약을 위하여 모두 겸직시켰다.

 

(2) 5衛

 

5위(衛)란 의흥위(義興衛)ㆍ용양위(龍驤衛)ㆍ호분위(虎賁衛)ㆍ충좌위(忠佐衛)ㆍ충무위(忠武衛)를 말한다. 5위는 세조 때 만든 군대의 편제로 전국의 진관(鎭管)에 있는 병마와 수도 서울에 있는 위병(衛兵)을 나누어 지휘ㆍ감독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각 위는 전(前)ㆍ후(後)ㆍ좌(左)ㆍ우(右)ㆍ중(中)의 5부(部)로 편성하였다. 각 부는 예하에 오(伍)ㆍ대(隊)ㆍ여(旅 또는 統)으로 구성되는 하급 부대를 두었다. 병사 5人을 1오로 하고, 5오를 1대로 하며, 5대를 1여로 하고, 4여를 1부로, 5부가 모여 1위(衛)가 되도록 편제하였다. 각급 부대의 정원은 1오가 5명이므로 1대는 25명, 1여는 125명, 1부는 500명, 1위는 2,500명이 된다. 평상시 5위의 주된 임무는 궁궐과 도성의 경비와 임금을 위해 시위(侍衛)를 서는 일이었다. 5위는 번갈아 가며 궁궐에 입직(入直) 군사를 내보냈다.

 

 5위는 매 위마다 위장(衛將)을 두고 그 밑에 여러 종류의 무관 직을 두었다. 5위의 무관 직은 갑사와 별시위 같은 특수 병종의 군인들에게 관직 획득의 길을 열어주는 기능도 갖고 있었다. 5위의 무관직은 정규직이 아니고 근무한 날자 만을 계산하여 급료를 주는 체아직(遞兒職) 이었다.

 

세조 때 특정 지역의 방어를 위해 인근 지역 군(郡)ㆍ현(縣)의 군사를 동원하는 체제로 편성하는 진관제(鎭管制)를 실시하면서 지방 군사도 진관 별로 나누어 각 위에 배치하였다. 이리하여 명목상 지방군과 중앙군이 衛를 중심으로 일원화하였다. 지방의 병역 해당자는 평상시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에 군사 훈련을 받고 차례가 돌아오면 서울에 올라가 시위(侍衛)하거나 또는 국경 지방의 요새에 가서 부방(赴防)하였다.

 

이것은 유사시 대규모 군사동원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며 또 지방에서 도성의 순찰과 왕궁 보호를 위해 번상(番上)하는 지방군을 5위 별로 나누어 통제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5위는 편제상 중앙군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실제로 임진왜란 시 눈에 띄는 활동은 없었고 각 진관의 군사는 지방군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2) 지방군

 

(1) 진관제

 

조선은 군을 중앙군(京軍)과 지방군(鄕軍)으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지방군은 육군과 수군으로 나누고 각도의 군ㆍ현에 진관을 설치하였다. 진관은 그 크기에 따라 주진(主鎭)ㆍ거진(巨鎭)ㆍ제진(諸鎭)종류로 구분하였다.

 

진관체제는 전국의 군ㆍ현을 기본 단위로 민정과 군사를 통합시켜 행정권과 군사권을 결합한 동원체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특정 도의 군사를 주진ㆍ거진ㆍ제진으로 구성된 군사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지방군사들은 자기의 군ㆍ현이 소속되는 진관에 나누어 배속되었는데 이들은 해당 지역의 수령이 통솔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은 주로 지방군을 동원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주진은 도에서 가장 큰 군사기지로 병마절도사가 주재하는 곳에 병영(兵營)을 두었다. 수군의 경우에는 수군절제사가 있는 곳에 수영(水營)을 설치하였다. 주진에 있는 병영과 수영은 관할구역 내의 육군과 수군을 지휘하는 본영이었다. 부(府)와 목(牧)등의 큰 고을에는 거진(巨鎭)을 두었다.거진은 병마절제사 또는 병마첨절제사나 우후(虞侯)가 소속 병력을 지휘하는데 이 직책은 해당지역의 부사(府使) 또는 목사(牧使)가 겸직하기도 하였다. 가장 아래에 있는 군현에는 제진을 설치하였는데 제진의 군사는 동첨절제사 및 만호 또는 도위가 지휘관이 되었다. 이 직책은 해당 고을의 군수 또는 현령ㆍ현감이 겸직하였다.

 

진관제 아래서는 지방군의 최고 지휘자는 병마절도사이다. 각 도의 관찰사는 해당 도의 병마절도사를 겸직하나 국방상 취약지역에는 2인 이상의 병마절도사를 두었다. 이 경우 관찰사를 제외한 나머지 병마절도사는 전임을 임명하였다. 예를 들면 한 도를 좌도ㆍ우도 또는 남도ㆍ북도로 나누어 병마절도사를 임명하였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등이 그 예이다.

 

수군은 각 도에 수군절도사를 두고 관찰사로 하여금 겸직하게 하였다. 그러나 국방상 중요한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수군절도사를 2명씩 두었다. 수군절도사는 수군첨절제사를 거느리고 첨절제사는 그 밑에 7~10명의 만호를 지휘하였다.

 

(2) 유방군(留防軍)

 

진관체제 아래서는 모든 진관에 무장한 군사가 상주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국 각지의 군정은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에 훈련을 받고 교대로 일정 기간 동안 서울로 번상하거나 또는 국경 지역에 부방하였다. 평상시의 진관은 소속 군사가 비번인 상태로 생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사실상 군대는 주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함경도나 경상도의 일부 지역을 비롯하여 국방 취약지의 진관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항상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배치되는 군사를 유방군이라고 하였다.

  

3. 비상시의 군사운용과 지휘체계

 

1) 평상시의 군사운용과 지휘체계 조선군의 지휘 체계는 평상시와 비상시에 따라 달랐다. 평상시에는 군정기관이었던 병조와 군령기관인 도총부의 지휘아래 5衛의 소속 인원들이 통제되었다. 병조는 5위를 속아문으로 거느리며 도총부와 협조하여 사실상 전군을 통솔했다고 볼 수 있다. 평상시 5위의 중요한 임무는 왕실과 왕궁을 보호하고 수도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지방군의 지휘체계도 평상시와 유사시로 나누어 운용하였다. 평상시는 진관제에 따라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정점으로 각급 지방수령이 지방군을 지휘하면서 거진을 중심으로 훈련과 점검을 하였다.

 

2) 전시의 군사운용과 지휘체계

 

(1) 진관제에 따른 병력동원

 

진관제 아래서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우선 해당 진관의 수장이 관내의 병사를 소집하여 대적하고 이웃하고 있는 진관의 병력이 함께 힘을 합하여 방어체제로 돌입하였다. 다시 말하면 진관제 아래서의 전술은 왜군이 침입하면 병사와 주민을 가까운 산성으로 입보(入堡)시켜 수성전을 펴고, 그 사이에 주변 군ㆍ현의 병사를 동원하여 적군을 물리친다는 개념이었다. 이와 같은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鎭과 縣의 군사 지휘권이 행정권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었고 이 때문에 진관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진관제의 약점은 행정단위인 군ㆍ현과 군사단위인 진관을 일치시키다 보니 군진이 너무 많아 병력이 지나치게 분산된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적의 내습을 받은 군진이 오래 버티기 어렵고 이웃 진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데 이곳도 병력이 적다 보니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1백 명 단위에 불과하다는 문제점이 들어났다. 또 여러 군현의 군사가 한꺼번에 동원되면 효율적인 부대편성과 지휘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침략군이 군과 군의 경계를 넘는 대규모일 경우 적을 막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밖에도 지방군사들이 훈련되어 있지 않고 특히 지방 수령(지휘관)들이 문반으로 전술 응용능력이 없을 경우 진관제는 효율적인 방어체제가 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2) 분군법(分軍法)에 따른 병력동원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을 계기로 조선의 군사적 상황이 변하면서 근 1백 년 동안 지켜오던 진관제는 명종 10년 분군법으로 바꾸었다. 분군법이란 문제가 생겼을 때 중앙에서 내려온 군사 전문가에게 지방군의 지휘권을 넘겨 그와 함께 적을 물리치는 제도를 말한다. 이것은 제주목사 김수문이 편저하였다는『제승방략』이라는 병서에 소개된 방법으로 진관법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분군법은 그 후 개량을 거쳐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채택한 병력 동원 및 방어 전술로 사용하였다.

 

분군법의 요점은 한 도의 군사를 중앙에서 파견되는 도원수(都元帥)ㆍ순변사(巡邊使)ㆍ방어사(防禦使) 등에게 분속시켜주고 지방의 병마절도사ㆍ수군절도사와 함께 적을 방어한다는 개념이다. 즉 중앙에서 파견되어 내려오는 군사전문가인 장수들의 지휘를 받게 되는 군ㆍ현의 군사를 미리 약정하여 두었다가 사변이 발생하면 해당 군ㆍ현의 수령들이 병력을 인솔하여 사전에 약속한 집결지로 가 지휘권을 넘겨주는 제도를 말한다.

 

(3) 전시의 군사 지휘체계

 

외국의 군대가 변경을 침략할 경우 먼저 지방군이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국경이나 지방에서 변란이 일어날 경우 임금은 분군법에 따라 지방에 내려가서 군사를 지휘할 장수를 임명하여 파견한다. 이때 중앙에서 내려오는 각급 군사 지휘관은 호칭이 달랐다. 지휘관의 호칭은 도체찰사(都體察使)ㆍ도원수(都元帥)ㆍ체찰사(體察使)ㆍ순찰사(巡察使) 등이 있는데 명칭과 지휘 범위는 파견되는 신하의 품계에 따라 달랐다.

 

왕의 명령을 받고 파견되는 신하가 정1품일 경우 도체찰사, 종1품은 체찰사. 정2품은 도순찰사, 종2품은 순찰사, 정3품이하는 경차관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왕의 명을 받들어 지방에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신하를 말한다. 성종 때 도체찰사와 도원수 사이에 업무의 분화가 일어났디. 군사를 지휘하여 작전을 수행히는 총사령관을 도원수라고 하고 배후에서 민생과 군수ㆍ병력 그리고 기타 행정 지원을 담당하는 총 사령관을 도체찰사라고 하였다.

 

도체찰사는 보통 문관으로 임명하는 데 도원수보다 품계가 높아 도원수를 절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나 직접 전투를 지휘하지는 않았다. 임진왜란시 지방의 군사를 지휘하였던 장수의 서열은 다음과 같다.

도체찰사—도원수—순찰사 또는 순변사(관찰사가 겸직)—방어사(종2품)—조방장(정3품)—우후(정4품)—만호(종4품)—첨절제사(종4품)—평사ㆍ도위(정6품ㆍ종6품) (우후 이하는 군수ㆍ현령ㆍ현감이 겸직)

 

4. 조선군의 병참

 

1) 군량미의 비축

 

조선에서는 군수에 필요한 재정을 군자(軍資), 군사들이 식량으로 사용하는 양곡을 군량(軍糧)이라고 하였다. 군자의 대부분은 쌀과 콩 등의 곡물로 받아 저장하였으므로 군자는 군의 재정인 동시 군량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전쟁 등 비상시에 대비하여 3년 간의 군량을 저축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았다. 세종 때 정인지는 군사 1만 명이 3년간 필요한 군량을 15만 석으로 보았다. 조선의 전체 병력을 10만으로 잡으면 150만 석의 군량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조선은 건국 조기에 과전법 개혁을 통해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하고 약 10만 결의 농지를 군자전(軍資田)으로 설정하였다.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하고 전국의 토지가 약 80만 결이었으므로 경지면적의 8분의 1이 군자전이었다. 과전법에서 1결의 田稅는 30斗였으므로 10만 결의 전세는 약 20만 석이 되었다.

 

군자전은 1445년(세종 27)에 폐지되고 국용전제(國用田制)로 전환하였다. 국용전제는 토지를 재정 수요 별로 지정하지 않고 토지를 국용전으로 통일한 다음 호조가 전체 국가수입을 받아들인 다음 필요한 경비를 각 관서에 배분하는 제도를 말한다. 국용전제의 시행으로 군자전의 전세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 다를 재정 수입도 군자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군자곡은 원래 전쟁에 대비하는 식량이었으나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는 사태가 오면 기민(飢民)을 위한 대여곡으로 전용되기도 하였다. 대여곡은 나중에 다시 회수하여 군량으로 비축하도록 하였으나 흉년이 자주 오거나 큰 흉년이 들면 회수가 어려웠다. 군자곡은 의창곡(義倉穀), 진대곡(賑貸穀), 환상곡(還上穀) 등으로 자주 전용되어 나중에는 이름뿐인 경우가 많았다. 군자곡의 비축량은 국초부터 성종 때 까지는 꾸준히 늘었다. 군자곡의 비축량은 세조 때 가장 많아 약 1백만 석 가까이 되었으나 점차 줄어들어 임진란 직전에는 재고가 50여 만석으로 줄었다.

 

2) 군량미의 관리

 

(1) 서울

 

군량의 확보와 지급에 관한 일은 戶曹의 관할이었다. 戰馬에게 주는 마량(콩)에 관한 일도 호조의담당이었다. 그러나 말에게 주는 乾草(또는 靑草)의 수집과 분배에 관한 일은 兵曹의 책임이었다. 비축한 군량미는 비상시에 군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서 오래 보관 할 수 있는 벼로 저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군량미의 관리는 서울과 지방 그리고 兩界지방으로 나누어서 관리하였다. 조선은 田稅수입 가운데 일정 부분은 군수용으로 할당하였는데 군량의 대부분은 서울로 조전(漕轉)하여 군자감창(軍資監倉)에 저장하였다. 군자감창은 3개가 있었는데 광통교 부근에 본창이 있었고 송현에 별창, 그리고 한강변의 용산에 강창(용산창)을 두었다. 이 가운데 강창의 규모가 가장 컸고 조운을 통해 전국에서 모여드는 군자곡의 대부분 이곳에 저장하였다.

 

(2) 지방

 

서울로 조전한 군량을 제외하고 나머지 군량은 각 지방의 軍營과 水營 그리고 군ㆍ현에 있는 창고에 저장하였다. 군사상 주요한 山城에는 군량 창고가 있었는데 여기에도 군량미를 비축하여 두는 것이 원칙이었다. 군량미는 중앙과 지방군의 수를 감안하여 일정 비율로 나누어 배분하였다. 영진과 산성 등에 보관하는 군량은 그 양이 많지 않은데 큰 영의 비축분이 약 1백석 정도였다.

 

(3)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

 

16세기까지 국방의 취약지는 4군과 6진이 있는 평안도와 함경도 그리고 왜구의 출몰이 심한 남해안 일대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양계(兩界)지역은 군사의 수도 많고 하도(下道)에서 차출한 군사들까지 부방(赴防)하는 곳이어서 군량의 수요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양계지방은 식량 생산도 적고 남쪽에서 수송해 오기도 어려워 양계지역의 전세는 모두 군자로 충당되어 현지의 주창에 납부하였다.

 

그러나 양계지방의 농업 생산량이 워낙 적어 다른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회헌제 이외에도 군량을 양계지방으로 이급하는 방법이 있는데 처음에는 조운을 이용하였는데 조운이 워낙 불안해서 육운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육운은 군량을 하삼도에서 바로 이송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강원도의 양곡을 함경도로 수송하고 경상도의 곡식을 강원도로 가져다 주는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5. 임란기의 전쟁수행본부: 비변사(備邊司)

 

원래 조선군의 지휘체계는 병조가 군정을 담당하고 도총부가 군령을 담당하는 것으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다만 도총부의 군령은 중앙군에 한하고 지방군을 지휘하는 것은 해당 도의 관찰사와 병마절도사였다. 지방군의 용병에 관한 것은 왕이 의정부와 병조의 협의를 거쳐 해당 지역의 병마절도사에게 하달하였다.

 

성종 때부터 변방에 소요가 증가하면서 군사를 동원해야 할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군사 동원이나 장수 파견을 위한 협의가 잦아지면서 그 지방의 사정을 잘 아는 대신과 무장을 참여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결국은 이들과 함께 군사문제에 경험이 많은 유관 기구의 당상들을 참여시키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협의기구를 창설하게 되었다.

 

이때의 비변사는 임시기구였다. 생겼다 없어지기를 반복하였는데 삼포왜란을 겪은 이후인 1555년(명종 10)부터 비변사를 상설 독립관청으로 만들었다. 비변사는 도제조(都提調)와 제조(提調)ㆍ낭청(郎廳)으로 구성되었는데 도제조는 현직의 3의정대신이 겸임하고 전직 의정을 지낸 사람도 자동적으로 참여하였다. 제조는 吏ㆍ戶ㆍ禮ㆍ兵曹의 판서와 강화유수 및 훈련대장 그리고 5군문의 장수가 겸임하였다. 부제조는 정3품이상의 당상관 중에서 병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을 임명하였다. 이 중에서 병무에 통달한 사람 3인을 뽑아 유사당상으로 임명하여 매일 비변사에 나와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실무는 낭청들이 맡았다. 비변사는 임란 중에 국방ㆍ군사ㆍ외교 문제에 대한 최고의 의사결정기관으로 왕의 재가를 받아 실행에 옮겼다. 비변사는 임란기간 동안 사실상 모든 일에 관여하는 전쟁수행본부의 역할을 하였다.

 

6. 왜란직전 조선군의 실태

 

조선은 건국 후 2백년 동안 이렇다 할 외환을 겪지 않은 채 평화가 계속되어왔다. 이 때문에 나라의 기풍이 文弱에 빠져 국방과 무를 등한시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국방력을 뒷받침 해주는 경제력도 쇠퇴하였다. 조선 초의 과전법 개혁이 무력화되면서 권문세가에 의한 토지겸병의 확산과 전호(소작농)의 수가 빠르게 증가하였다. 또 세금을 내지 않는 토지면적도 증가하여 평균적인 전세 수납액은 세종 때의 60만석, 성종 1년의 44만석, 중종 20년의 27만석으로 감소하였다. 명종 즉위 년에 26만석에 불과하였다.

 

조선은 문치를 국가의 운영 수단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국방에 대한 의식이 둔화되고 국방제도는 이완되었다. 특히 병역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졌다. 사족(士族)은 병역에서 제외되었고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노비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종모법(從母法)을 악용하여 양반들이 자기의 계집종과 양인 남자를 결혼시켜 소생이 생기면 종으로 만들기 때문에 노비의 수가 증가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노비의 수가 전 인구의 40~50%에 이르렀다는 연구도 있다.

 

이 때문에 양민과 군역자원은 심각한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각 지방에서는 돈을 받고 소집을 면해주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 대신 군에 내보내는 일이 만연되어 있었다. 소위 방군수포(放軍收布)와 대역납포(代役納布)가 공공연하게 이루어 졌고 국방 예산이 부족한 정부에서는 이를 장려하기 까지 하였다.

 

이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에는 지방관이나 고위 군 지휘관 들도 자기의 부하가 몇 명인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졌다. 병력은 장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었고 실제 있는 군사들은 노약자 등 무력한 대역인(代役人)으로 편성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조선의 군사들은 훈련도 받지 않고 무기도 제대로 구비하지 않아 문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결국 임진왜란 때의 조선군은 중앙군(경군)과 지방군(향군) 모두 병부에 편제상의 인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실제 병력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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