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산지 쌀값 상승세
농촌 일자리 창출 방법 /
[252호] (수정판)헌법 개
한국 농업을 둘러싼 기회
남북예술단 합동 공연 하
[251호] EU 농업환경정책
블록체인 기술과 농업 /
“밥쌀용 수입쌀 판매 중
[61] 한국농업통상 50년사
운무 속 그림 같은 풍경
GS&J 감성교차
 
Home > GS&J논단 > 에세이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7.08.30
제목
임진왜란 이야기(6), 임진왜란의 개황과 군량미 문제 
첨부파일
 

 

 

 

 임진왜란 이야기(6), 임진왜란의 개황과 군량미 문제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1. 임진왜란의 시작

 

 풍신수길은 1591년 8월 전국의 다이묘(大名)들을 교토로 소집하여 조선 출병을 선언하고 병력 동원과 출전 준비에 관한 명령을 하달하였다. 수길은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로 구주의 북부 해안에 나고야(名護屋)성을 쌓았다. 수길은 나고야성에 전쟁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잇기도(壹岐島)와 대마도에 병력과 병참물자의 중계소를 설치하였다.

 

 수길은 1592년(선조 25) 1월 5일 조선 침략군의 구성을 발표하였다. 수길은 제1군부터 제9군까지 편성하고 수군은 별도로 조직하여 총 병력 약 18만 7천 명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수길은 제1군부터 제7군까지 15만 5천 명을 선발군으로 편성하여 먼저 조선에 상륙하도록 지시하고 제8군과 9군은 각각 일기도와 대마도에 상륙하여 대기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선봉군인 1군의 대장에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제2군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제3군의 대장에는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을 임명하였다. 수길은 전군ㆍ중군ㆍ후군으로 편성된 1만 2천명의 예비부대의 대장이 되어 나고야성에서 대기하다가 서울이 함락되면 직접 조선으로 나가 일본군을 지휘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밖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을 비롯한 관동과 동북지방의 대명들은 그들이 거느리고 온 병력 7만 4천 명과 함께 나고야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수길이 조선침략을 위하여 동원 명령을 내린 병력은 선발군과 예비군를 포함하여 모두 30만 5천 여에 달하였다.

 

2. 서울의 함락과 선조의 파천

 

 1) 조선군의 초기 대응

 

 소서행장이 이끄는 일본군 제1군 1만 8천의 제1진이 선조 25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행장은 부산진성을 지키는 첨사 정발에게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정발이 이를 거절하자 일본군은 반 나절도 안 되어 부산진성을 함락시켰다. 다음 날 일본군은 동래성으로 몰려갔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왜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역시 반 나절 만에 성은 함락되고 그는 전사하였다. 행장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켜 후속 일본군의 상륙거점을 확보하였다. 4월 17일에 제2군 가토 지요마사가 부산에 상륙하였다. 곧이어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도 김해로 들어왔다.

 

 조선 조정은 4월 17일에야 일본의 침략을 보고 받았다. 선조는 4월 18일 이일을 순변사로, 성응길을 좌방어사, 조경을 우방어사로 임명하여 경상도로 내려 보내고 조방장 변기와 유극량으로 하여금 조령과 죽령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이어 4월 20에는 좌의정 유성룡을 도체찰사에, 병조판서 김응남을 부체찰사에 임명하고 신립을 3도순변사로 임명, 조선군을 지휘하여 일본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신립은 서울에서 급히 끌어 모은 수 백 명의 중앙군을 지휘하여 4월 28일 충주의 탄금대에서 왜군과 결전을 감행하였으나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4월 30일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피난 길을 떠났다. 선조는 몽진에 나서기에 앞서 김명원을 도원수, 이양원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수도를 방어하도록 지시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에 상륙한지 20일 만인 5월 3일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다.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은 동로와 서로로 나누어 진격을 계속하였다. 서로는 소서행장과 흑전장정이 맡아 개성과 평양을 향하고, 동로는 가등청정과 과도직무가 담당하여 함경도를 향하여 북진하였다. 평양성이 위태롭게 되자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신하면서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였다.

 

 2) 임란 초기 조선의 군량미 사정

 

 의주를 향해 몽진하던 선조가 박천에 도착한 날 명으로부터 원병이 온다는 보고를 처음 받았다. 조선은 요동에 주둔하던 명군이 시급히 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량을 가지고 오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선조는 유성룡에게 명군이 오면 당장 군량을 공급해야 할 처지이므로 1만 명분의 군량과 마초를 준비하라고 지시하였다.

 

 국왕이 의주를 향해 다시 떠나자 평안도의 여러 군에서도 백성들이 질서를 잃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은 폭도로 돌변하여 순안, 숙천, 안주, 연변, 박천 등지의 관고를 부수고 식량을 탈취하여 갔다. 다행히 유성룡 일행이 손을 써서 정주, 철산, 선주, 신천 등지의 창고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유성룡은 정주와 귀성 등지에서 창고를 약탈하려는 폭도들 앞에 나가 이들을 제지하였다. 그는 빈 공책을 들고 이 식량은 명나라 군사들을 먹일 것이니 이것을 정주로 옮겨주는 사람은 공책에 이름을 적었다가 후일 합당한 상을 주겠다고 호소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유성룡의 설득에 응하여 정주와 가산으로 가져온 조와 콩이 2천 석 가량이었다.

 

 3) 祖承訓군의 패전

 

7월 중순 요진(遼鎭)에 있던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입국하였 다. 명군이 평양성 아래에 도착하자 소서행장은 조총병을 요소 요소에 숨겨놓은 채 성문을 열어놓고 명군을 유인하였다. 조승훈은 일본군을 얕보고 성안으로 다투어 들어왔다. 매복에 걸린 명군은 적군의 일제 사격을 받아 유격장군 사유를 비롯하여 지휘관 급 파총 2명이 전사하고 정도로 대패하였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조승훈은 연로에 군량이 없다는 것을 핑계 대고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황급히 철수하였다.

 

 3. 명군의 참전

 

1) 명의 참전 배경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명나라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리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유구(琉球)에서 올라온 정보는 일본이 명나라를 침공하리라는 첩보와 함께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가 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명나라는 일본의 정세를 탐문하는 한편 조선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조선은 5월 중순 임진강 방어선이 돌파되자 우부승지 유몽정을 명나라에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조정에서는 원군의 파견에 회의적인 주장이 많았다.

 

 명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면 요동과 국경을 맞대게 되고 호전적인 왜군이 산해관을 넘어오면 북경을 방어하기 힘들 것이라고 황제에게 진언하였다. 특히 일본의 수군이 요동의 여순과 산동의 등주를 점령하게 되면 바로 북경이 위험하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일본군이 조선을 점령하기 전에 명군을 보내 조선 땅에서 일본군을 막는 것이 최상의 방안이라고 역설하였다. 명의 황제 신종은 석성의 주장을 받아들여 조선 파병을 결정하였다. 이때가 1592년(선조 25) 8월이었다.

 

 조정에서 조선 파병이 정식으로 결정되자 석성은 병부좌시랑 송응창(宋應昌)을 황제에게 천거하여 파병군 최고 사령관인 경략(經略)으로 임명하였다. 경략이 된 송응창은 산동ㆍ요동 등지의 해안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조선 출병을 위하여 군량미를 사들이고, 무기와 마차를 주문하여 만들게 하고, 등래ㆍ천진ㆍ여순ㆍ회양 등지에서 병정을 모집하였다. 명나라는 10월에 영하(寧夏)의 난이 평정되자 관군을 지휘하였던 이여송(李如松)을 총병관 겸 제독으로 임명하여 조선 원군(東征軍)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명은 11월 이여송을 조선으로 출병시키고 계요에서 1만 명, 선대에서 8천 명, 사천에서 상당 수의 병마를 징발하는 한편 의오, 산서, 보정 등지에서 1만 5천여 명의 군사를 더 모집하였다.

 

 2) 조선의 군량준비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설번(薛藩)을 칙사로 임명하여 조선에 보냈다. 그는 조선에 들어와 명나라는 10월 중으로 문무대신 2명이 지휘하는 원군 10만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통지하고 황제가 보내는 은화 20만 냥을 전달 하였다. 설번은 또 군량의 운반이 지극히 어렵기 때문에 현물 대신 은화를 가지고 와 조선에서 군량을 구매하여 조달하려고 하는데 가능한지의 여부를 물었다.

 

 선조는 조선에서는 銀이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은을 가지고 와도 쌀을 살 수 없다면서 명으로부터 현물 조달의 불가피성을 강조하였다. 이날 선조는 호조판서 이성중(李誠中)을 불러 추수 철이 지나면 군량을 마련하기 어려우니 그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명의 10만 군사가 두 달 동안 먹을 식량을 확보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성중은 10월 중순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군량을 수집하였는데 평안도의 10고을에서 2만 석을 구할 수 있을 뿐이었다. 황해도와 경기도는 왜군들이 사방에 널려있어 군량을 모으기가 어렵고,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모은 곡식 5천 석은 뱃길로 강화도로 오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정부의 명령이 통할 수 있는 곳은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 그리고 평안도의 일부에 불과하였다. 경기도와 황해도ㆍ강원도는 왜군들이 도처에 주둔하고 있어서 쌀을 구하더라도 운송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성중이 긁어 모은 2만 석은 10만 군사의 열흘 치 식량에 불과하였다.

 

 당시 군량을 수집할 수 있는 방법은 전세(田稅)를 빠짐없이 받는 것과 흉년 또는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빌려준 환곡(還穀)을 회수하는 방법뿐 이었으나 이것으로는 군량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조정에서는 공명첩(空名帖)ㆍ면역첩(免役帖)ㆍ면천첩(免賤帖) 등을 발행하여 일정 량의 쌀을 납부하면 벼슬을 주거나, 노비문서 등을 말소하여 양인을 만들어 주고 서얼(庶孼)인 경우 차별을 없애주는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3) 세객 심유경의 파견

 

명의 병부상서 석성은 응급 조치로 조선에 파견한 조승훈의 패보를 접하자 송응창이 군량과 병사를 모으고 반란군 진압을 위해 영하에 가있는 이여송과 그가 지휘하는 요동군(遼東軍)을 투입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였다. 석성은 평양에 들어온 소서행장에게 거짓 휴전을 제의하고 시간을 벌 수 있는 임무를 담당할 세객(說客)을 찾았다. 이때 심유경(沈惟敬)이 나타나 세객을 자청하였다. 심유경은 절강 사람으로 원래 무뢰한이었으나 일본어를 할 줄 알며 일본의 지리와 인정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본의 풍신수길이 봉공(封貢)을 희망하고 있으므로 이를 이용하면 강화를 할 수 있다고 석성을 설득하였다. 석성은 심유경을 유격장군에 임명하고 평양에 가서 행장을 만나도록 명을 내렸다.

 

 1592년(선조 25) 8월 심유경은 조선에 입국한 다음 소서행장과 그 부하들에게 뇌물을 주고 면담을 요청하였다. 심유경은 소서행장과 접촉하여 1592년 8월 30일부터 10월 20일까지 50일간 잠정 휴전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명은 파병을 준비하는 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자 심유경을 다시 행장에게 보내 휴전기간을 1593년 1월까지 50일을 더 연장하는 조치를 얻어내었다. 이 사이에 이여송이 영하의 반란을 진압하고 조선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4) 명의 군량도착과 군량수송의 차질

 

 1592년(선조 25) 12월 23일 이여송이 거느리는 명군의 선발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 왔다.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의 군사가 순차적으로 조선에 입국하는 사이 명나라에서 보내는 약 14만 석의 군량도 의주에 야적되기 시작하였다. 명나라의 관량관(管糧官)인 요동도사 장삼외(張三畏)가 선조를 만나 우선 쌀과 콩 각각 4만 석씩, 8만 석이 의주에 도착하였으며 추가로 6만 석이 요동에서 오고 있는 중이라고 보고하였다. 조선측은 지충추부사 김응남을 관량관으로, 호조참판 민여경과 의주목사 황진을 보좌관으로 임명하여 의주에서 군량을 인수하도록 하였다. 군량의 수송은 명 나라의 각지에서 의주까지는 명나라가 책임지고 의주에서부터 명군이 주둔하고 있는 조선 내의 각 부대까지는 조선측이 운송하는 것으로 협정하였다.

 

 군량의 수송과 배급에 처음 차질이 빚어진 것은 명군의 주력이 조선에 들어온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명군 사령관 이여송은 군량과 마초가 제때에 분급되지 않아 군사와 말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대노하여 명측의 운량관 張도사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려고 하였다. 이 일은 장 도사만의 책임이 아닌데다가 처음 생긴 일이고 좌우에서 말리는 바람에 그냥 넘어갔다.

 

 5) 펑양성의 탈환과 군량수송의 차질

 

 이여송의 명군은 선조 26년 1월 6일 평양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하였다. 처음 이틀간을 탐색전으로 적의 약점을 찾은 후 3일 째 되는 1월 9일 불랑기포를 비롯하여 각종 대포와 불화살을 동원하여 일제사격, 성문을 깨고 시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 다음 보병을 동원하여 성벽을 기어오르게 하는 등 치열한 접전 끝에 성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는 조선 군사도 약 8천이 참가하였다. 일본군은 약 1만 5천 명이 평양성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수천 명의 병력의 을 잃는 대패를 당하였으며 명군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명군의 식량이 떨어져서 큰 소동이 일어난 것은 평양전의 승리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명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황해도의 칠참(七站) 에 도착하였는데 군량이 없었다. 의주를 떠난 군량이 미처 황해도에 도착하지 않은 것이었다. 장거리 행진에 지친 대군이 혹한 속에서 들판에 천막을 치고 식사를 기다리는데 먹을 것은 없고 며칠 사이에 해결할 대책도 없었다. 기병들이 타고 온 말도 굶고 있었다. 명군에게 몰아 닥친 긴 악몽의 시작이었다. 명량 수송이 지체되는 가장 큰 원인은 왜군을 피하여 백성들이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는 데 있었다.

 

 6) 명군의 기아와 餓死者의 발생

 

 선조는 운량문제가 예상 외로 심각한 것으로 보고 호조판서 이성중과 호조좌랑 김계현에게 명군을 따라다니며 군량과 마초가 원활하게 공급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선조는 평안도 순안까지 일부 운반하여 놓은 군량을 남쪽으로 시급히 수송하기 위하여 피난길에 왕과 동궁을 호위하는 시위군 5~6백 명을 급파하여 군량을 짊어지고 七站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27일 명군 선봉이 개성에 입성할 즈음에는 부상당하거나 병들어 낙오한 군사들이 혹한의 길가에 주저앉아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식량을 구하지 못하여 굶어 죽었다. 개성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명군의 시체가 즐비하게 누어 있었다. 이 일로 명의 호부주사 애자신은 조선의 관량관 김응남과 호조참판 민여경, 의주목사 황진을 잡아다가 그 책임을 물어 곤장을 때렸다. 화가 난 이여송도 도체찰사 유성룡과 호조판서 이성중을 잡아다가 뜰에 꿇어앉히고 책임을 추궁하면서 곤장을 때리려고 하다가 중지하였다.

 

 이여송은 평양성 승전의 여세를 몰아 신속하게 개성을 탈환하였다. 다행이 일본군이 개성 방위를 포기하고 서울로 달아나는 바람에 개성의 수복은 손쉽게 이루어 졌다. 그러나 개성에 들어온 명군은 당장 먹을 것이 없었다. 의주에서부터 운반하여 오는 군량의 수송 속도가 명군의 진군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하들이 굶주리고 있는 것을 본 명의 지휘관들은 군량 없이 전쟁을 할 수 없으니 회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군량 공급의 차질은 단발성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문제였다. 명군을 따라 평양성 전투에 참가했던 정희원 수하 조선군사 3천 명은 이여송의 지시에 따라 긴급 운량반에 투입되었다.

 

 4. 明ㆍ日간의 강화협상과 임시휴전

 

1) 명군의 사정

 

(1) 벽제관 전투의 패전

 

이여송은 승전의 여세를 몰아 개성을 수복하고 서울 부근의 벽제관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명군은 벽제관에서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일본군에 대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명군은 많은 인명과 장비를 잃었다. 명의 군마 1만 2천 필도 역질로 죽어 기병은 해체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조선군까지 동원하여 벽제관에 가까스로 운반하여 놓은 군량도 모두 소실되었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겨우 견디어 오던 명군은 일본군에게 참패하자 사기가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한 이여송은 일본군에 비하여 병력이 크게 부족하고 거기다가 군량의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전쟁의 고수인 일본군과의 지속적인 전투는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때 마침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철수한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서울에 들어와 적세가 한층 보강되었다. 이여송은 군량부족을 이유로 들며 개성에 군사 5천을 남겨두어 수비하도록 한 후 그 자신은 전 부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퇴군하였다.

 

(2) 명군 지도부의 대 일본 전쟁에 대한 인식

 

당시 명군의 최고 사령관인 경략 송을창도 군량과 마초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여송의 철군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평양성과 개성의 탈환과 조선 영토의 절반을 수복하였다는 1차적 전략목표를 달성하였으므로 이 수준에서 강화를 통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철수시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송 경략은 후일 그의 저서『경략복국요편』을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병사들은 많은 봉급을 받을 수 있다는 유혹에 끌려 몇 달을 걸어 조선에 왔으나 조선에서는 은화가 통용되지 않아 모처럼 받은 銀貨도 사용할 수 없었다. 군량이 도착하지 않아 역병에 죽은 말고기를 먹거나 굶어야 하였다. 병사들은 계속되는 행군과 전투에 시달려 옷은 너덜너덜 떨어진 채 말이 쓰러질 정도의 혹한 속에서 들판에서 잠을 자야 하고 오랜 야영생활에 갑주(甲胄)에는 이가 가득 끼었다.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면 병사들은 온몸이 흠뻑 젖어 서로 껴안고 울었다. 전사자를 화장할 때는 병사들의 슬픔은 원망이 되었고 바짝 마른 병사가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면서 숨을 죽이며 행군하는 것이 마치 유령이 걷는 것과 같았다” 고 한탄하였다.

 

 조선 파병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명나라의 병부상서 石星도 일본군의 전력이 예상 외로 강하기 때문에 대규모의 추가 파병과 거액의 재정투입 없이는 전쟁이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석성과 송응창은 빠른 시일 내의 병사의 추가 모집과 전비 마련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병력의 추가 투입이 결정되더라도 명군이 조선에 들어오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 분명하고 군량과 군수물자의 수송은 더욱 난제였다. 이들은 명군이 평양과 개성을 되찾고 조선 영토의 절반을 수복한 지금 협상을 통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자진 철수시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하였다. 송응창은 1593년 3월 초 심유경을 소서행장에게 보내 강화협상의 가능성을 탐색하게 하였다.

 

 2) 일본군의 사정

 

 (1) 일본군의 보급 부능과 대규모 병력손실

 

 일본군은 수길의 명령에 따라 조선을 침략하기 전에 약 30만 석의 군량미를 준비하였다. 그 가운데 얼마만큼을 조선으로 수송했는지는 불명이나 상당량을 가져와 부산의 보급창고에 저장하였다.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진군 속도가 너무 빨라 부산에 있는 군량미를 제때에 수송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군량을 거의 현지조달로 해결하였다. 조선의 각 고을의 주창에는 군량미와 환곡 등이 어느 정도 비축되어 있었다. 지방 수령들은 대부분 식량 창고를 그대로 둔 채 달아났다.

 

 일본군은 조선에 상륙하여 처음 겨울을 맞았다. 일본군은 대부분이 규슈(九州)ㆍ시고쿠(四國)ㆍ주고쿠(中國) 같은 남부와 서부 일본 출신으로 비교적 따뜻한 지방에서 살던 사람으로 조선의 매서운 추위는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월동 준비도 갖추지 않은 채 경쟁적으로 북진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출전시에 입고 온 여름 옷으로 겨울을 맞아 혹독한 조선의 추위에 동상 및 동사자가 속출하였다. 무엇보다도 일본군이 직면한 시급한 문제는 군량과 시초(柴草)의 부족이었다. 군량도 보충병도 오지 않고 부대의 교대도 없었다. 일본군은 혹독한 조선의 추위와 군량 부족으로 거의 기아 상태에 있었다.

 

 일본군 지휘부는 서울을 방어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침공 이후 1593년 3월까지 크고 작은 전투와 혹한ㆍ질병 등으로 병력의 약 3분의1 가량을 잃은 상태였다. 명군은 조선군과 달리 각종 대포로 잘 무장되어 있으며 군기도 엄정하여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만약 명나라가 원군을 추가로 투입하면 병참선이 끊어진 상태에서 명나라의 대병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2) 일본군 내륙 병참로의 차단

 

 일본군의 보급기지는 부산에 있었으나 서울까지의 길이 멀고 험한데다가 의병들의 습격으로 군량의 육로 수송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일본군의 병참 보급로는 부산에서 선박을 이용하여 낙동강을 거슬러 상주에서 내린 다음 육로로 문경을 지나 조령을 넘은 후 충주에서 다시 남한강으로 배를 띠워 용산까지 군량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이 길은 조선 초 경상도의 세곡을 서울 용산창으로 운반하던 길이었다. 당시 낙동강의 수로는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이 강바닥에 장애물을 설치하여 배의 통행을 막고 게릴라 전을 펴서 배가 올라 오기 어려웠다. 군량을 상주나루까지 가져온다 하더라도 무겁고 부피가 큰 쌀을 사람이 짊어지고 험준한 조령을 넘어 운반 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3) 일본군 海路 병참로의 차단

 

 일본군은 개전 초 수군으로 하여금 전라도 남해안을 돌아 한강과 대동강을 통해 서울과 평양에 군량미와 기타 군수품을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남해안에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에 연패하는 바람에 서해안으로의 진출은 단념한 상태였다. 소서행장은 평양성을 점령한 후 일본 수군이 오기를 7 개월이나 기다렸으나 명군이 먼저 압록강을 건너왔다.

 

 (4) 일본군의 약탈 보급대 편성

 

기아상태에 직면한 일본군은 식량을 획득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보급대를 편성하였다. 일본군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원ㆍ남양ㆍ진위ㆍ인천ㆍ안산ㆍ금천ㆍ가평ㆍ춘천ㆍ과천ㆍ용인ㆍ양지ㆍ죽산 등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 군대를 보내 약탈에 나섰으나 별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경기도 일대의 민가는 이미 탕진되어 식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모인 일본군 제 장들은 군량과 탄약 및 보충병의 투입이 단절된 상태에서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일본군 병사들도 염전사상이 급속히 번져 하루 속히 전쟁을 끝내고 귀국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593년 2월 27일 서울에 모인 일본군 지휘관들은 더 이상 서울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양도(糧道)의 확보가 가능한 남해안으로 철수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수길에게 보냈다. 일본군이 절망적 상황에 처해있을 때 심유경이 화의를 제의하여 왔다.

 

 5. 명ㆍ일간의 강화협상과 파국

 

1) 명ㆍ일의 강화교섭

 

 일본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농성 태세에 들어가면서 1593년 3월 초순부터 소서행장과 심유경이 강화협상을 진행하였다. 강화회담은 전쟁 당사국인 조선을 배제한 채 열렸다. 이 회담에서 명측은 ①일본군의 조선에서의 철수, ②조선 침략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그 표시로 수길의 항복문 제출, ③포로로 잡힌 조선의 두 왕자의 석방, ④이상의 요건이 모두 충족되면 명은 수길을 일본의 국왕으로 책봉하고 조공무역을 재개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반면에 일본측은 ①명은 수길을 일본의 국왕으로 봉하고, ②조선의 영토 가운데 한강 이남의 4개 道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③감합무역(勘合貿易, 특혜가 있는 조공무역)은 옛날대로 복원할 것,  ④명은 황제의 딸을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보낼 것,⑤일본은 포로로 잡은 2인의 조선 왕자와 대신들을 돌려 보내는 대신 조선은 다른 왕자와 대신 2명을 일본에 인질로 보낼 것, ⑥조선은 일본을 적대시 하지 않으며, 강화의 조건을 지킬 것 등이었다.

 

 강화조건은 양국이 서로 받아드릴 수 없는 정도의 모순에 찬 것이었으나 양국의 협상파는 임시휴전을 약속하고 양국을 오가며 협상의 타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양측의 협상단은 민감한 사항은 그 내용을 본국에 그대로 보고하지도 않고 필요에 따라서 문서의 조작도 서슴치 않았다. 양국에는 모두 매파가 있어 강화를 결정 할 때까지 4년 동안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2) 강화에 대한 조선의 입장

 

 명나라는 전쟁의 당사자인 조선을 처음부터 강화회담에 철저하게 배제시켰다. 초기에는 회담이 열리고 있다는 것마저 비밀에 부쳤다. 조선이 강화화담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안 것은 1593년 4월 초 송 경략이 좌승지를 불러 화담의 결과를 통보하여 온 것이 처음 이였다.

 

 명나라는 서울이 수복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 들였다. 이에 따라 명의 황제는 휴전이 성립한 것으로 보고 1593년(선조 26) 8월까지 명의 주력을 모두 조선에서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선은 명군이 모두 철수하면 남해안에서 농성중인 일본군이 다시 북진 할 것으로 보았다. 조선은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하여 명군의 일부를 조선에 유병(留兵) 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명군은 유정(劉綎)이 지휘하는 병력 1만 6천명만 남겨 일본군의 북상을 방비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조선은 명군의 요구대로 유병의 군량미 가운데 일부를 부담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3) 명군의 기아와 留兵의 철수

 

 1593년(선조 26)에는 전국에 심한 흉년이 들었다. 흉년이 너무 심하여 많은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명군 1만 6천이 유병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었는데 군량을 제때에 대주지 못하였다. 유정은 원래 경상도 대구의 팔거(八苣)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군량의 수송이 어려워 전라도 남원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명군은 조선 측이 군량을 계속 대주지 못하자 군사들이 굶는 날이 많았다. 유정의 부장들은 굶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귀국할 것을 계속 요청하였다. 1593년 말 명군 지휘부는 조선이 병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며 경주에 주둔하던 오유충과 낙선지는 부대를 이끌고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양겸은 조선이 유정의 군대에게 군량을 대주지 않아 사졸들이 죽어가고 있다며 선조에게 연일 대책을 요구하였다. 고 경략은 선조에게 조선의 관량관과 독운어사(督運御使) 윤경립을 잡아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선조는 윤경립을 구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에 남게 된 병력은 유정이 거느리는 5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남원에 주둔하던 유 총병의 군사 5천도 1594년 8월 압록강을 건너 일방적으로 철병해 버렸다. 조선에는 명군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4) 신종황제의 강화결정과 책봉사의 파견

 

 명 나라의 조정에서는 그 동안 일본과의 강화문제를 두고 의견이 엇갈려왔었다. 명나라에서는 매파가 득세하여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다. 명의 만력제는 제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다음 3개항을 결정하였다. ①일본군을 조선에서 모두 본국으로 철수시킨다, ②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략하지 않겠다고 서약한다, ③일본군이 모두 돌아가면 명은 일본을 봉공(封國)하되 조공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면 강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북경에 와있던 일본의 사자가 이 조건을 모두 따르겠다고 약속하자 명나라는 책봉사 일본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명나라는 책봉 방침이 확정되자 정사에 이종성(李宗成), 부사에 양방형(楊方亨)을 임명하고 심유경을 대동하여 일본에 가서 수길을 순화왕(順化王)으로 봉하고 소서행장에게는 도독첨사라는 벼슬을 제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명의 책봉사 일행은 1595년(선조 28년) 12월에 부산에 도착하여 倭營에 들어갔는데 이때까지도 일본군은 모두 철수하지 않고 약 2만 명의 병력이 조선에 그대로 주둔하고 있었다. 책봉사 일행은 부산의 왜영에 대기하면서 일본군이 모두 철수하였다는 통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1596년 4월 정사 이종성이 밤중에 왜영을 탈출하여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누군가로부터 수길은 책봉을 받을 의사가 없고 사절이 일본에 오면 죽일 것이라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밤중에 미복차림으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당황한 명은 1596년(선조 29년) 5월 부사 楊方亨을 정사로 삼고 심유경을 부사로 임명하여 일본에 들어가게 하였다. 명의 사신단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조선의 사신단도 함께 가기를 청했으나 조선은 사신을 보낼 마음이 없었다. 책봉사가 조선의 사신 파견을 거듭 요청하자 조선은 직급이 낮은 황신(黃愼)을 통신사로 임명하여 일본에 들어가게 하였다.

 

 수길을 일본의 順化王으로 봉하는 책봉식은 1596년 9월 3일에 거행되었다. 수길은 명나라가 보낸 金印과 冕服을 받았다. 수길은 일본의 승려 승태에게 황제의 책봉문을 읽도록 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강화조건이 수락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이것은 조선의 영토의 절반을 할양 받는 것이었다. 수길은 대노하여 화의를 결렬시키고 책봉사를 죽이려 하다가 그만두고 추방하였다.

 

 수길은 이어 조선은 명과 일본의 강화를 시종 방해하였을 뿐 아니라 포로로 잡힌 두 왕자를 석방하여 주었는데도 사례하러 오지 않고 하급 관리 두 사람을 보내는 데 그쳤을 뿐이라며 조선 사행의 접견을 거절하였다. 수길은 조선측의 “비례”를 트집 잡아 다시 조선에 파병하겠다고 공언하였다.

 

댓글
아이디 비밀번호

다음글
임진왜란 이야기(7), 정유재란의 개황과 군량미 문제
이전글
임진왜란 이야기(5), 조선의 군제와 병참체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