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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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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야기(7), 정유재란의 개황과 군량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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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야기(7), 정유재란의 개황과 군량미 문제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1. 정유재란의 시작

 

 1) 일본의 재 침략에 대한 조 명의 대비책

 

 (1) 명의 파병 준비

 

 정사 이종성이 왜영에서 탈출한 사건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도 일본군이 다시 침략하여 올 가능성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이 파견한 청병사의 보고도 부정적일 뿐 아니라 명의 첩보망도 왜군이 재침입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만약 조선에서 문제가 생기면 명이 재 파병하는데 많은 시일이 걸리기 때문에 이미 조선에 와있는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하기 위하여 경략 손광(孫鑛)은 본국 정부에 대응책을 건의하였다. 손광은 우선 조선과 인접하고 있는 요동에 있는 요병 3만 3천을 훈련시키다가 조선에 변이 생기면 급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군량이었다. 명은 군사를 파견하는 것보다 군량을 준비하여 조선으로 수송하는 것이 더 시간이 걸리고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명은 우선 3만 3천 병력의 6개월 분 군량과 마초를 조선에서 부담하라고 요구하였다. 명군의 6개월 군량은 31만 7천 석이라는 막대한 양이었다. 이 양은 지난 해의 전세 수입이 모두 7만여 석에 불과한 조선의 재정 형편상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양이었다.

 

 조정에서는 긴급 회의를 연 끝에 조선의 1년 세입을 모두다 사용해도 3만 3천 병력의 50일 분밖에 조달할 수 없다고 회답하였다. 손 경략은 사자를 보내 조선의 실상을 조사한 후 다시 황제에게 제본을 올려 명나라가 군량까지 모두 부담한다는 결정을 얻어냈다. 그러나 명의 군량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니 3~4개월 간의 식량을 우선 조선에서 해결하라는 조건이 붙었다.

 

 (2) 조선의 군량 수송대책과 18站의 선정

 

 선조는 명나라의 군량이 도착하면 임진란 때처럼 수송과 관리를 두서없이 하여 군량의 보급에 차질이 올까 두려워하였다. 선조는 과거와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철저한 준비를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호조는 평안도의 광양창과 강화도에 해로 수송 중계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동시에 평안도 의주ㆍ정주ㆍ안주ㆍ평양의 4참(4站), 황해도 황주ㆍ서흥ㆍ평산의 3참, 경기도에 개성ㆍ서을ㆍ수원의 3참, 충청도에 직산ㆍ공주ㆍ은진의 3참, 전라도에 전주ㆍ남원의 2참, 경상도에 안동 등 3참을 지정하여 각 참에 군량을 실어다 놓고 명군이 오면 이곳에서 군량을 지급하기로 하고 준비에 나섰다. 또 남원ㆍ전주ㆍ공주ㆍ충주ㆍ안동 다섯 고을은 군량을 많이 비축해두어야 하는 전략적 보급지역으로 정하고 조선의 새 곡식이 나오면 바로 이곳으로 세곡(稅穀)을 가져오고 또 공명첩(空名帖)으로 사들이는 식량도 이곳에 저장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2) 일본군의 재 침략

 

(1) 정유재란의 발발 

 

 1597년(선조 30) 2월 21일 풍신수길은 진립서(陳立書)를 통하여 조선에 파병하는 장수의 명단과 동원 병력의 규모를 발표하였다. 수길은 조선 침략군을 1군부터 8군까지 조직한 다음 수군은 별도로 구성하였다. 동원 병력은 모두 14만 1천 5백 명이었다. 총동원령을 내리기에 앞서 수길은 1월 13일 먼저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을 선발대로 조선에 나가도록 명령하였다. 수길은 이어서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청정과 교대로 선봉을 서도록 지시하며 공을 세워 강화회담을 잘못 이끈 죄를 씻으라고 하였다. 행장은 수길을 속인 죄로 처형 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좌우의 만류로 처벌을 면하였다. 행장은 1597년 2월 1일 부산에 들어왔다.

 

 (2) 李舜臣의 파면과 조선수군의 괴멸

 

 수길은 조선 출병을 앞두고 제 장들에게 “조선이 믿고 있는 것은 전라ㆍ충청도가 아직 온전하기 때문이니 출병하면 바로 전라도로 쳐들어가라고 지시하였다. 정유년에 조선을 다시 정벌하겠다며 바다를 건너온 일본군은 모두 14만이었다.

 

 일본군 수뇌부는 본격적인 조선 재침에 앞서 서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한 계략을 세웠다. 이순신의 제거 없이는 호남과 호서로의 진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1597년 1월 28일 조선은 소서행장과 요시라의 간계에 넘어가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3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원균은 1597년 7월 15일 칠천량(漆川梁)에서 일본 수군에게 대패하고 전사하였다. 조선 수군은 이 한 번의 전투로 괴멸되었다. 왜군은 조선 수군의 본영인 한산도에 상륙하여 이순신이 어렵게 모아놓았던 군량과 무기를 모두 탈취하였다.

 

 한산도는 서남해 어귀에 있는 섬으로 오른쪽으로는 남원을 가리고 있어 전라도의 바깥 울타리 노릇을 하였다. 한산도를 잃으면 연안 해역이 무방비가 되어 적이 돛만 올리면 언제든지 서울로 쳐들어 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조선은 유일하게 믿던 수군이 패망하자 패닉 상태에 빠졌다. 비변사는 남은 수군과 배를 모아 충청도 태안의 안흥량(安興梁)에서 적을 막고 명나라의 수군을 시급히 불러 강화에 주둔시키면 일본 수군이 서울에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고 선조에게 건의하였다.

 

 (3) 일본군의 전라도ㆍ충청도 공략

 

 조선 수군을 격파한 일본군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공략하기 위하여 침공군을 죄군(左軍)과 우군(右軍)으로 나누었다. 좌군은 宇喜多秀家(우키다 히데이에)를 대장으로 소서행장, 島津義弘(시마스 요시히로) 등이 거느리는 약 5만 명으로 편성하였다. 우군은 毛利秀元(모리 히데모토)을 대장으로 가등청정, 흑전장정), 鍋島直茂(나베시마 나오시게) 등 6만 4천여 명으로 구성하였다. 수가(히데이에)가 거느리는 좌군은 고성에 상륙한 다음 순식간에 하동, 사천, 진주, 곤양, 구례를 점령하고 전라도의 남원에 도착하였다.

 

 우군은 부산에 집결한 다음 경상도 내륙을 가로질러 서진(西進)하였다. 우군은 밀양, 창녕, 거창, 안의를 지나 황석산성에 도달하였다. 일본군은 황석산성을 함락시킨 후 수비하던 조선군과 백성들을 모두 죽였다. 전라도로 들어온 우군은 진안을 점령한 다음 전주로 방향을 잡았다. 藤當高虎(도도 다카도라), 加藤嘉明(가토 요시아키), 脇坂安治(와카자카 야스하루) 등이 거느리는 수군 7천 2백여 명은 하동으로 진출한 다음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구례에서 육군의 좌군과 합류하였다. 일본군 좌군이 전라도에 들어온 것 1597년(선조 30) 8월 11일이었다.

 

 전라도의 남원성은 전라도 내륙과 충청도로 통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남원성은 부총병 양원(楊元)이 지휘하는 3천명의 명군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700명의 조선군이 지키고 있었다. 8월 14일 남원에 먼저 도착한 소서행장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명군과 조선군은 적을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성은 3일만에 함락되고 수비병은 전원이 전사하였다. 오직 적의 탄환에 부상을 입은 양원만이 10여 기를 데리고 포위망을 탈출하였다.

 

 전주성을 지키던 명장 진우충(陳愚衷)은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때 전주성에 있던 전주부윤 박경신도 함께 달아나 전주성은 일본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빈 성이 되어 있었다. 겁을 먹고 우왕좌왕하던 군사와 백성들은 폭동을 일으켜 군량과 마초를 저장한 창고를 부수고 군량을 약탈하였다.

 

 (4) 일본군의 전라도와 충청도 유린

 

 전주에 입성한 일본군 좌ㆍ우군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내륙과 해안지방을 장악하기 위한 새로운 임무를 부여 받고 8월 29일 전주를 출발하였다. 우군은 계속 전진하여 충청도 공주에 무혈 입성한 뒤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좌군은 충청도 부여까지 진격하였다가 방향을 거꾸로 돌려 전라도 내륙으로 남하하였다. 좌군은 만경평야의 주요 곡창지대와 정읍ㆍ고창ㆍ영암ㆍ순창ㆍ담양ㆍ장성ㆍ화순ㆍ해남ㆍ나주 등지를 휩쓸고 다녔다. 좌군은 전라도에서 들판에 방치된 벼를 베어 군량을 보충하고 전라도 연안 해로를 장악하여 조선군의 군량 수송을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우군은 공주에서 병력을 나누어 가등청정은 청주 방면으로, 흑전장정은 천안ㆍ평택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이때 서울은 일본군이 육박해온다는 소식에 전전긍긍하였다. 사대부가의 피난행렬이 줄을 이었고 백성들도 동요하여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선조도 왕비를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피난시켰다. 정유재란 이후 왜군들은 더욱 흉포해져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백성들을 보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어가기 시작하였다. 또 젊은 사람들은 노예로 부리기 위하여 포로로 잡아갔다. 정유년 이후 왜군들이 지나온 길은 모두 수백 리가 무인지경이 되었다.

 

 2. 명군의 재파병과 3協軍의 편성

 

 1) 명군 지휘부의 결성

 

 명나라는 1597년(선조 30) 1월에 가등청정이 조선에 다시 상륙하였다는 소식에 접하자 조정회의를 열고 조선에 다시 파병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신종황제는 3월 29일 형개(邢芥)를 총독경략으로 임명하여 조선 원군에 대한 총지휘를 맡겼다. 같은 달 양호(楊鎬)를 조선경리(朝鮮經理)에 발탁하여 조선 파견군의 군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감찰어사 진효(陳效)를 감군(監軍)으로 임명하여 군령을 위반하는 자들을 처벌하도록 하였다. 군사작전을 위해서는 도독(都督) 마귀(麻貴)를 총병관(總兵官)으로 임명하고 그 휘하에 부총병 오유충, 양원, 이여매 등 수십 명의 장관을 배치하여 전투를 담당하게 하였다. 군량 감독은 호부중랑(戶部中郞) 동한유(董漢儒)가 전담하도록 하였다.

 

 총독경략이 된 형개는 사천ㆍ절강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아울러 계주ㆍ요양ㆍ선부ㆍ대동ㆍ산서ㆍ섬서의 보병과 복건ㆍ오송의 수군을 파견해주도록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그는 또 유정(劉綎)과 진린(陳璘)에게는 사천 및 절강ㆍ복건의 육군과 수군을 통솔하여 명령을 대기하도록 지시하였다.

 

 2) 명군의 직산전투와 조선수군의 명량해전

 

 1597년(선조 30) 5월 달에 조선에 먼저 들어온 총병관 마귀(麻貴)는 우선 남쪽에 있는 일본군을 압박하기 위하여 선발대로 양원이 거느리고 온 3천 명의 군사를 남원에, 오유충의 4천 명은 충주, 진우충이 거느리는 2천 명은 전주, 모국기의 3천 명을 성주에 배치하였다. 이 때는 명군이 다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고 군량이 준비되지 않아 일본군과의 결전은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일본군이 전라도와 충청도를 휩쓴 후 선봉이 경기도 안성까지 올라왔다. 경리 양호는 미귀에게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귀는 해생(解生)에게 기병 4천을 주어 급히 직산(稷山)으로 내려 보냈다. 명군은 1597년(선조 30년) 9월 7일 직산 남쪽 삼거리에서 4천 여명의 흑전장장 부대와 조우하였다. 명군은 기마병으로 적의 정면을 돌파하여 대승하였다.

 

 일본군은 직산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이때 일본군 우군의 주력은 공주와 청주에 있었는데 직산 전투 후 기세가 꺾인 흑전장정은 경기도 진격을 포기하고 청주, 보은을 거쳐 김천으로 퇴각하였다. 직산 전투는 서울을 향해 북상하는 일본군의 예기를 꺾고 정유재란 전국의 전환점이 되게 한 중요한 전투였다. 명군이 직산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승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비로소 서울의 민심이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육군과 합류하여 남원성 전투에 참가한 일본 수군은 남원성 함락 후 해로를 이용하여 서해안으로 북상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다. 남원에서 하동으로 내려온 일본 수군은 대기시켰던 3백 3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서해로 진출하기 위하여 해남반도 남단을 돌아 진도와 육지 사이에 있는 명량 수로를 통과하려고 하였다. 1597년 9월 16일 13척의 군선을 거느린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적의 진로를 가로 막았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의 승리를 통해 일본 수군의 서진을 봉쇄하였다. 일본군의 직산전투와 명량해전에서의 패배는 일본군의 사기와 군세를 크게 위축시켰다. 일본 수군은 더 이상의 西進을 포기하였다. 겨울철이 가까워지자 일본군은 군량 수송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전라도와 충청도의 내륙에서 철수하여 남해안으로 내려와 다시 농성에 들어갔다. 일본군 좌ㆍ우군이 장기 주둔에 들어간 곳은 순천ㆍ남해ㆍ사천ㆍ고성ㆍ창원ㆍ김해ㆍ죽도ㆍ양산ㆍ부산ㆍ울산ㆍ서생포 등지였다. 이 곳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부산과 일본으로부터 군수품의 수송이 용이한 곳이었다.

 

 3) 울산성의 공략과 군량미의 조달 문제

 

 (1) 울산성 전투

 

 조선에 파견된 명군의 주력이 조선에 들어오자 경리 양호(楊鎬)는 1597년 12월 麻貴와 상의하여 병마를 3協으로 편성하고 일제히 남하시켜 일본군과 결전을 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일본군은 직산에서 명군에게 크게 패한 뒤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철수하여 모두 남해안으로 내려와 있었다. 일본군은 전라도의 순천에서 경상도의 울산에 이르기까지 종전에 만들었던 왜성을 수리하거나 다시 만들어 농성 중에 있었다. 양호는 마귀와 함께 좌협군과 중협군을 거느리고 충주에서 출발하여 안동에서 합류한 다음 울산에 있는 가등청정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명군이 소서행장이 있는 전라도를 제쳐두고 가등청정이 있는 울산을 먼저 결전지로 택한 이유는 군량의 조달 문제 때문이었다. 1597년 가을, 전라도와 충청도는 왜군들이 침입하여 백성들을 보는 대로 죽이고 잡아가 들판에 있는 곡식을 수확할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어 대군의 군량을 조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경상좌도의 안동ㆍ예천 지역은 왜군들이 오지 않아 상대적으로 군량을 조달하기 쉽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충청ㆍ전라도 일대에 백성들이 없는 것과 관련하여 충청도 관찰사 김신원은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렸다. “왜군들은 전라도와 충청도에 들어와 분탕을 치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죽이고 코를 베어갑니다. 충청도 백성들은 10사람 가운데 겨우 한두 사람만 살아있는 형편이고 전라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확할 곡식이 들판에 널려있는데 수확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田稅를 거둘 수도 없고 군량도 운반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경리 접반사 이덕형도 왜군은 충청도와 전라도를 휩쓸면서 저장한 곡식은 노략질 해가고, 들에 있는 것은 먼저 베어가고 나머지는 불 태우고 있다고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경리 양호가 3협군을 편성하여 남진하였을 때는 12월로 한참 추운 겨울철이었다. 수로는 모두 얼어붙어 육로로 군량을 수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의주에서부터 경상도 남쪽 지방까지 남녀노소의 백성들은 군량을 나르느라고 큰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동설한 속에서 많은 백성들이 길에서 죽어갔다. 군량미의 수송은 평양 아래의 서흥ㆍ평산ㆍ황주ㆍ봉산 지역에서 특히 정체가 심하였다. 각 역참에 배치된 인부들이 달아나 수송 인력이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 관아의 수령들이 모두 곤장을 맞았다.

 

 (2) 울산성 전투와 양측의 군량문제

 

 1597년(선조 30) 12월에 명의 좌협과 중협의 4만 병력이 안동을 거쳐 경주에 집결하였다. 양호와 미귀는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마귀는 먼저 대포로 적을 공격하여 외성을 파괴한 후 기병으로 쳐들어갔다. 일본군은 내성으로 달아나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명군과 조선군은 10일 밤낮으로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가등청정이 지휘하는 일본군은 군량이 떨어지고 물까지 없어 더 이상 견디기 어렵게 되었다. 일본군은 열흘 밤낮을 싸워 피곤한 데다가 먹을 것이 떨어지고 물이 부족하여 극도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본군은 밤중에 성 아래로 몰래 내려가 해자의 물을 떠다 마셨다. 이 물은 시체 썩은 물과 피가 섞여 있었는데 이것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군량이 고갈되어 없어 벽토를 먹거나 죽은 말을 먹고 성 아래 전사자의 시체를 먹었다. 왜군들은 추위에 얼고 피골이 상접하여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이때 부산에서 바다를 돌아온 수만 명의 일본 구원병이 명군의 후방을 포위하였다. 사세가 급박해지자 명의 사령관 양호가 먼저 달아났다. 대장이 달아나자 군진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명군과 조선군이 2만에 가까웠다. 울산에서 패한 명군은 모두 서울로 철수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울산에서 철수한 명군이 들어오고 요동에서 내려와 남쪽으로 가는 군사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서울에 있는 명군의 수가 3만을 넘고 말도 8천 7백 필이나 되었다. 호조는 예고 없이 늘어난 명군의 식량 때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군이 사용할 식량은 경상도로 내려 보냈기 때문에 갑자기 철수한 명군에 대한 군량은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은 하는 수 없이 명의 사령부에 연락하여 요동에서 오는 병마는 내려오는 것을 잠시 중지하고 군량이 있는 곳에서 대기하도록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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