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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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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야기(8), 조선의 군량미 조달과 수송(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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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야기(8), 조선의 군량미 조달과 수송(1)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1. 조선의 재정사정과 군량미 조달

 

 1) 임진왜란기 조선의 재정사정

 

 (1) 평상시 조선의 재정

 

 조선의 재정은 전세(田稅)와 공물(貢物)로 충당하여 왔다. 전세는 논밭에서 생산되는 작물에 대한 세금을 말한다. 전세는 쌀 또는 콩으로 받았다. 공물은 국기의 경영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자를 현물로 걷는 세금을 말한다. 전세는 토지에 부과하였다. 공물은 가호에 부담시켰다. 국가에서 필요한 현물은 미리 품목과 수량을 결정하여 각 도에 배분하고 각 도는 각 군현에, 군현은 관내의 호에 배정하였다. 공물은 원칙적으로 해당 품목이 많이 생산되는 지방에 부담시켰다. 전복이나 감귤 또는 호피 같은 지역 특산물은 해당 품목이 생산되는 고을에 배당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쌀이 가장 중요한 화폐였다. 문무관들에 대한 녹봉을 쌀로 지급하였다. 조정의 각 부서에서 쓰는 비용과 궁중의 살림살이는 대부분 공물로 충당하였으나 일부는 쌀을 주어 이것을 팔아 해결하였다. 포목도 화폐로 사용하였으나 일종의 보조화폐였고 쌀이 가장 널리 사용되는 화폐였다.

 

16세기를 기준으로 왜란 전 전국의 토지는 약 151만 결이었다. 정부가 거두는 전세는 평년에 약 24~26만 석이었다. 이 가운데 쌀은 약 12만 석 가량이고 나머지는 콩이었다. 징수한 전세는 대부분 서울로 수송하여 나라의 살림에 충당하였다. 이 가운데 백관의 급료로 사용되는 쌀은 약 4만석 가량이었다. 전세의 극히 일부만 해당 지방에서 사용하였다. 단 국경지방인 평안도와 함경도의 전세는 서울로 보내지 않고 해당 도의 군비로 사용하였다.

 

 (2) 임진왜란기의 재정

 

 1592년 4월 일본의 대군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조선은 순식간에 전화에 휩싸였다. 일본군은 군량이 떨어지면 현지조달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들의 현지조달은 조선 백성의 식량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조선 백성들이 식량을 제대로 내주지 않으면 인명을 살상하고 집에 불을 질렀다. 일본군의 침탈에 놀랜 백성들이 산 속으로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성들이 죽거나 피난을 가면 논밭을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된다. 논밭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폭우가 쏟아지면 전답이 토사에 매몰된다. 황폐한 전답이 많으면 그만큼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게 된다.

 

 농사를 짓는 노동력이 줄어들면 때 맞추어 모내기와 김매기, 수확작업 등을 할 수 없게 된다. 농사는 시기를 놓치면 농업 생산량이 격감하게 된다. 임진왜란 기에는 왜군들이 지나가거나 진주한 곳에는 백성들이 평상시처럼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백성들이 죽고 피난을 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인력이 갑자기 줄었다. 일본군이 장기 주둔하고 있는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없어 폐농할 수 밖에 없는 곳도 적지 않았다. 조선정부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군사로 징집하고 또 군량을 비롯한 각종 전쟁 물자의 수송을 위해 인력과 우마를 징발하였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경제기반을 초토화시켰다. 7년간 계속된 전란으로 많은 수의 농민들이 죽거나 다치고 농토를 떠나 흩어졌고 논밭은 장기간 방치되어 형질이 훼손되고 농지의 비옥도가 크게 낮아졌다. 토지의 전결 수는 임진왜란 직전의 150만 결에서 임란 직후 30만 결로 대폭 감소하였다. 이는 임진란 전의 경상도 경지면적보다 적은 숫자였다.

 

 (3) 임진왜란 기의 재정구조

 

 세입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선조 26) 전세의 서울 이송량은 2만 5천 석뿐이었다. 왜란 3년째인 1595년(선조 28) 전국의 전세 수입은 겨우 7만 석에 지나지 않았다. 1593년(선조 26)과 1594년(선조 27) 호조가 전라ㆍ충청ㆍ강원도 3도에서 걷은 전세는 전쟁 전 수입의 절반인 5~6만 석에 불과하였다. 이 숫자는 전세뿐만 아니라 갖가지 명목을 달아 억지로 거두어 간 쌀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4년째인 1596년(선조 28) 전세의 상납액은 6만 석뿐이고 각종 공물을 쌀로 대신 받는 전결작미(結田作米)가 4만 석으로 모두 10만 석에 불과하였다.

 

 세출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경상도의 부세는 모두 경상도에 있는 군사에게 주고 전라좌도의 부세는 반을 한산도 수군의 군량으로 사용하였다. 전라우도와 충청도에서 나오는 전세는 서울로 조운하여 중앙의 수요와 경비를 담당하였다. 따라서 전후 중앙재정의 규모가 크게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입은 전전에 비해 20~30% 수준으로 축소되었는데 정부에서 사용하는 비용은 계속 증가하였다. 호조가 한 달에 지출하는 인건비만 하더라도 1595년(선조 28) 3월 기준으로 볼 때 쌀과 콩을 합하여 약 6천 8백 석이었다. 당시 정부의 세입으로는 인건비도 부담할 수 없는 정도였다. 조선은 전쟁에 동원된 군사들의 식량도 제대로 조달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2) 왜란기의 군량미의 조달방법

 

 (1) 세수의 증대

 

 전쟁기간 중 조선의 재정구조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정부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세수를 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여려가지 비상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가운데 중요한 수단은 백성들에게 벼슬을 파는 방법, 군량미를 기증받는 방법(募粟), 정부 예산의 삭감과 정부기구의 통폐합. 징발과 차입, 둔전의 실시 같은 것이었다. 이들 방법은 한가지씩 별도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한번에 여러 가지의 수단을 동시에 사용하여 재원을 마련하였다. 백성들의 부담은 감당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정부가 세수를 늘리기 위하여 동원한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전세

 

 당시 군량을 더 많이 모을 수 있는 공식적인 방법은 전세(田稅)를 모두 받아들이는 것과 흉년 또는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빌려준 양곡(還穀)을 빠짐없이 회수하는 방법뿐이었다. 농업생산력이 낮은 조선에서는 이것 만으로 군량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조정에서는 전세 이외에 다른 명목의 세금을 토지에 부가하여 세수를 증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전세의 변형된 형태는 아래와 같은 것이 있었다.

 

 연공작미(年貢作米)

 

 전쟁이 일어난 후로 군량미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자 정부는 현물을 내던 공납을 쌀로 받기 시작하였다. 공물을 쌀로 바꾸어 백성들로 하여금 쌀을 납부하도록 한다는 의미의 연공작미 또는수미법(收米法)은 임진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매년 실시하였다. 수미법은 공납의 종류와 크기와 관계 없이 토지에 부과하여 쌀로 내도록 하여 결전작미라고도 하였다.

 

 신공작미

 

 신공작미(身貢作米)란 관아에 소속된 노비가 신역(身役)을 바치는 대신에 쌀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전기에는 독립적인 호를 이루어 생활하는 관노비가 많았는데 이들에게 신역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에 쌀을 바치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각 도에 있는 내수사(內需司)의 노비만도 수만 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의 신공을 쌀로 거두어 군량에 보태게 하였다.

 

 계구수미

 

 정유재란 때 명군 10만이 전국 각지에 주둔하였는데 군량을 제대로 이어대지 못하여 조선정부가 곤경에 처하였다.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고 공명첩을 판매하여도 군량을 다 대어 줄 수가 없었다. 정부는 하는 수 없이 비변사의 건의대로 “인구를 헤아려 쌀을 거두는 일(計口收米)”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人頭稅를 내게 하는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부는 계구수미 한다면서 토지 1결 당 쌀과 콩을 각각 1두씩 거두었다.

 

 군역의 면제와 가포

 

 가포(價布)란 군역을 치러야 할 사람이 군역을 면제 받는 대신 포나 쌀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정부는 왜란 중에 군량을 조달할 길이 막막해지자 선조는 모든 남자를 징발하여 그 가운데 전투에 투입할 수 없는 자는 군역을 면제해주고 그대신 식량을 바치게 하라고 비변사에 지시하였다.

 

 상공미

 

 상공미(常貢米)란 지방관이 정기적으로 중앙 관서에 납부하는 물품가운데 그 품목ㆍ수량ㆍ시기 등이 정해져 있는 공물을 말한다. 예를 들면 감사ㆍ군수ㆍ현령 등의 지방관이 중앙에 쌀ㆍ베ㆍ금ㆍ은ㆍ동ㆍ철ㆍ꿀 등의 공물을 납부하였는데 왜란 기간 동안 이 품목의 상납량을 크게 증가시켰다. 지방관은 이를 관내의 백성들로부터 받아낼 수 밖에 없었다.

 

 별복정

 

 별복정이란 백성들이 중앙에 정기로 내는 공물 이외에 각 지방의 관아와 병영 등에서 사용하는 용도로 별도로 바치는 공물을 말한다. 임란 중에 백성들은 공납과 상공미 이외에도 별복정(別卜定)을 부담하였는데 군량미가 부족하자 물건 대신 쌀 또는 콩으로 받아갔다.

 

  (2) 모속

 

 공명첩 (空名告身帖)

 

 정부는 납속사목(納粟事目)이라는 임시규칙을 만들어 벼슬을 팔아 군량미를 마련하였다. 공명첩은 모속관(募粟官)이 현지에서 일정량의 쌀을 낸 사람에게 그의 이름을 적어서 주는 사령장을 말한다. 사령장을 발행하는 이조 또는 병조에서는 현지에서 사령장을 받는 사람의 인적 사항을 모르기 때문에 성명란을 비워둔 채 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름을 쓰지 않은 채 발행한 사령장을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 또는 공명첩(空名帖)이라고 하였다. 공명첩은 받는 사람의 출신이나 과거 합격 여부를 묻지 않았다. 공명첩은 군공(軍功)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많이 수송한 사람에게도 주었다.

 

 면역첩

 

 조선시대에 지방 관아의 아전, 비장, 조군(漕軍) 등은 세습하여 그 역을 치르게 하였다. 원래는 세습직이 아니고 신역(身役)으로 담당시키는 일이었는데 힘들고 고된 직이라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원자가 없자 정부는 강제로 이 일을 세습하여 담당시켰다. 정부는 임진란을 당하여 군량을 보충하기 위하여 일정량의 쌀을 바치는 역인에게는 면역첩(免役帖)을 주어 일정 기간 또는 평생 그 역을 면하여 주도록 하였다.

 

 면천첩

 

조선시대에는 노비, 백정, 재인, 갖바치 같은 특정의 직업을 자진 사람은 일반 백성과 구별하여 천인으로 취급하였다. 천인들은 신분상으로 심한 차별을 받았다. 이들은 상민과 혼인 할 수도 없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도 없었다. 그들의 신분은 자식들에게 세습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이들이 일정량의 쌀을 내면 면천첩(免賤帖)을 주어 신분상의 차별을 없애주었다.

 

 (3) 둔전의 개설과 소금 및 銀의 생산

 

 屯田의 개설

 

 둔전은 옛날부터 유사시에 군량을 모으는 데 중요한 수단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 12월에 둔전을 개설하여 군량을 보충하자는 안이 호조에 의해 제기되었다. 대신 들이 논의한 결과 백성들이 경작을 포기하고 피난을 가 노는 땅이 많아 둔전을 설치할 수 있는 곳은 전국에 많이 있었다. 심지어는 서울의 성밖 10리 안에도 둔전 할 만한 곳이 많이 있었다.

 

 선조는 둔전을 확대하기 위하여 안집도감(安集都監)을 설치하고 서해안의 여러 섬과 황해도ㆍ경기도ㆍ전라도 각지에 둔전을 설치하였다. 둔전은 왜란 기간 동안 여러 곳에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나 훈련도감의 둔전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소금의 생산과 판매

 

 바다를 끼고 있는 지방관청 또는 수영과 병영에서 군량을 보충하기 위하여 소금을 구워 판매하였다. 소금은 생활 필수품으로 반드시 소비하여야 하는 물건으로 당시에는 값이 비싼 재화였다. 특히 수영과 바다에 가까운 병영에서는 상당수의 인력이 있으므로 이들을 이용하여 소금을 제조하였다. 구운 소금은 식량과 교환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왔으나 이 방법으로 군량을 조달하는 데는 역시 한계가 있었다.

 

 銀의 생산과 무역

 

 명나라와 일본에서는 銀을 화폐로 사용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은을 사용하지 않아 시중에 통용되지 않았다. 명군이 은광개발을 독촉하고 은광을 방문하여 조사하기도 하였으나 은의 채굴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조선은 명군의 주둔지에서 은이 통용되기 시작하면서 채은을 허락하였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정부는 은의 통용을 장려하기 위하여 관아에서 속전(贖錢)을 받을 때는 은을 내도록 하였다. 정유재란 때 함경도에서 캐낸 銀 500냥을 생산하였다. 정부는 그 가운데 300냥을 의주에 보내 중강시에서 명나라의 식량을 사들였다. 이것은 국산 銀을 사용하여 요동에서 군량을 사들인 최초의 사례로 보인다.

 

 (4) 정부예산의 삭감과 기구통폐합

 

 감원

 

 정부의 지출을 줄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녹봉을 받는 정부의 관원 가운데 덜 필요한 또는 쓸데없는 인원을 줄이는 것이었다. 1593년(선조 26) 3월 비변사는 국난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필요 없는 관원을 도태시키고 급하지 않은 일에 쓰는 비용을 절약하자고 건의해왔다. 얼마 후 호조도 나서서 경비가 모자라니 긴요하지 않은 벼슬아치들을 감원하도록 주청하였다. 이에 따라 조정은 불급한 관원을 정리하고 능전(陵殿)의 참봉 수를 줄였디. 또 왕을 호위하는 금군과 환관의 수를 줄이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정부기구의 통폐합

 

 정부의 관원을 감원하면서 함께 따라서 취하는 조치는 정부 부서의 통폐합이었다. 예를 들면 1595년(선조 28)의 감원 시에 와서(瓦署)는 공조에 합병시키고, 활인서(活人署)와 귀후서(歸厚署)는 예조에 합병시키고, 사축서(司畜署)는 전생서(典牲署)에 합병시켜다. 무반 기구는 어떻게 줄였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감선과 녹봉의 삭감

 

 가뭄이나 홍수 등 자연재해로 흉년이 들어 식량이 모자를 때는 왕이 감선(減膳)을 통하여 절약을 시범하는 것은 조선의 오랜 전통이었다. 군량사정이 급박해지자 선조는 1593년, 1596년, 1598년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왕의 밥 쌀을 반으로 줄이고 내탕고에 있는 쌀을 덜어 군량에 보태게 하였다. 왕이 감선을 하면 신하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를 들면 1596년(선조 29)에도 군량을 만들기 위하여 왕의 밥상을 줄이고 왕자와 후궁들이 쌀을 모았다. 백관들도 요미를 삭감하여 이에 따랐다. 이리하여 왕실에서 모은 쌀이 1백 석, 관리들이 절약한 쌀이 3백여 석이 되었다. 서울의 백성들도 3백 석을 모아 군량미에 보태었다.

 

 (5) 기부ㆍ징발ㆍ차입ㆍ기타

 

 기부

  

 아무런 대가 없이 군량미를 내는 것을 말한다. 임진왜란 초기에 일부 의병장들은 자신의 식량을 의병들의 군량으로 기부하거나 뜻이 있는 부자들은 정부의 모속관의 권유에 응하여 쌀을 기부하였다. 이후에도 부자들은 大同米라는 이름의 기부를 종용 받았다.

 

징발과 할당

 

 사세가 급박할 때는 주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쌀이 있으면 군수에 충당하기 위하여 무상으로 가져갔다. 정부도 사세가 급하면 각도의 관찰사와 군수ㆍ현감에게 일정량 씩 쌀을 할당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조선의 관리들도 급할 때는 백성들의 식량과 종자까지도 강제로 징발하였다. 백성들로부터 징발해간 쌀의 양은 상당히 많을 것으로 보이나 그 수량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차입

 

 차입은 빌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에서 군량 수집의 할당이 내려오면 지방 관리들은 관내의 부자들에게 가서 쌀의 차입을 요구하였다. 차용증을 써주기도 하지만 전쟁 중에 차용증이란 효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차입은 그냥 기부하는 것과 사실상 마찬가지였다

 

통행첩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3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이순신은 전라도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하였다. 고금도로 진영을 옮긴 이순신이 마주친 가장 큰 문제는 군량의 확보였다. 고심 끝에 이순신은 해로 통행첩을 발행해서 군량을 확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당시에는 원균의 패전으로 놀란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에 거주하던 백성들 가운데는 배를 타고 왜군을 피해 바다로 나온 피난민이 많이 있었다.

 

 이순신은 해로통행첩을 가지고 있는 선박 만 3도 연해를 통행할 수 있으며 통행증이 없는 배는 간첩선으로 간주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통행첩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대선은 쌀 3석, 중선은 쌀 2석, 소선은 쌀 1석을 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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