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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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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야기(8), 조선의 군량미 조달과 수송(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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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야기(8), 조선의 군량미 조달과 수송(2)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2. 군량미의 수송과 수송차질

 

 1) 임진왜란기의 군량수송

 

  (1) 군량수송의 감독체계

 

 임진왜란기(1592~1593)에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보내기로 한 군량은 1차로 요동의 14만 석, 2차는 1593년 중반기부터 보내기 시작한 山東의 12만 석으로 모두 26만 석인 것으로 보인다. 명은 요동지방에서 구입한 군량은 육운하였고, 산동ㆍ천진 지역에서 구매한 양곡은 해로를 이용하여 의주로 수송하였다. 육운하는 군량은 주로 요동지방의 말과 당나귀, 마차 등을 세내어 의주까지 가져왔다. 의주에서부터 조선의 남쪽지방에 있는 명군 주둔지까지는 조선 백성을 이용하여 등짐으로 날랐다.

 

 조선은 명의 군량을 압록강 변에서 인수하여 우선 평양으로 수송하는 일을 전담하기 위하여 분호조(分戶曹)를 만들고 당상과 낭청을 임명하였다. 또 군량이 지나가는 연도의 각 고을에 독운관(督運官)을 배치하고 이들을 감독하기 위하여 검찰사(檢察使)도 파견하였다. 이에 앞서 선조는 평안도의 남자와 승려들을 빠짐없이 동원하여 군량을 수송하고 아군 가운데 노약자들은 명군이 사용할 땔나무와 마초를 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군량이 압록강 변에 도착한 지 10여일 만에 군량을 수송하는데 난관에 봉착하였다는 보고가 비변사에 올라왔다. 먼저 대포와 기타 무기 등을 연 이틀 운반하고 나니 인력이 고갈되었고, 소를 사서 운반하려 하였지만 걸음이 느리고 길이 좁아 하루 길을 이틀이 걸려도 못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배로 옮길까 하고 사정을 알아보니 겨울이라 강과 바다가 얼어 불가하고, 은자를 주고 사람을 고용하려 하였으나 은을 받지 않아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2) 군량수송의 차질

 

 군량이 압록강 변에 도착한 지 10여일 만에 군량을 수송하는데 난관에 봉착하였다는 보고가 비변사에 올라왔다. 먼저 대포와 기타 무기 등을 연 이틀 운반하고 나니 인력이 고갈되었고, 소를 사서 운반하려 하였지만 걸음이 느리고 길이 좁아 하루 길을 이틀이 걸려도 못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배로 옮길까 하고 사정을 알아보니 겨울이라 강과 바다가 얼어 불가하고, 은자를 주고 사람을 고용하려 하였으나 은을 받지 않아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군량의 수송이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자 명군의 항의와 재촉이 빗발치듯 하였다. 사간원은 분호조의 업무처리가 미숙하여 전운(轉運)한 숫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수송량의 태반이 유실되는 실정이라고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사간원은 또 분호조의 수송 담당자는 거의 적임자가 아니고 인마를 징발 할 때도 본 고을의 수령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하여 불만이 많다고 탄핵하였다.

 

 사헌부도 말단 관리들이 수송과정에서 영수증도 없이 쌀을 주고 받아 운반한 쌀의 수량도 제대로 모른다고 수송의 무질서를 비판하였다. 사간원은 분호조의 당상ㆍ낭청ㆍ검찰사를 모두 바꾸고 독운관은 폐지하고 각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그 일을 책임지고 하도록 하라고 주청하였다. 이 때문에 군량 운반의 책임자인 商山君 박충간이 성과는 별로 내지 못하면서 운반한 군량을 착복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평안도의 선천군수는 한 달에 세 번이나 곤장을 맞았다.

 

 2) 군량수송 차질의 원인

 

  (1) 백성들의 노역기피와 인력부족

 

 군량수송 차질의 가장 큰 이유는 연도의 인력의 부족이었다. 왜란이 일어나면서 많은 백성들이 죽고 또 군대에 뽑혀 나갔다. 군량을 인수하여 가져오는 길목에 있는 평안도와 황해도는 남쪽지방에 비하여 인구가 적었다. 특히 평안도는 물산이 발달하지 않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사는 화전민이 많았다. 정주하는 인구가 적어 호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금이나 병역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관에서는 친척에게 연대 책임을 물었다. 백성들은 관의 침학(侵虐)이 있으면 도망가기가 일 수였다.

 

 식량은 다른 군수물자와는 달리 매일 먹어야 하는 것이고 명군이 있는 한 군량의 수송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백성들은 1년이 가깝게 계속되는 사역에 지칠 대로 지쳤다. 백성들은 언제 사역이 끝나게 될 지 알 수 없게 되자 관에서 부르면 대부분 도망치고 응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평안도와 황해도는 각 고을의 양반과 선비는 물론 노약자와 부녀자를 까지 모두 동원하여 군량을 나르게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2) 주먹구구식 운량관리

 

 정부는 군량의 수송을 위하여 분호조를 세우고 관리들을 파견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군량이 지나가는 각 군ㆍ현이 관내의 백성을 동원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군량의 수송방법은 원칙적으로 각 군별로 경계 지점(또는 站에서 站)까지 운반하고 인접한 다음 군에 릴레이 식으로 넘겨준 것으로 판단된다.

 

 연도(沿道)연도의 각 군은 인구 수와 행정 능력 그리고 지세와 군과 군 사이의 거리가 상이하므로 같은 양의 군량을 옮기는데도 한 사람이 담당할 일의 분량은 당연히 달랐다. 지세가 험하고 백성의 수가 적은 고을 일수록 동원된 인부들의 노고가 심하고 사역하는 날짜가 길었을 것이다. 우마가 없고 도로는 좁고 험한 곳이 많은데 인력으로 운반하니까 군량의 수송이 계속 늦어지고 수량도 부족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3) 험한 지세와 겨울철의 노역

 

 한번 동원된 백성들은 며칠 동안이나 일 했을까. 기록에 따르면 인력이 부족하니까 일단 동원된 백성은 계속하여 10일 또는 20일 간을 일해야 교대해 주는 형편이었다. 이 때문에 겨울철 혹독한 추위에 지쳐서 중간에서 죽거나 낙오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고 인원이 많아지면 남아 있는 사람들의 노역량이 늘어나지 않을 수 없다. 도망자가 속출하고 한번 도망간 사람을 복귀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운량 업무가 더욱 어려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는 연도의 각 군에 독운관을 보내어 수송을 독려하고 부정을 감시하였다. 각 군에 배치된 독운관들은 이런 일은 해본 일이 없는 적임자가 아니어서 운반한 숫자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인원을 배정 할 때마다 제 멋대로 하여 노역의 공평성을 기하지 못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업무감독과 처리요령이 통일되지 않아 군량 수송에 차출된 사람이 며칠 동안 일해야 하는 지 군ㆍ현 별로 제 각각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혼란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중간의 교대지점에서 검수(檢受)기능이 불충분하면 각 지에 도착한 수송량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 수송로가 길어 도중에 집에 가서 쉬기도 하는 등 단체 행동이 어려워 군량을 유출시키는 기회가 많다는 점이 문제였을 것이다.

 

 특히 노력동원된 백성들에게 임금을 주지 않아 굶주린 백성들이 중간에서 쌀을 빼 돌렸을 개연성은 아주 높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비조직적인 수송관리로 상당량의 군량이 수송 중에 도둑맞기도 하고, 비바람에 노출되어 변질된 것, 수송 중에 감모된 것, 수송 인력이 식량으로 사용한 것 등이 상당량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2) 정유재란기의 군량수송

 

 (1) 군량수송계획

 

 정유재란 때 명은 약 10만 명의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들이 먹을 군량은 양곡과 은자ㆍ면포 등을 합하여 약 50만 석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는 명나라의 군량이 도착하면 임진란 때처럼 수송과 관리를 두서없이 하여 군량의 보급에 차질이 올까 두려워하였다. 선조는 과거와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철저한 준비를 지시하였다.

 

 명나라는 임진란 때와 같이 군량을 두 지역에서 가져왔다. 요동량과 산동량이다. 요동량은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구입한 것이고 산동량은 산동지역을 중심으로 그 근방에서 조달한 것이다. 조선은 명나라에서 오는 요동의 군량은 육운으로, 산동의 군량은 해운으로 올 것으로 예상하였다. 조선은 명나라에서 해운으로 오는 군량은 대동강 입구에 있는 광양진(廣梁鎭)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광양진은 평안도 삼화현에 있는 포구로 수심이 깊어 하역하기 편리 한 곳으로 평양과의 거리도 가까운 곳이었다 또 되도록이면 강화로도 가져다 줄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강화도를 주 보급기지로 삼아 여기에 큰 보급창고를 지어 광양진에서 전운해 온 군량을 저장하였다. 동시에 조선의 내륙 지역에 18개의 보급참을 지정하고 미리 전세와 공명첩으로 사들인 식량을 가져다 놓고 비상시의 수요에 응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강화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내륙에 있는 명군기지 까지는 한강과 금강ㆍ영산강 등의 수로와 육운을 함께 이용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정유재란 때부터는 군량의 수송은 의주까지 육운하는 양보다 선박으로 대동강입구에 있는 광양진과 강화로 수송하는 양이 많았다. 조선은 강화의 보급기지로부터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경상도의 일선으로, 또 금강과 영산강 수로를 이용하여 군량을 전라도의 일선으로 수송하였다. 명량의 수송 루트는 아래와 같다.

 

 遼東糧(요동량): 요양-안동-의주-용천-평양-황해도-서울까지는 육로수송. 서울에서 충주까지는 한강수로를 이용. 조령부터 경상도 각지는 육로수송.

 

 山東糧(산동량): 천진-대고-청주-래주-등주-여순-의주-광양진-강화까지 해로수송. 강화-서울-충주까지 한강수로 이용. 조령부터 경상도 각 주둔지까지 육로수송. 강화-군산-은진ㆍ공주까지 해로와 금강수로 이용. 전주-남원-각 주둔지까지 육로이용. 강화-목포-나주까지 해로와 영산강수로 이용. 전라도 각 주둔지까지 육로수송.

 

 (2) 3협군의 남진과 수송 차질

 

 1597년(선조 30) 12월 초 명군은 3協으로 부대를 나누어 일제히 남하하였다. 명군의 수는 약 5만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한 겨울이 되어 바다가 얼어 산동의 군량을 더 이상 해로로 가져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육운에 의존하여 의주의 군량을 가져오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평안도와 황해도의 백성들이 엄동설한에 끝도 없이 짐을 나르느라고 지쳐서 도로에서 죽어갔다. 3협군을 동원한 울산전투는 실패로 돌아갔다.

 

 (3) 4협군의 남진과 군량수송의 차질

 

 1598년(선조 31) 봄 해빙이 되자 명의 경략 형개는 4협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결전을 지시하였다. 이때 동원된 명군과 조선군의 총수는 11만에 달하였다. 명나라와 조선의 대병이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경상도와 전라도 남해안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멀리 평안도로부터 경상도 내륙으로의 군량 운송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경상우도로의 수송문제가 더 심각하였다. 지금까지 경상도로의 수송로는 강화의 쌀을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충주까지 배로 옮긴 후 등짐으로 험준한 鳥嶺을 넘은 다음 육운으로 각지로 배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598년(선조 31) 4월에 들어서자 예상하던 문제가 터졌다. 갑자기 남쪽에 집결한 대군을 위한 군량의 수송은 지지부진하였다. 각지에 주둔하고 있는 명군의 군량이 떨어져 굶는 날이 많아졌다. 명의 조선경리 양호는 군량을 대지 못하면 조선에서 철수하겠다고 통지하면서 호조판서를 교체하고 운량을 감독하는 독운어사를 구속하라고 요구해왔다.

 

 영남내륙으로 군량을 속히 운반하기 위해서는 강화도에서 수만 석의 군량을 실어다 충주에 쌓아두는 것이 선결 조건이었다. 그러나 한강에 있는 배는 크기가 작을 뿐 아니라 척수도 부족하여 한 차례의 수송에 겨우 1천 2백 석 정도만 수송할 수 있었다. 이 양은 갑자기 늘어난 군사를 계속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한두 차례의 소요량 밖에 되지 않았다.

 

 정부는 군량의 수송량을 증가 시키기 위하여 그 동안 주지 않았던 선가도 지불하고 등짐을 지어 나르는 인부들 에게도 품값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경리 양호는 선척의 부족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각 도에 할당하여 선박을 새로 건조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평안도 철산에서는 20척의 배를 만들고, 황해도 장산곶은 50척, 충청도 안면도는 10척, 전라도 변산은 20척으로 모두 100척을 새로 만들기로 하였다.

 

 조선정부는 군량수송의 부진에 의한 군량미의 부족문제로 진퇴유곡의 상태에 빠졌을 풍신수길이 갑자기 사거하였다. 풍신수길이 사망한 날짜는 1598년(선조 31) 8월 16일이었다. 풍신수길이 죽자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고 임진왜란은 종결되었다. 명군은 차례로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따라 군량미의 수송대란도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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