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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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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야기(9), 조선군의 보급 상황과 백성들의 고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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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야기(9), 조선군의 보급 상황과 백성들의 고난(1)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1. 임진왜란기 조선군의 보급상황

 

 1) 조선군의 기아와 해산

 

  (1) 전라병사 崔遠부대의 고난과 해체

 

 몽진 길에 오른 선조를 보위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가던 전라병사 최원의 군대가 강화도에 들린 것은 1592년(선조 25) 여름이었다. 최원의 군대는 보급이 없어 강화도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최원의 군사가 절박한 사정에 처해있다는 보고가 임금에게 올라온 것은 1592년 10월 4일이었다. 선조는 이날 비변사 당상들과 명군이 올 경우의 군량 문제로 회의를 하다가 최원軍의 상태를 알게 되었다. 조정은 명군에 대한 군량 대책에만 몰두하여 조선군에 대한 보급은 방치한 상태에 있었다.

 

 당시 일본군은 국내에 두루 흩어져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은 각도의 관찰사가 각기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며 각자의 도를 지키고 있었다. 오직 전라도만이 아직도 온전하기 때문에 병마절도사 최원이 군사 4천 명을 거느리고 근왕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향하다가 군량이 없어 강화도에 떨어져 있었다.

 

 최원의 군사는 겨울철이 다가오는데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며 찬 바람을 막을 옷이 없어 짚과 풀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1592년 겨울은 추위가 매우 심하였다. 최원의 군사는 잇따라 굶어 죽고 얼어 죽었지만 호조와 전라도에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살아 남은 군사들은 귀신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다른 곳에 있는 조선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사간원은 뒤늦게 최원이 장수로서 쌀과 옷을 조치하지 못하고 주는 시기를 잃어 장병들이 떼죽음을 하고 있는데 구휼하지 않았다며 그를 무겁게 치죄하라고 탄핵하였다. 전라감사 권율은 최원의 군사를 해산하여 집으로 돌려보내고 무기는 회수하여 후일에 쓰겠다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리자 선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듬해 봄 최원의 군사는 거의 다 굶어 죽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2) 군량의 부족과 의병의 해산

 

 의주에 도착한 선조의 행재소에는 근왕병이 모자랐다. 원래 있던 근왕병들은 도망가버리거나 싸움터로 내보냈다. 이 때문에 임금을 위한 경비가 매우 허술하였다. 군량을 얻을 길이 없는 군사들과 의병들은 숙위를 자원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호조에서는 다 먹여줄 수가 없다며 이들을 쫓아버렸다. 뿐만 아니라 일부 숙위 군사들의 요첩을 회수하였다. 이 때문에 숙위가 더욱 허술해지고 수졸들의 숫자가 모자라게 되었다.

 

 1593년 1월 명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개성으로 내려갔다. 선조는 비변사 당상들에게 조선군은 한 사람도 후퇴하는 적을 차단하는 사람이 없다며 화를 냈다. 특히 의병장 우성전(禹性傳)은 황해도의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두 번이나 받고도 오지 않았다며 명군이 위에서 공격하면 우리 군사는 밑에서 적을 요격해야 승전할 수 있다며 불만을 들어내었다.

 

 선조는 조선의 관군과 의병들이 자기의 향토만 지키는 것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임금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사와 의병들은 그곳에만 머물지 말고 서울의 왜군을 공격하거나 아니면 황해도에 와서 평양에 있는 왜군들의 후방을 교란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비변사는 양호에서 올라온 답변은 군량이 없어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며 각지의 의병들은 감사의 명령을 듣지 않고 식량이 없다고 핑계하며 흩어지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선조는 경기도 의병은 양식만 허비하고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며 이제 명군이 진군하면 군량이 부족할 것이니 그곳의 의병장들로 하여금 가지고 있는 양식을 모두 관군에게 보내도록 명령하라고 승정원에 하교하였다. 선조는 의병이란 것은 자기의 식량을 먹으면서 자기의 무기를 사용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을 이르는 것인데 지금의 의병은 옛날의 의병과 달라서 公義를 빙자하여 私謨를 경영하고 시기에 편승하여 먹고 살기를 도모하는 자들이 많게 되었다면서 이제부터는 의병에게 납곡 한 자는 논상하지 말라는 전교를 내렸다.

 

 평양성이 회복되자 명령이 없는데도 군량부족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해산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의병들은 식량이 부족해지자 관가의 곡식을 얻어 먹고 있었다. 관가도 군량을 확보하기 어렵자 공명첩을 팔아 얻은 식량을 의병에게 대주었다. 1593년 초부터 식량부족이 심해지자 군대에 나가야 할 자들이 의병에 들어가 징병을 기피하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2) 조선군의 기아와 해산

 

 (1) 1593년 군량보급 상황 

 

 1593년(선조 26) 4월 명나라와 일본이 임시휴전에 합의하면서 일본군은 4월 중순 서울에서 일제히 철수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때 선조는 일본군을 공격할 수 있는 호기라고 생각하고 각 도의 군사를 모두 보내 적을 공격하고 삼도의 수군도 해상에서 적을 요격하라고 비변사에 지시하였다. 경기도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 부대에게도 왜군을 추격하여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선군 장수들은 철수하는 일본군을 추격하기 위하여 한강을 건너려고 하였다.

 

 명군은 宋 經略의 명령이라면서 일본군을 추격하여 한강을 건너려는 조선군을 막았다. 명군은 한강을 건너간 경기水使 이빈의 선봉장 변양준의 목에 칼을 씌워 명군의 사령부로 끌어 가고 이어서 강을 건너려는 고언백을 구금하였다. 조선군이 당한 봉변에 대하여 선조가 그 경위를 묻자 대신들은 명군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일로 인하여 조선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또 군량마저 없어서 부대를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보고하였다.

 

 이항복은 당시 조선군은 이름만 관군이지 군사가 부족하고 군량이 없어 도망병이 많이 생기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이빈의 군대는 대부분 도망가버려 현재 5백 명에 불과하며 2천에 불과하고 전라도, 고언백의 군사도 2백 명에 불과하다고 설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라도 순찰사 권율의 군대는 군량이 없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호남으로 돌아가버렸다고 보고하였다. 이항복은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정부에서 군량을 제대로 보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도원수 김명원도 조선군이 5일 동안 굶어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도망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는 장계를 올렸다. 강원도 영원성을 지키고 있는 조선군 5백 명도 군량을 대어주지 않자 인근의 여러 고을에 흩어져 얻어먹으며 연명하고 있어 군사로서 쓸 수 없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2) 대흉년과 군량보급

 

 조선군에 대한 군량보급은 해를 넘겨도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었다. 임진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선조 26)은 날씨도 좋지 않은데다가 병화로 파종한 것이 별로 없어 수확할 것이 없는 대흉년이었다.

 

 1593년 6월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 시킨 후 모두 경상도 남해안으로 내려가 성을 쌓고 농성에 들어갔다. 명군의 주력은 본국으로 철수하였고 劉綎과 오유충ㆍ낙상지가 거느리는 명의 留兵 1만 6천 명은 경상도 팔거와 성주ㆍ경주에 주둔하며 혹시 모를 일본군의 북상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군의 본영은 咸安에 있었다. 휴전기간 중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사는 경상우도에 경상도의 군사는 경상좌도의 여러 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라도와 충청도 군사의 군량은 6~7백리 떨어진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수송해 오고 경상도 군사는 경상도의 곡식을 공급하는 것이 군량의 조달원칙이었다.

 

 비변사는 1593년 여름 영남에 있는 조선군의 상황에 대하여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김응서ㆍ이시언ㆍ박진이 거느리고 있는 부대는 군량이 없어 매일 도망병이 생기는데 군사 수가 적은 곳은 겨우 10여 명, 많은 곳이라고 해도 1백여 명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경상도로 내려 보낸 군사는 수천 리 먼 곳에서 왔기 때문에 도망갈 생각만하니 앞으로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를 내려 보내지 말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1593년에 이어 1594년도 심한 흉년이었다. 선조는 여러 명의 선전관을 계속 파견하면서 일선에 있는 조선군의 급식상태를 조사하여 오라고 지시하였다. 1593년 왕명을 받은 선전관 趙安邦이 경상도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의 실태를 살펴보고 돌아와 복명서를 올렸다.

 

 조안방은 兩湖의 군사는 함안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는데, 6~7백리 밖에서 군량을 운반해 오기 때문에 군량이 접제(接濟)되지 않아 군사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심한 곳은 4~5일 또는 6~7일씩 굶고 있으며 사정이 좋은 곳도 하루에 5~6홉의 쌀로 죽을 끓여 두 사람이 나누어 먹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도망치는 군졸이 매일 1백여 명에 달하고 있다고 조선군의 실정을 설명하였다. 경상도에서 왜적과 대치하는 각 진의 조선군사는 모두 합하여 6~7천에 불과하고 그 중에 한 장수가 거느린 군졸이 6~7명인 부대도 있으며 각 진에 있는 활을 모두 합해도 겨우 1백여 개뿐 이라고 설명하였다. 조안방은 이런 병력과 무기를 가지고 강한 왜적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1594년(선조 27)년 3월 선조는 유몽룡을 선전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영남에 있는 우리군사가 많이 굶어 죽었다는데 호조에서는 왜 군량을 대지 않았는지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몽룡은 경상우병사 성윤문, 경상좌병사 고언백, 방어사 김응서의 진중과 인근 고을의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유몽룡은 “각 고을은 명군을 접대하느라고 관고가 탕진되어 조선군을 위한 군량을 제대로 보급하지 못하여 사졸들은 날로 피폐해가고 있으며 戰馬도 야초와 콩이 고갈되어 계속 죽어가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순찰사가 각 고을에 군병을 보내라고 재촉하고 있지만 해당 고을은 관내에 사람이 없다는 핑계만 대고 있으며 간혹 군사를 보내주는 고을이 있으나 이들은 병들어 행색이 파리하고 10리만 행군해도 쓰러지는 자가 10중 7ㆍ8이고, 진중에 있는 군사들은 楡皮(느릅나무 껍질)나 소나무 껍질을 가루로 만들어 연명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조선군의 참담한 현실은 1595년에도 계속되었다. 1595년(선조 28) 정월에 哨官 정례가 남쪽을 순시하고 돌아와 임금에게 조선군의 실상을 보고 하였다.

 

 정례는 “우리나라 장수들은 거느리는 군사도 없이 산속에서 막을 치고 단지 牙兵(수하에 거느리는 家兵) 몇 명만을 데리고 보따리를 묶어 놓고 변을 기다리고 있으니 적이 들이 닥치면 틀림없이 도피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장수가 있다고 믿으나 실상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며 入防한 군사들은 군량이 없어 인근의 각 읍으로 얻어 먹으러 나누어 보내고 있어 만일 적이 온다면 다시 집합시키기 어렵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또 水軍도 양식이 떨어져 굶주려 죽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라고 복명하였다.

 

 李舜臣도 전라좌수영에서의 기근과 전염병 사정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만역이 크게 번져 군졸의 태반이 전염되어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군량이 부족하여 굶던 끝에 병에 걸리면 반드시 죽었습니다. ---신이 거느린 군사만 하더라도 사수와 격군을 합쳐 원래의 수가 6천 2백여 명이었는데 작년과 금년에 전사한 사람의 수와 2~3월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병사자가 6백여 명이 됩니다.---간신히 남아 있는 군졸들도 조석으로 먹는 것이 하루에 2~3홉에 지나지 않아 활을 당기고 노를 젓는 것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3) 보충병의 투입과 도망병 발생의 악순환

 

 (1) 도망병의 증가

 

 휴전기간 동안 병조는 일선부대에서 병력 보충을 요구하면 백성을 징집하여 보충병을 내려 보내주었다. 그러나 군량은 보내주지 않았다. 일선 부대에 군량을 보내지 않고 병력만을 보내면 반드시 도망병이 늘어났다. 조선군 부대는 군사가 없는 이름뿐인 군대로 전락하였다. 이와 같은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급기야 비변사는 임금에게 군량대책을 세우지 않고 군사를 계속 징발하여 보내는 것을 중지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비변사는 “현재의 사세로는 군사를 모으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군량을 대는 것이 어려우니 아무리 많은 군사를 징발 하였다 하여도 먹일 식량이 없다면 하루도 軍陣에 머물게 할 수 없는 일이니 징병군도 上番군사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식량을 준비하여 출정하도록 하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비변사는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했을 때도 조선군은 군량이 부족하여 제장이 거느리고 간 병졸들을 집으로 되돌려 보내는 형편이었다며 병력의 충원에 앞서 군량의 보급대책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변사는 조선군의 군량보급 대책으로 경상ㆍ충청ㆍ전라도의 군인은 해당도 출신의 장수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즉 “전라방어사 이시언으로 하여금 전라도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박진이 영남의 형세를 잘 아니 그로 하여금 영남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유능한 충청도 출신 장수 한 명을 구하여 그를 충청방어사로 삼아 충청도 군사를 거느리게 하면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즉 이들이 각각 3도의 병정들로 군대를 구성하면 병사들은 집이 멀지 않기 때문에 친척의 존망(存亡)을 들을 수 있고 군량과 의복이 없을 때 집에서 가져오기 쉬우니 그렇게 하자는 것이었다.

 

 (2) 조선군의 기아와 해산

  

 명군이 모두 조선에서 철수한 1594년 이래 조선군은 단독으로 남쪽에서 농성하고 있는 일본군의 북상에 대비하기 위하여 경상도 배후를 지키고 있었다. 이때 경상도 좌병영의 진중에는 전염병이 크게 발생하여 목숨을 잃는 군사가 많았다. 당시 군사를 뽑아 왜군과 대치하고 있는 경상도로 보내는 일은 군량과 무기, 군복 등을 조치하지 않고 사람만을 뽑아 내려 보내는 일을 계속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兵曹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군사를 조발하는 일은 반드시 먼저 확정된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공격을 하든 수비를 하든 몇 명이 필요하고 군량은 얼마를 지탱할 수 있는지를 헤아린 다음에 군사를 선발해야 백성들을 번요하게 하지 않고 일을 성사시키는데 유익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징발된 신병들이 오가는 사이에 지방을 소란스럽게 하고 내려간 다음에는 군량을 대어줄 길이 없어 인근의 굶주린 백성만 괴롭히고 폐단을 끼칠 뿐입니다. 이번에 내려 보내는 인원도 군량을 대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무렵 조선군의 본영은 宜寧에 있었다. 도원수 권율도 조선군의 상황에 대하여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그는 의령에 있는 각 군을 순시하였더니 군량이 없어서 군졸들을 모두 흩어 내보냈고 진영에 머물러 있는 자가 5백 명 미만이라는 것이었다. 권율은 경주에 있는 조선군도 방문하였는데 그곳의 군사들도 외롭고 위태함이 의령과 똑같았다고 하였다.

 

 2. 정유재란기 조선군의 보급과 기아

  

 1) 조선군의 보급

  

 4년간의 휴전기를 끝내고 정유재란을 맞았을 때의 조선군은 임진왜란 때의 조선군과는 달랐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훈련도감을 통하여 훈련된 병사가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요충지에 산성을 수축하고 약간의 군량도 비축하고, 무기를 마련하는 등 어느 정도의 준비가 있었다. 또 일선 부대를 지휘하는 각 고을의 수령들도 전쟁을 겪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과거와 같이 무력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군량의 조달과 수송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농업생산력이 거의 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유재란 때 문제로 나타난 것은 약 10만에 달하는 명의 대군이 일본군과 결전을 하기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로 한꺼번에 내려왔으나 군량의 수송이 군대의 이동만큼 빠른 속도로 뒤따라 올 수 없다는데 문제점이 있었다. 명군도 조선에서의 군량조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수십만 석의 군량을 조선으로 수송해왔으나 조선의 수송능력이 따라오지 못하였다. 조선은 명군의 군량 수송이 늦어질 것을 예견하고 전국의 요지에 군량 보급창을 지정하고 먼저 조선의 쌀로 군량미를 대용하되 경기도와 충청도의 쌀을 전라도와 경상도로 보내고, 평안도와 황해도는 그 곳의 쌀을 충청도와 경기도로 수송하고 펑안도와 황해도는 명군이 국경에 가져다 놓은 미곡을 대신 받는다는 개념의 군량 조달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보급전략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군이 결전을 위하여 일제히 남쪽으로 부대를 이동한 때는 추운 겨울철이었기 때문에 군량미를 명군이 주재하고 있는 경상도와 전라도로 때맞추어 수송하기 어려웠고 또 강과 바다가 얼어 수운에도 큰 차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정유재란 때는 일본군이 조선의 곡창인 전라도와 충청도를 먼저 노리고 쑥대 밭으로 만드는 바람에 兩湖에서는 군량을 거의 공급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경기도와 황해도ㆍ강원도 등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쌀과 콩을 우선적으로 명군에게 주는 바람에 조선군에 대한 보급은 임진왜란 때와 마찬가지로 신경을 쓸 수 없었다.

 

 2) 징병과 축성 사역

 

 4년의 휴전기간 동안 조선은 나름대로 전쟁준비를 하였다. 중요한 대책은 군사훈련과 전략적 요지에 산성을 쌓거나 또는 수축하는 일이었다. 왜란으로 온 강토가 황폐화되고 많은 사람이 죽어 인구가 크게 줄었는데 성을 쌓기 위하여 인부를 뽑고 훈련시킬 군사를 새로 선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597년(선조 30) 3월 정유재란 직전 충청감사 김시현이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다. 도원수의 지시로 군사를 할당하여 뽑아가는 일과 산성을 수축하기 위하여 인부를 동원하고 그들이 먹을 식량을 운반하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난리를 겪은 뒤로 백성들이 죽거나 흩어져서 백성들이 희소한 것은 각 도가 비슷합니다. 본 도에서도 얼마 되지 않은 人丁마저 정군이나 잡색군에 뽑혀가고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은 수군이나 격군으로 뽑혀가 한 도의 남자들이 다 징집되어 누락된 자가 없습니다. 누락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쇠약하여 쓸 수 없는 사람들뿐입니다.”

 

 “전일 군사를 뽑을 때 민간이 소란을 피운 것은 오로지 田結托軍(징병의 숫자를 경지면적에 비례하여 책정하는 것)에서 연유한 것만이 아니고 도내에서 더 이상 뽑을만한 장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득이 민간에서 쌀을 거두어 품삯을 주고 머슴이나 걸인들을 사서 보내 그 수를 채웠는데 한 사람의 값이 쌀 10석이나 되니 백성들은 이미 쌀을 내는데 지쳤습니다. 그런데 삯을 받고 대신 군에 나간 사람들이 도중에서 도망하므로 관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 넣으라고 독촉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산으로 도망가서 숨는 것이 피난 때와 다름이 없어 고을마다 소란하고 마을마다 텅 비어 흉흉한 인심이 마치 성난 파도와 같아 멈춤이 없습니다.”

 

 “최근 도원수는 경상도 淸道의 五禮山城을 쌓는데 필요한 인부 1만 명 중 우선 3천 3백 30명을 오례산성으로 들여보내라는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오례산성을 수축하는데 다른 도의 백성 1만 명을 징발하여 교대시킨다고 하지만 1만 명의 한 달 양식이 3천 석입니다. 충청도는 청도와 가까운 곳이 5~6일 일정이고 먼 곳은 8~9일 일정인데 3천 석의 쌀을 무슨 방법으로 청도까지 운반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 도내에 있는 쌀이 모두 6천 9백여 석뿐인데 비록 온 도내의 쌀을 다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 양식을 수송하기 어렵고, 온 도내의 백성을 다 징발한다 하여도 그 역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금 부족한 군량을 허비하고 지친 민력을 쉬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明의 대병을 접제(接濟)하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명군이 보급을 받지 못하여 굶게 되면 임금을 비롯한 조정의 관리들은 비상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조선군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이 상례였다. 정유재란 시 명군의 보급이 떨어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명군이 군량의 수송에 대한 면밀한 준비 없이 겨울 철에 울산성 전투에 대 병력을 투입한 것인데 명군이 일본군에게 패하자 황급히 서울로 되돌아 온데 있었다.

 

 이에 대한 조선의 대책은 시급히 서울 시민에게 쌀을 일정 량씩 의무적으로 바치도록 하고 각 군ㆍ현의 수령과 감사에게 일정량을 보내도록 지시하는 것이었다. 쌀이 거두어질 동안 당장 백관에 대한 料米의 지급을 중지하고 임금도 끼니를 줄이고 반찬의 가지 수를 줄여 절약한 쌀을 명군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선조는 하루에 두 끼니만 먹고 절약한 쌀과 내탕고에 남아있는 쌀 50석을 명군의 식량으로 보태라고 내어 주었다.

 

 이것만으로 명군의 군량부족을 해결할 수 없었다. 임금을 호위하는 禁軍들도 숫자를 반으로 줄이지 않을 수 없었다. 병조의 지시로 금군들은 두 番으로 나누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자기가 먹을 식량을 준비하여 가지고 상경하라고 지시하였다. 남아있는 금군들 가운데 일부는 급료가 끊기자 걸인처럼 남의 집에서 얻어먹는 자도 생겨났다. 더러는 여러 날 끼니를 잇지 못하자 얼굴에 부황 끼가 가득하여 근무에 나서지 못할 정도였다.

 

 3) 조선군의 고난과 歸休

 

 1598년(선조 31) 10월 22일 병조에서 아뢰었다. 朝官과 禁軍들이 급료를 반납하여 쌀을 받지 못한지가 이미 여러 달이 지났습니다. 禁軍과 廳用官은 모두 지방 사람들로 의지할 곳이 없어서 심지어는 의복과 활과 劍을 팔아 식량을 구하기까지 하니 하루하루를 지내기 어렵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숫자는 지난 달에 비해 겨우 5분의 1정도입니다. 시위하는 중대한 일을 망칠까 염려되니 해조로 하여금 대책을 세우도록 하소서.

 

 서울에 집결한 명군의 식량을 대느라고 조선군에 대한 군량을 지급하지 못하였다. 1598년(선조 31) 6월 병조에서 조선군의 상황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군량부족으로 도망자가 속출하여 金應瑞가 모집한 병사가 8백여 명이나 되었지만 지금은 겨우 1백여 명이고, 高彦伯의 병사도 7백여 명이나 있었지만 지금은 휘하에 병사가 없고 아들과 조카ㆍ친척 몇 명을 데리고 도원수의 진영에 소속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정기룡이 관장하고 있던 병사도 7~8백이었는데 지금은 남아있는 병사가 1백여 명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밖에 성윤문과 권응수가 통솔하고 있는 군대도 마찬가지 사정으로 군대의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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