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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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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야기(9), 조선군의 보급 상황과 백성들의 고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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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야기(9), 조선군의 보급 상황과 백성들의 고난(2)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3. 백성들의 고난

 

 1) 세금의 독징과 식량의 징발

 

  (1) 강제 募粟의 폐해

 

 1592년(선조 25) 여름 의주로 피신한 조정은 명군이 참전할 경우 명군에게 우선 지급해야 할 군량 때문에 노심초사하였다. 조선은 피난길에 몇 달째 백관들의 녹봉을 주지 못하고 있었고 급히 꾸민 행재소에도 식량이 부족하여 위병들까지 감원하고 있는 처지에 있었다. 명군이 조선에 들어올 때 자기들이 먹을 군량을 가져온다고 할지라도 수천 리 먼 길에서 무거운 식량을 가져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선조는 명군의 군량을 마련하는 것이 왜란 극복의 첫 번째 과제라고 보고 합법ㆍ비합법을 따지지 말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쌀을 거두라고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나온 대책이 각 도에 調度使와 募粟官, 檢察使 등을 임명하고 이들을 보좌하는 종사관을 딸려 보내 쌀과 콩을 거두게 하고 또 쌀을 일정량 바치는 자에게 벼슬을 제수하는 납속사목의 제정이었다.

 

 모속업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헌부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사헌부는 각도에 파견된 모속관과 감독관들이 종사관을 데리고 몰려다니며 민가에 들어가 얼마 남지 않은 소량의 식량과 종자까지 모두 긁어가고 심지어는 한 고을씩 나누어 맡아 그 관할 안에서 백성들을 겁박하여 강제로 징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곡식을 모집하는 기관이 너무 많아서 호령이 나오는 곳이 여러 군데일 뿐이 아니라 무식하고 잡스러운 무리들이 왜군이 침입했을 때보다도 더 심하게 식량을 거두어 간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원망과 고통이 심하니 각지에 보낸 관원들을 한 사람만 남겨두고 모두 돌아오게 하자는 것이었다.

 

 정부는 각 도와 군현에 원래의 세금(田稅)을 빠짐없이 거두는 한편 현물로 내던 각종 貢物納을 쌀로 대신 내도록 하였다. 또 각 고을에 모속 할당량을 내려 보내 쌀을 거두게 하는 등 가혹하게 세금을 받아들였다. 농촌에서는 입대와 전사, 명군을 위한 군량의 수송 등으로 인력이 부족한데 기상마저 좋지 않아 임란 이후 작황은 계속 흉작상태였다. 세금의 독징은 늦추어지지 않았고 심지어는 내년 농사를 위한 종자까지 빼앗아가는 실정이었다.

 

 1598년(선조 31) 12월 선조의 명령으로 좌부승지 이상의가 군량 조달상태를 알아보기 위하여 순천에 내려갔다. 이상의는 양호의 여러 고을은 한결같이 조폐되어 들판에 마른 잡초만 눈에 뜨일 뿐 종일 지나오는 길에 인가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군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갖가지 종류의 세금을 내라고 하는데 원래의 田稅 이외에 加米稅ㆍ別收米가 있고 또 戶收米가 있으며 이 밖에 거두어 들이는 명목이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할 수도 없습니다. 또 경리가 설치한 둔전이 고을마다 없는 데가 없는데 무리하게 1마지기에 3석씩을 받기 때문에 원성이 자자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백성들이 달아난다고 복명하였다.

 

 (2) 백성들의 기근과 餓死

 

 1592년은 왜란으로 전 국토가 분탕질 당하여 식량이 소진되고 정부는 세금을 거둘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 해의 가을 농사는 흉년이었다. 이 때문에 1953년 봄부터는 전국적으로 심한 기근이 닥쳤다. 뿐만 아니라 1594년에도 작황이 좋지 않아 연달아 2년 동안 흉작을 맞았다. 이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유리 걸식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굶어 죽는 사람의 숫자도 파악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사자가 많았다. 시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전염병도 돌았다.

 

 1593년(선조26) 4월 안집사 김늑이 조정에 경상도의 실정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다. 일본군이 짓밟고 지나간 경상도에서는 봄부터 기근으로 날마다 죽는 사람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미처 치우지 못한 시체가 길가에 즐비하다는 것이었다. 또 도적들이 일어나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대낮에도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빼앗고 있으며 모든 곡식의 종자기 떨어져 전라도에서 수송해 올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으니 전라도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 종자곡을 급히 보내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아사자가 계속 발생하더니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도체찰사 유성룡이 왕을 따라 몽진하였다가 1년 만인 1593년(선조 26) 4월 말경 왜군이 물러간 서울에 돌아와 보니 모화관에는 백골이 쌓여있고 성중에 죽어있는 인마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 때문에 악취가 길에 가득하여 사람이 근접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서울시내의 건물도 거의 타고 부서져 4~5분의 1정도만 남아 있었다.

 

 선조는 1593년(선조 26) 10월 1일 서울로 들어와 정릉에 있는 임시 거처에 짐을 풀었다. 선조가 피난길에서 서울로 돌아 온지 2개월이 지났는데도 한성부는 아직도 시체를 다 치우지 못하고 있었다. 비변사는 굶어 죽은 시체를 시냇가에 그대로 쌓아 놓아 곳곳에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비어있는 여염집과 외진 곳에 시체를 쌓아 놓았기 때문에 해동이 되면 疫疾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한성부는 비변사의 요청으로 사람을 차출하여 이 시체들을 성 밖의 산기슭에 묻어 주었다.

 

 1593년(선조 26) 겨울은 백성들의 기아가 가장 심한 때였다.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와 황해도, 충청도와 경상도가 기아가 극심한데 다른 곳에서 옮겨온 곡식도 없고 또 백성을 구제할 방책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내년 봄의 종자와 농량도 마련할 길이 없어 민생이 다 죽어 없어지게 되었다는 보고가 꼬리를 물고 올라왔다.

 

 서울에서는 임금을 비롯하여 관원들아 끼니를 절약하여 약간의 곡식을 마련하여 진제장을 열었다. 진제장에는 호조에서 지급하는 곡식이 하루에 15석 씩을 풀어 죽을 쑤어 먹였다. 같은 사람을 계속 먹일 수가 없어 1인당 죽 두 끼만 주었다. 기민들은 많은데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얻어 먹은 기민도 며칠 사이에 귀신의 형상이 되어 죽어갔다. 날마다 도로에 시체를 끌어다 놓는데 그 시체를 다른 굶주린 사람들이 베어내어 가지고 가는 형편이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충청도 공주에서는 의병장으로 순절한 趙憲의 두 아들이 떠돌아다니며 걸식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공주에 머무르고 있던 세자는 공주에도 식량이 없어 기민이 온 고을에 그득하다며 조헌의 아들 소식을 계달하였다. 세자는 두 아들을 불러 위로한 다음 약간의 포목을 주었다. 이어 역시 의병장이었던 이수광과 高敬命, 金千鎰과 沈岱의 처자들도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선조는 비변사에 지시하여 이 사람들을 굶지 않도록 하라고 말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3) 人相食

 

 1593년(선조 26) 가을부터 백성들이 굶주림 끝에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고 심지어는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은 한 두 군데가 아닌 전국적인 현상으로 밝혀졌고 조정의 고위 관리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민들이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는다는 소식은 임금에게도 보고되었다.

 

 1594년(선조 27)년 1월 사헌부는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서 사람들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길가에 쓰러져있는 시체에 살점이 오려져 있을 뿐 아니라 일부의 기민들은 산 사람을 도살하여 내장과 골수까지 먹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사헌부는 도성 안에 이와 같은 변이 일어나고 있는데 형조에서는 이들을 체포하지 않고 있으며 발각된 자도 엄히 다스리지 않고 있으니 포도대장으로 하여금 엄히 단속하도록 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도체찰사 유성룡도 경기도 수백 리 안에 남은 비축이 없어 민생이 마치 길바닥에 고인 물에 모인 물고기 같아서 죽을 날만 고대하고 있다고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또 敬陵과 昌陵 근처에 행인을 잡아먹는 자가 있어 그 옆의 屯田官이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여 책을 세우고 산다고 백성들의 기아 실태를 보고 하였다. 비변사도 요사이 외방에 도둑이 극성하여 재물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산사람을 서슴없이 잡아 먹는다고 보고하였다.

 

 (4) 떼도둑의 횡행

 

 병란이 일어난 3년이 되었다. 백성들은 수많은 종류의 세금을 내고 군량 수송에 동원되고 성곽을 쌓는 등 각종 역사가 너무 많아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였는데 거기에다 심한 흉년까지 들었다.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고 살아갈 일이 막연한 탓으로 도적이 늘기 시작하였다. 각지에는 의병이 둔취하여 있었는데 왜적이 남쪽으로 물러나고 먹을 것이 없었다. 의병들은 대부분 관군에 편입되거나 해산하였는데 일부는 조정이 통제하지 못하는 사이 점차 도적떼로 변하고 있었다.

 

 1594년(선조 27) 3월부터 전국 각지에 떼도둑이 발생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뺏는다는 보고가 계속하여 올라왔다. 경기도에는 여주ㆍ이천ㆍ양지ㆍ음죽에 떼 도둑의 세력이 심하고 충청도에는 속리산 일대에 도둑떼가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라도에는 나주ㆍ남평ㆍ남원 ㆍ광주ㆍ임실ㆍ전주ㆍ김제 지역이 심하고 경상도도 경상 우도 일대에 수백 명씩 작당한 도둑이 횡행한다는 것이었다.

 

 굶주린 백성들은 떼 도둑이 되어 군ㆍ현의 창고를 터는 일이 많이 발생하였다. 순천의 좌수 장예원은 관노 강원ㆍ심원 등과 함께 군량으로 비축한 백미 40여 석을 훔친 후 창고에 불을 지르자 백성들이 관고의 곡식을 다 훔쳐갔다. 심지어는 용산에 있는 군자감창에도 50여 명이 몰려와 창고를 털려고 하다가 파수하는 군사들이 몰려오자 그대로 달아난 일도 있었다. 이안계 라는 말단 관리는 관곡 140여 석을 훔쳤다가 잡혀 사형에 처해졌다.

 

 2) 명량의 수송 및 刷馬와 廚傳의 폐해

  

 (1) 조선관리들에 대한 주전

 

 원래 임진년에 처음 명군이 참전하여 내려올 때에 명의 장병이나 본국에서 차송되는 대소 인원에 대한 주전(廚傳, 숙식과 거마)에 대한 규정을 만들지 않았다. 조선정부는 명나라의 원군을 받아들여 일본군을 몰아내야 하는 입장에서 당연히 명군의 주전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전란이 길어질수록 주전문제가 잔패된 제읍과 연도의 백성들에게 끼치는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전쟁 통에 역졸들이 죽고 도망가고 말을 잃어버리는 등 역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데 역마에 대한 요구는 명군뿐 아니라 조선의 관리들에게서도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났다. 군량의 모집과 수송에 관련된 지시가 폭주하고 전쟁 터에 내려 보내는 군령과 전쟁터에서 조정에 보고하는 일이 끝없이 증가하였다. 특히 서울의 두 역에는 말이 한 마리도 남아있는 것이 없고 역졸들도 거의 죽고 몇 명만 남아있는데 각처에 사명을 띠고 나가고 들어오는 사람과 전송하는 일이 폭주하였다. 할 수 없이 정부는 刷馬를 민간이 내도록 하였다.

 

 兵曹가 명군의 쇄마 요구에 대하여 문제에 제기하였다.

“당초 명군이 나올 때 刷馬에 관한 규정이 없었습니다. 명군에서 요청해오면 형편대로 응해준 것이 그대로 관례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은 왕래하는 명군이 모두 쇄마를 요구하므로 일로의 각 고을이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고 서울의 경우는 폐허가 되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할 수 없이 경기도 인근 고을이 윤번으로 쇄마를 세우는데 한번 명군에게 말을 빌려주면 도로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말을 가진 조정의 관리나 그들의 자제로 명군에게 말을 빼앗긴 자가 셀 수 없이 많은데 이들이 말 값을 윤번을 선 고을에서 받아냅니다. 그 고을에서는 민간에게 말 값을 대신 물리는데 쌀이나 價布로 받아내어 백성들의 원성이 높습니다. 이제부터는 유 총병에게 공문을 보내 명 군도 쇄마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할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명군의 經理衙門과 按察衙門 등에서 날마다 외방으로 발송하는 공문서와 기타 차견되는 관원들과 조선 조정의 승정원ㆍ비변사ㆍ병조ㆍ호조 등의 기관과 각 사에서 시급한 문서를 전달하라는 요구가 많은데 사람이 없어 전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올 정도였다. 심지어는 사헌부는 수행원을 많이 거느리고 다니면서 마구 주전을 득책하는데 마음에 맞지 않으면 사정없이 매를 치므로 열읍의 탕갈과 민생의 怨苦가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漁箭官ㆍ貿易官ㆍ採銀관ㆍ安集使ㆍ진휼관ㆍ鹽鐵官 등에 나누어 파견한 郎官 및 기타 시급하지 않은 差官은 불러들이고 또 각 도에 보낸 어사도 너무 많으니 급하지 않은 것은 보내지 말도록 주청하였다.

 

 (2) 귀국하는 명군에 대한 쇄마

 

 전란이 끝나 자 본국으로 철수하는 명군이 한꺼번에 수 천명씩 서울을 지나갔다. 명군들이 가지고 가는 짐과 무기가 많은데 刷馬를 얻을 수 없었다. 명군들이 서울의 사방 10리 길에서 각 고을의 곡물을 운반하는 말과 들판에서 밭갈이하는 소를 남김 없이 끌고 가버리는 일이 생겼다. 이 때문에 명군에게 줄 군량을 운반할 수도 없고 봄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 백성들을 애태우게 만드는 것은 한번 끌고 간 말과 소는 다시 되돌아 오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명나라의 장수들의 귀국행렬이 잇달아 지자 거기에 소요되는 말과 인부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경기의 여러 고을과 황해ㆍ충청ㆍ강원ㆍ함경도 등에 배정된 우마의 숫자가 7천 6백 필이나 되었다. 우마를 전혀 마련 할 수 없는데도 吏卒 들이 우격다짐으로 독촉하니 백성들이 원망하는 소리가 가득하다고 사간원은 기록하였다. 명군이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평안도 철산의 백성들이 길가에서 호소하였다. ‘말과 소를 모두 중국군에게 빼앗겨 저의 고을은 刷馬의 역이 매우 어렵습니다. 마을은 온통 도망간 집들뿐인데 관에서는 일족에 추징하는 법으로 여전히 독촉하니 관대하게 조처하여주소서.

 

 (3) 명량 수송으로 인한 피해

 생략, 제6회 연재 “조선의 군량미 조달과 수송”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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