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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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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야기(10), 참전 3국의 경제와 군수체계 비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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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야기(10), 참전 3국의 경제와 군수체계 비교(2)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3. 군사 1인당 1일 군량미 소요량 군량미의 조달

 

 1) 조선의 군량미 조달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을 위한 군량미의 조달 총량은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조선군의 공식적인 1인당 1일 급식 정량도 불명이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기간 중 조선의 군사를 精兵(정병)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군사 1만 명에게 1년간 지급해야 할 군량을 약 4만 4천 석으로 보았다. 유성룡의 필요 군량 추정은 군사 1인당 1일 1升 8合을 지급한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가정을 따르면 군사 5만 명이 1년간 필요한 양은 22만 석, 10만 명이 필요한 군량은 44만 석이 된다.

 

 조선군이 군사 1인당 1일 1되(升)를 먹을 경우(1食당 3.3合), 1년이면 360되, 또는 36斗가 필요하다. 조선 石으로 계산하면 1石이 15斗였으므로 1인당 연간 2.4석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따라서 군사 1만 명에 대한 1년간의 군량은 2만 4천 석, 5만 명에 대한 필요량은 12만 석, 10만 명에 대한 군량은 24만 석이 된다. 만약 1인당 1일 소비량을 1.5승(1食당 5合)으로 가정 할 경우 군사 1만 명에 대한 1년간의 필요량은 3만 7천 석, 5만 명에 대한 필요량은 18만 5천 석이 된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정부의 평균 세수는 연간 20만 석이 되지 않았다. 임진란 기간 동안에는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여 세수가 6~7만 석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은 전세수입을 모두 군량으로 사용하여도 5만 명의 군사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계산이 나온다. 따라서 조선은 田稅 이외에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전비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표적인 수단은 收米法(수미법)을 통한 結田作米(결전작미), 身貢作米(신공작미), 공명첩의 판매, 군역을 면제시켜주고 받는 價布의 징수, 징발과 차입, 관리들에 대한 녹봉의 중지와 감봉 등 가능한 방법은 모두 동원하였다.

 

 2) 명의 군량미 조달

 

 명군은 규정상 군사 1인당 1일 군량 소비량을 얼마로 책정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은 본위경제가 시행된 이후 명군은 모든 지출을 은으로 지불하였다. 따라서 군인에 대한 군량과 급여도 돈으로 주었다. 명군은 급여로 월량, 행량 등을 주었는데 월량은 월급과 같은 의미의 급여를 뜻하고 행량은 전쟁지역에 파견되었을 때 받는 수당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명군이 출전시 받는 行糧을 1일 기준으로 하였다. 명군의 출전수당에 해당하는 행량은 명나라의 되(升)로 1일 1升 5合이었다. 따라서 군사 1인당 1년의 행량은 5.5石이 된다. 명군 5만 명의 1년 군량은 명나라의 量器로 27만 5천 석, 10만 명의 1년간 군량 소요량은 55만 5천 석이다.

 

 임진란 기간 동안 조선에 나온 명군이 약 5만 명이었다. 명나라는 조선에서 돈을 주고 군량을 사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명나라에서 군량을 구매하여 조선으로 수송하였다. 요동과 산동에서 조선으로 보낸 명량이 각각 14만 석과 12만 석 도합 26만 석인 것으로 보아 소요량 추산에 큰 착오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정유재란 동안 참전한 명군이 약 10만 이었으므로 이 당시 명이 조선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한 군량은 양곡과 면포ㆍ은자를 합하여 약 50만 석 가량으로 추산된다. 전쟁이 예상보다 일찍 끝났기 때문에 약속한 군량이 모두 조선에 도착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3) 일본의 군량미 조달

 

 전국시대 일본의 군사들은 평상시에 1인 1일 2食(조반ㆍ석반)으로 쌀 5合을 지급하는 것이 상례였다. 수길이 지휘하는 일본군도 평상시에는 1인 1일 2食이 표준이었다. 일본군은 평상시 매 끼당 일본 되로 2.5合의 쌀을 먹었는데 1일 군량미 소요량은 5合이었다. 일본군은 그러나 전쟁 시에는 3食을 하며 하루에 7.5合의 군량미를 소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전시의 일본군 1인 1년간의 소요량은 2.7石으로 추정된다. 일본군 5만 명의 1년 분 군량은 일본 量器로 약 14만 석, 10만 명의 군량은 27만 석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침략을 앞두고 수길의 출전 명령을 받은 일본군 제장들이 준비한 군량은 군사 1인당 1일 5合을 소비한다는 가정 위에서 각 대명 별로 준비하였다. 전쟁 시 임에도 1일 7.5홉이 아닌 5홉을 준비한 것은 수송의 어려움을 감안 하거나 또는 조선에서의 현지조달로 부족분을 채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군은 조선을 점령한 뒤 代官所 행정을 통하여 군량을 조달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4) 조선 石으로 환산한 명ㆍ일의 군량미 소요량

 

 임진왜란 당시 조선ㆍ명ㆍ일은 같은 명칭의 도량형 단위를 사용하였으나 그 실제적인 양은 각기 달랐다. 조선의 1升은 명나라의 양기로는 0.37升(3홉 7작)에 해당하였다. 일본의 양기도 조선 것 보다 커서 조선의 1升은 일본의 양기로 0.45升(4홉 5작)에 해당하였다.

 

 명군과 일본군이 조달한 군량미의 총량을 개략적으로 추정하여 비교를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명군과 일본군의 군량을 조선 석으로 환산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을 합하여 명군은 약 15만 명, 일본군은 약 3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였다고 가정하였다.

 

 명나라는 명군을 위하여 본국으로부터 조달한 군량은 조선 石으로 환산하면 약 1백 만석 정도이고 일본군은 120만 석 정도의 군량을 조달 한 것으로 추정된다. 명군과 일본군은 戰場으로의 군량의 수송이 어려워 상당량의 조선 곡식을 먹었는데 이 부분은 제외하였다.

 

 4. 군량미의 수송방법과 수송루트

 

 1) 조선

 

 임진왜란 때 정부는 조선군 부대에게 군량을 지속적으로 보급해 줄 능력이 없었다. 戶曹가 군량을 대어주어야 하는 공식적 기관이었지만 호조는 명군을 위한 군량 지원과 수송에 온 역량을 집중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주력은 각 도의 관찰사 또는 병마절도사가 이끄는 지방군이었다. 따라서 조선군의 군량은 각 도의 관찰사가 출신도의 부대가 있는 곳에 해당 도민을 동원하여 군량을 지원하고 수송해 주었다. 그러나 부대가 멀리 있을 경우 군량의 수송이 불가능하였다. 결과적으로 임란기간 중 일선에 있는 조선군 부대에게 계속적으로 군량을 공급하여 주는 책임 기관은 없었다고 말 할 수 있다.

 

 2) 명

 

 명나라는 조선에는 미곡시장이 없고 銀이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현지에서의 군량의 구매조달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처음부터 명나라에서 군량을 가져왔다. 명나라는 천진, 산동, 계요, 요동 지방의 미곡 상인들에게서 군량을 사들였다. 사들인 군량은 임금 또는 배 삯을 주고 노동자와 선원을 고용하여 조선으로 수송하였다.

 

 요동지방에서 구입한 식량은 육운하였고, 산동ㆍ천진 지역에서 구매한 양곡은 해로를 이용하여 조선으로 수송하였다. 육운하는 군량은 주로 요동지방의 말과 당나귀, 마차 등을 세내어 의주까지 가져왔다. 의주에서부터 조선의 남쪽지방에 있는 명군 주둔지까지는 조선 백성을 이용하여 등짐으로 날랐다.

 

 정유재란 때부터는 명량을 의주까지 육운하는 양보다 선박으로 대동강입구에 있는 광양진과 강화로 수송하는 양이 많았다. 조선은 강화에는 큰 보급창고를 지어 명량을 저장하였다. 강화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보급기지로 여기서부터 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경상도의 일선으로, 또 금강과 영산강 수로를 이용하여 군량을 전라도의 일선으로 수송하였다.

 

 3) 일본

 

 일본은 각 대명이 자신의 영지에서 받은 연공을 규슈에 있는 나고야(名護屋) 또는 하카다(博多)로 수송하였다. 군량미로 사용할 연공미가 부족할 경우 大名들은 수길의 장입미에서 차입하거나 또는 미곡시장에서 구매하여 조달하였다. 당시 일본은 대판과 같은 큰 도시와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인 나고야와 하카다에는 미곡시장이 발달하여 있었다.

 

 나고야, 하카다로 가져온 쌀은 각 대명이 주선한 수송선으로 일기도, 대마도를 거쳐 조선의 부산포, 구포, 김해 등지에 있는 일본군의 보급창고에 저장하였다. 보급창고에 저장한 군량미는 각 군 지휘관의 청구에 의하여 내주었다. 그러나 부산의 보급창에서 조선 북방에 있는 일선까지의 수송은 각 대명들의 책임이었다.

 

 군량을 일선까지 수송해야 하는 대명은 小荷駄(소하태) 부대를 동원하고 경비병까지 붙여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상주까지 수운한 다음 육운으로 조령을 넘어 충주까지 수송하고, 다시 충주에서 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군량미를 서울 등지로 수송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군이 함경도와 평안도로 진출하면서 병참선이 길어진데다가 남쪽 지방에서의 의병들의 방해로 더 이상의 군량 수송이 불가능해 진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은 전쟁의 계획단계에서는 군량 등 병참물자를 해로를 통하여 조달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서남해를 이용하는 군량 수송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막혀 일찌감치 단념한 상태에 있었다. 임진년 다음 해에 진주성을 공격할 때 일본군은 낙동강과 남강을 이용하여 군수물자를 수송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병참물자를 남해안의 각 왜성으로 수송하였고 남원성을 공격할 때는 선박을 이용하여 남해를 가로질러 섬진강으로 들어와 병력과 군량을 수송하였다. 일본군의 서해안 수송로 이용은 명량해전의 패배로 더 이상은 불가능하였다.

 

 5. 요약과 결론

 

 15세기 동아시아는 명나라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질서 아래에 있었다. 명 황제는 주변 제국과 책봉-조공이라는 군신관계를 맺고 책봉국의 왕이 보내는 조공단에게만 무역을 허가하였다. 명 황제는 국내에 대해서도 민간인의 대외무역과 도항을 금지하는 海禁정책을 채택하였다. 이는 명나라가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16세기에 들어와 포르투갈ㆍ스페인의 상선이 명나라에 도래함에 따라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도전을 받게 되었다. 서양 상인들과 명나라의 해적, 일본의 왜구들이 명나라의 상인들과 밀무역을 함에 따라 남미와 일본의 은이 다량으로 중국에 들어왔다. 은이 필요한 명은 해금을 철폐하고 서양인들과의 무역을 허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이 주도하는 무역질서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이 과정에 편승하여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거부하고 명을 정복하려는 꿈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결국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국제전이었다. 참전국은 조선, 일본, 명나라의 3국이었지만 식량과 무기를 대준 나라까지 포함하면 琉球, 포르트갈, 기타 동남아의 여러 나라까지 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유구는 임란 직전 수길의 협박에 못 이겨 군량미 약 1만 석을 일본에 대주었다. 일본은 전쟁기간 중 조총에 반드시 필요한 화약 원료인 초석과 탄환 제조에 필수적인 납을 포르투갈, 동남아 등지에서 구입하였다. 천주교 신자였던 소서행장은 포르투갈의 동양 선교책임자였던 자비에르에게 군종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자비에르는 세스페데스((Cespede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는 조선에 도착하여 일본군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였다.

 

 명나라도 포르트갈 인들이 가져온 최신식 대포인 불랑기포를 사들여 평양전에서 큰 효과를 보았다. 명군은 원래 다민족 군으로 구성되었다. 한족은 물론 여진족, 몽고족, 묘족, 그리고 남방의 여러 소수민족이 참가하였다.

 

 명군에는 흑인병사까지 참가하였다. 선조 31년 선조가 유격장군 팽신고의 처소에 갔다가 波浪國(파랑국) 출신의 흑인병사를 보았다. 팽신고는 선조에게 파랑국이 어디인지 설명하였다. “조선에서 바다 셋을 건너면 호광에 이르는데 호광의 남쪽 끝에서 15만 리를 가면 그 나라에 이릅니다. 파랑국 사람들은 조총을 잘 쏘고 여러 가지 무예를 갖고 있습니다.” 파랑국은 불랑국으로 보이는 데 흑인 병사들은 포르투갈인들이 데리고 온 노예인 것으로 짐작된다. 명군 가운데 苗族(묘족)과 㺚子(달자) 군사들은 성질이 사나워 조선사람들이 기피하는 대상이었다.

 

 참전국이 사용한 화폐는 銀이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초기에는 은을 사용하는 습속이 없었으나 명군들이 은을 가지고 있어 점차 은이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정유재란 때부터는 조선에서도 은이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당시 일본은 세계에서 남미의 볼리비아 등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銀을 생산하는 나라였다. 16세기 말 전세계의 은 생산량은 연간 약 60만kg이었는데 일본이 약 20만kg을 생산하였다. 일본의 은은 대부분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의 손을 거쳐 중국과 동남아로 흘러 들어갔다. 일본은 남만무역을 통하여 새로운 무기와 화약을 비롯하여 중국과 구라파의 진기한 물건을 사들였다.

 

 명나라도 임진왜란에 참전하면서 군인들의 급여를 마련하고 군량을 사들이는 한편 무기를 주문하는데 막대한 양의 은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명나라에서 은의 수요가 커지자 남미에서는 은의 증산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고 이는 부족한 광산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아프리카로부터 노예수입을 더 늘렸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즉 조선에서의 전쟁은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더욱 번성하게 하는데 일조를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경제는 자급자족 단계에 있었다. 성종 때 전라도 지방에 처음 장시가 생겨나서 빠른 속도로 퍼졌으나 이것이 농본주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여 관에서 단속도 심했다. 임진왜란 기에는 전쟁중인 탓에 시장이 활성화 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많은 양의 군량미를 조달할 수 있는 미곡시장도 없었다고 보아 진다. 이에 비해 명나라와 일본은 가내공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각종 전문시장이 있었다.

 

 명과 일본은 미곡시장, 무기시장, 기타 군복과 군용 신발을 만들고 파는 시장이 존재하였다. 일본의 종군상인은 대명 별로 따라다닌 것으로 보인다. 울산성 전투 때 가등청정 군을 따라온 일본의 종군상인들이 굶어서 다 죽게 된 병사들에게 쌀과 물을 비싼 값으로 팔아 말썽이 된 일도 있다. 명군도 종군상인들이 부대를 따라다니며 술과 고기, 의복과 신발 등을 팔았다. 명나라의 상인들은 요동지방에서 수백 마리의 당나귀를 전세 내어 각종 물건을 싣고 조선에 들어왔다. 이들은 명군이 받는 염채은 등을 표적으로 삼았으나 나중에는 조선사람과도 은으로 거래를 하였다.

 

 조선은 원래 良人皆兵(양인개병)의 원칙이 있어 양인과 士族은 모두 국방의 의무가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양반은 모두 군역에서 빠졌다. 군역을 지지 않는 노비의 수만 늘어났다. 노비는 사유재산으로 상속과 매매가 가능하였고 양반들은 대 농장을 노비를 시켜 경작하고 밖에 사는 노비들에게는 돈을 벌어 바치도록 하였다. 양반들은 노비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양반들은 사유재산을 불리기 위하여 노비의 숫자를 늘리는 데 관심을 두었다. 奴婢從母法(노비종모법)을 악용하여 양반들은 양인 남자를 자기의 여자 종과 살도록 한 다음 그 소생은 다 노비로 삼았다. 노비의 숫자는 계속 증가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노비의 숫자가 전 인구의 40~50%였다는 연구도 있다. 조선의 관노비의 숫자만도 1484년에 35만을 헤아렸다. 관노비는 1655년경에 19만으로 줄었다.

 

 조선의 건국이념은 유학사상이었고 유학은 重農主義 사상에 입각하여 상ㆍ공업의 발달을 억제하였다. 해외무역은 처음부터 개념이 없었다. 조선은 농업 이외에 稅收의 대상이 없었다. 반면에 일본은 상ㆍ공업이 발달하고 남만과 무역을 통하여 새 상품과 지식을 받아들였다. 일본은 상공업과 광업의 발달을 장려하고 금ㆍ은의 생산에도 노력하였다. 일본은 당시 국제 화폐였던 은을 충분히 생산ㆍ비축하였다. 명나라는 자본주의의 맹아기에 들어섰다고 할 만큼 농업과 상ㆍ공업, 해외무역이 골고루 발달하였다. 명나라는 상비군을 3백만 까지 유지할 수 있는 강대국이었다.

 

 일본은 석고제를 통하여 군사의 동원과 병참능력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지내는 동안 병사들은 강한 전사로 단련되고 지휘관들의 전술능력이 제고되었다. 또 상비군 제도를 정착시키고 군 부대를 새로운 개념의 전술부대로 개편하였다. 일본과 명은 서양과의 국제무역을 통하여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수용하였다. 조선은 자급자족의 경제 단계에 있었으며 외교적으로는 명을 제외하고 쇄국상태에 있었다. 일본과는 144년 간 왕래가 없었다.

 

 임진왜란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요인은 군사의 수보다도 병참능력이었다. 참전 3국은 수 십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7년 간을 싸웠다. 전쟁은 조ㆍ명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전투에서는 분명한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다. 명과 일본은 각각 자국에서 상당량의 군량미를 수송하여 왔다. 명나라는 압록강 국경지역에 일본군은 부산포를 중심으로 낙동강 하구에 군량미를 적치하였다.

 

 조선은 높은 산과 하천이 많아 우ㆍ마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망이 없었다. 말 한 필이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에서는 예부터 마차대신 수운과 해운을 이용하여 무거운 짐을 운반하였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과 명은 조선 백성을 시켜 등짐으로 군량미와 기타 군수물자를 운반하였다. 일본군은 해로를 이용한 병참을 계획했지만 이순신의 조선수군에 막히자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점령지 행정을 통하여 군량을 조달하고자 하였으나 이것도 실패하였다. 일본군은 육로 수송도 시도하였으나 병참선이 너무 길어져 있었다.

 

 인력에 의한 병참물자의 수송은 느리고 중간의 손실도 많았다. 그나마 사역시킬 수 있는 백성들이 적어 군량미의 수송은 지지부진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군ㆍ명군ㆍ일본군 모두 군량부족으로 굶는 날이 많았다. 일본군의 소서행장이 평양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한 것도, 평양성 전투에서 패전하고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철수한 것도 군량부족이 원인이었다. 명군도 임진왜란 다음 해에 강화가 정식으로 성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철수한 것은 군량의 접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조선군은 군량이 떨어지면 해산하기 일수였다. 조선에서 3국의 군사들에게 군량을 이어대지 못한 것은 수송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조선의 국력이 강하였던 성종 때 여진정벌을 도중에서 그만 둔 것도 군량의 수송능력 때문이었다. 조선은 1491년(성종22) 함경도 북단 국경 밖에 사는 여진족 兀狄哈(올적합, 우디캐)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자 이들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였다. 성종은 도원수에 許琮(허종)을 임명하고 군사 4만 명을 동원하고 이들에게 3개월 분의 군량 쌀 4만 8천 석을 보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가져간 군량은 군사 각자가 휴대한 건량 15일분 뿐이었다. 15일분의 군량가운데 9일 분을 소비하자 조선군은 원정 도중에 회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획했던 군량은 충주의 가흥창, 원주의 흥원창, 춘천의 소양강창에서 공급하기로 하였었다. 이 계획은 조선의 중부지방에서 함경도 끝 국경지방까지 수송이 어려워 성사되지 못하였다. 내륙을 통한 군수물자의 수송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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