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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9.04.09
제목
문틈으로 본 조선 이야기(2), 진상 고등어 잡이 모습과 그 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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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틈으로 본 조선 이야기(2) 
 

진상 고등어 잡이 모습과 그 애환

 

   

 

하상(夏祥) 이두순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진상(進上)은 ‘진귀한 물품이나 지방의 토산물 따위를 임금이나 고관 따위에게 바치는 것’이며 진봉(進奉)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진상을 하는 물건 즉 진상물, 진상품이란 것이 국어사전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귀한 물건만은 아니었다. 임금을 비롯한 왕족들의 일상생활에 쓰는 온갖 물품이 진상이란 명목으로 농민, 어민들에게 부과되었고, 그 과정에서 백성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진상물에는 귀한 물품도 있었지만, 궁중에서 필요한 쌀, 물고기, 젓갈 등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식품까지 진상되었다. 백성들은 무상으로 진상물을 바쳐야 했고, 진상 과정에서 관리들의 착취에 힘들어했다.  

 

  조선후기의 문인 조재호(趙載浩, 1702~1762)는 ‘어촌 10절’이란 시에 바다에서 도어(刀魚)를 그물로 잡는 어촌 풍경을 묘사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백성들이 겪는 애환을 들려준다. 한자이름으로 도어라고 불리는 물고기는 여럿이다. 갈치, 웅어, 꽁치, 싱어, 고등어가 도어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선 갈치가 낮에 잘 잡히지 않고 또 시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그물로 포획하지는 않는다. 웅어도 도어라 불리지만, 웅어는 산위에서 움직임을 관찰할 정도로 큰 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꽁치와 고등어는 큰 떼를 이루어 움직여서 큰 그물로 대량 포획을 하는 어종이다. 시에서 묘사한 것처럼 산위에서 그 물고기 떼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그래도 더 씨알이 큰 고등어일 것이다. 시인도 첫 수에서 고도어(古刀魚), 즉 고등어라고 표기하고 있다. 바닷물고기 가운데 많이 잡히는 흔한 고등어도 진상물이었던 것이다.

 

 

<어촌의 10가지 풍경을 읊다>

어부들이 그물을 치고는,

푸른 바다에 배를 세운다.

어젯밤에 큰 비 오더니,

고등어가 봄물에 올라온다.

(어부들이 말하기를 고등어가 올라오면, 여러 사람이 배에 타서 그물을 치고, 나머지는 언덕에 올라 고기떼를 찾는다고 한다.)

<漁村十絶> 趙載浩(1702~1762, 損齋集卷之一)

漁人理漁網, 維舟碧港裏. 昨夜金剛雨, 刀魚上春水.  

漁人言古刀魚上來, 數人乘舟載網, 餘人登岸望魚. 

  

위쪽 언덕에서는 고기떼를 살피고,

아래쪽 배에서는 바쁘게 노 젓는다.

노를 저어 어느 쪽으로 가는가,

갈매기 떼 시끄럽게 우짖는 물가이다.

(고기떼가 있는 곳에는 물새들이 모여 우짖는다.)

上岸候魚陳, 下舟急搖枻. 搖枻向何處, 海鷗噪水際.

魚隊在處, 海鳥羣噪.

 

저녁 되어 뱃노래 부르며 돌아오는데,

물고기를 얼마나 잡았는지 알만하다.

아녀자들은 다투어 손뼉을 치는데,

흰 기가 석양에 펄럭인다.

(어촌 풍속에 물고기를 많이 잡으면 흰 깃발을 배에 올린다.)

向晩棹歌歸, 得魚知多少. 女娘爭拍手, 白旗翻夕照.

津俗多得魚, 豎白旗船上.

  

고등어를 많이 잡아 기쁘기는 하지만,

그만큼 관가에서 징수하는 것도 급하네.

물고기를 세어 임금님 수라간에 진상하는데,

잘 보아 달라고 바치는 돈이 이십 꿰미일세.

(한번 진상하는데 인정을 쓰는 돈이 20꿰미, 돈으로는 20냥인데, 일 년에 14차례 진상한다.)

縱喜多得魚, 其如官稅急. 數魚供天廚, 情緡滿二十.

一進上情錢二十兩, 一年進上十四次.

1백전이 한 꿰미로 1냥과 같다(정약용, 「아언각비」).

  

한 번 진상에 인정 돈이 스무 꿰미이고,

일 년이면 삼백 꿰미가 된다.

또 각 영에 바치는 관납이 따로 있어,

파산을 해도 그래도 부족하다.  

一供二十緡, 一歲滿三百. 又有營官納, 破產猶不足.

 

한 집이 파산해버리면,

다른 한 집은 세금을 두 배로 내야한다.

그래서 어촌의 호구들은, 열 집에 한두 집이 비었다.

一家旣破產, 一家兼二稅. 所以漁津戶, 十戶無一二.

  

가죽이 벗겨지니 터럭 어찌 남으랴,

이 일은 불보는 듯하다. 현명한 태수가 있다 한들,

헛되이 탄식할 뿐이네.

皮盡毛安傅, 此事明如燭. 縱有賢太守, 况也空歎息.

  

진상은 중요한 것이라 매번 말하면서,

낮은 관리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어찌 감영에 알리지 못하는가,

관찰사 나리가 들을 수 있게.

每稱上供重, 小官不敢言. 何不報營門, 方伯以上聞.

● 營門: 조선시대 감영(監營)이나 군영(軍營)의 문.

  

관찰사는 자기 일만 중히 여겨,

역시 감히 말하지 않는다.

상하가 모두 정해진 법에 의하고,

각자가 그 사사로움에 따를 뿐이다.

方伯重事體, 亦言不敢爲. 上下依文法, 各自便其私.

● 方伯: 도의 관찰사, 감사. 事體: 일의 이치와 당사자의 체면, 사태.

  

관찰사도 상서하기를 망설이니,

더더구나 고을 수령이야.

누가 어촌의 참경을 능히 그려서,

구중궁궐 임금께 고할거나.

監門猶上書, 况是字牧官. 誰能畫漁戶, 奏獻九重關.

● 監門: 문지기. 시에서는 감영의 문지기, 감영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字牧: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린다는 뜻에서 수령을 字牧官이라 한다.

  

 

 봄철이 되고 큰 비가 내린 후 고등어 떼가 연안으로 몰려온다. 어부들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고등어 떼가 연안 가까이 붙기를 기다리며 그물을 칠 준비를 하고 있다. 뭍에 남은 어촌 사람들은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먼 바다를 바라보며 고등어 떼를 찾고 있다.  

 

 높은 언덕 위쪽에 서있는 사람들은 고등어 떼가 일으키는 물결을 살펴보고 있다가 고기떼를 발견하면 그물을 놓기 적합한 시간을 배에 신호한다. 신호에 따라 배들은 바쁘게 노를 저어 고기떼 쪽으로 다가간다. 배가 가는 곳에는 고등어가 이미 바다 표면에 떠 있고, 갈매기를 비롯한 물새들이 우짖으면서 날개를 펄럭이며 고등어를 채가고 있다.  

 

 마치 가덕도의 숭어잡이와 같은 광경이다. 남해바다 가덕도에서는 3~5월 숭어가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길목에 그물을 쳐놓는다. 어로장이 산 위 망루에서 망을 보고 있다가 숭어 떼가 그물 안에 들어왔을 때, ‘후려라’라고 지시하면 6척의 소형 무동력선이 그물을 들어 올려 잡는 전통 어로방식이다.  

 

 해가 저물녘이 되면 고등어 잡이를 끝내고 귀항하게 된다. 배에 흰 풍어기를 펄럭이고 있기 때문에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던 아녀자들은 만선임을 알고 환호성을 올린다. 그러나 이것으로 고등어 잡이가 끝난 것은 아니다. 오늘 잡은 고등어는 진상품으로 바쳐야 한다. 임금님과 귀족들의 식사에 쓸 진상품이기 때문에 관리들이 벌써 와서 진상할 숫자를 세고 있다.

 

  진상으로 그냥 바치는 것도 억울한데 고등어 숫자가 부족하다, 크기가 작다 트집을 잡는다. 무사히 진상을 끝내기 위해서는 관리들에게 뒷돈 즉 인정돈[人情債]이란 뇌물을 쓴다. 한 번 잘 봐 달라고 바치는 돈이 엽전으로 20꿰미, 20냥이란다. 1년에 14번 진상물을 바치기 때문에 고등어 잡이 1년에 인정 뒷돈을 뜯기는 돈만도 3백 꿰미나 된단다.  

 

 이처럼 진상이나 공물에 추가되는 비용이 배보다 배꼽이 되어, 인조14년 실록에, “손에는 진상을 들고 말에는 인정물(人情物)을 싣고 간다는 속담이 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1636년 2월 10일). 속칭 ‘인정돈’은 공공연한 사실로 정조 임금은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다.  

 

 “진헌(進獻)하는 어물을 봉납할 때에, 영속(營屬)들이 퇴짜를 놓고서 물종(物種)을 미리 준비하고는 값을 높여 방납(防納)을 하니 결국에는 폐해가 어민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곧 해안지역 폐해의 일단이니, 반드시 도백(道伯)과 상의하여 엄히 신칙하라(홍재전서).”  

 

인정채는 진상물을 직접 수거하는 지방에서도, 그리고 위 단계인 도에서도 거의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었고, 백성 입장에서 보면 세금과 차이가 없었다. 어부들이 사는 고을관아에서만 진상 고등어를 거둬가는 것이 아니다. 인근에 있는 병영(兵營)과 수영(水營)에서도 따로 진상물을 거둬간다. 고등어 잡이는 만선으로 대풍어였지만, 이리저리 뜯기고 나면 어부들은 남는 것이 없고 파산하게 된다.  

 

 진상품과 인정돈은 마을 전체에서 부담해야 한다. 그래서 한 집이 파산해 버리면 그 세금은 다른 어부에게 전가된다. 이렇듯 심하게 수탈을 당하면 그 부담을 견디다 못해 어부들이 도망가고, 어촌 마을이 비게 되는 것이 불 보듯 당연한 결과다. 아무리 고을 수령이 선정을 하려해도 상황이 이러니 헛되이 탄식만 할 뿐이다.  

 

 어촌 사정이 이렇게 혹독한데도 관리들은 진상은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감히 어촌의 사정을 높은 곳에 알리지 않는다. 진상물은 각 고을에서 모아서 도 감영에 바치고, 관찰사가 다시 한양으로 보낸다. 고을 관리들이 어촌 사정을 알고는 있지만 감영에 있는 관찰사에게 알리지 못한다. 관찰사도 어촌의 사정을 알고는 있다. 그러나 관찰사도 자기 책임만 면할 생각으로 입을 봉하고 있다. 위아래 관리들이 정해진 진상제도만 지키면서 자기 자리보전에만 신경을 쓴다. 

 

 이렇듯 도의 책임자인 관찰사도 임금님께 현지 사정을 전하기를 망설이니, 고을의 작은 관리들이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시인은 탄식한다. 그 누가 어촌의 이 참경을 그림 그리듯 낱낱이 적어서 구중궁궐 깊숙이 앉아 백성들 사정을 모르고 있는 임금께 고할거나 하면서.  

 

 어촌 실정을 그린 ‘그림’은, “정협(鄭俠, 1041~1119)은 송나라 사람으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의 폐단을 진술하였고, 굶주림에 지친 유민들을 보고 그 실태를 그림으로 그려 신종(神宗)에게 올리니 신종이 이를 보고 법을 폐지했다.”는 중국 고사와 관련이 있다. 시인은 꼭 그림이라서가 아니라 현실을 왕께 알리는 소신 있는 사람의 출현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 시인 조재호(趙載浩, 1702~1762)는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대(景大), 호는 손재(損齋)이다. 1739년(영조15)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천거로 세자시강원에 등용되었다. 그 뒤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있으면서 춘당대시(春塘臺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승지로 특진되었고, 경상도관찰사와 이조판서 등을 거쳐 1752년 우의정이 되었다. 저서로 손재집 15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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