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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1
제목
문틈으로 본 조선이야기(10),몽고에서 소를 수입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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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틈으로 본 조선 이야기(10) 
 

몽고에서 소를 수입한 이야기

 

   

 

하상(夏祥) 이두순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전편 이야기(9)에서 기술하였듯이 조선시대에도 소 전염병은 고질적이어서 중종시대부터 영조시대까지 200여 년간 발병과 처분에 관한 기록이 44번이나 나와 있다. 특히 병자호란(1636.12~1637.1)이란 큰 전쟁을 전후한 시기, 조선에 소 전염병[牛疫]이 크게 발생하였다. 우역 발생이 매우 심해서 평안도 지역의 소가 괴멸상태였고, 전국적으로 우역이 확산되었다. 소가 논밭을 갈고 짐을 운반하는 핵심 수단이었던 시대에서 소가 부족하면 농업자체가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조선 조정에서는 외국에서 소를 수입하기로 결정한다.

 

  당시의 주요 우역 발생 상황이다.

○ 1636년: 평안도에 우역이 크게 번져 살아남은 소가 한 마리도 없다(인조14년 8월 15일).

○ 1636년: 우역이 치성(熾盛)하여 서쪽에서 남쪽으로 번지고 경성에도 죽는 소가 줄을 이으니 소 값이 갑자기 떨어지고 살아 있는 것은 도살하였다(인조14 년 9월 21일)

○ 1636년: 황해도와 평안도[西路]에 우역이 크게 치성하여 열 마을에 한 마리의 소도 없었다. 조정이 소를 사서 보낼 것을 의논하였다(인조14년 10월 12 일).

○ 1637년: 우역이 크게 치성하여 한 마을에 한두 마리도 없으니, 이는 매우 좋지 않은 일입니다(인조15년 4월 17일).

 

 이러한 상황에서 소를 외지에서 구입하자는 논의가 조선조정에서 나왔고, 실제로 소를 몽고에서 들여온 것이다. 몽고 소의 수입 경과를 살펴본다.    

 

 인조15년에 제주에서 소를 들여오는 것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지난번 비국에서 이미 아뢰었으므로 제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사 오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1637년 10월 5일). 같은 날 기록에, “대마도에서 소를 사 오는 일도 비국 당상 1인으로 하여금 전담하여 시행하게 하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다. 같은 해에 예조의 공식문서를 작성하여 역관 홍희남을 대마도에 보내겠다는 비변사의 청이 있었다(1637년 10월 17일). 그러나 대마도에서 소를 가져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 제주도에는 우역이 번지고 있어 제주 소의 도입도 어려운 사정이었다.  

  부족한 소는 북방지역에서 구입해 왔다. 인조15년에 비변사에서 몽고지방에서 소를 사오자는 청이 있자 왕은, “나라가 불행하여 우역이 있지 않은 곳이 없어 거의 절종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실로 절박한 재앙이고 더할 수 없이 큰 근심이다. 내년이 지난 뒤에도 마련해 낼 곳이 없으니 비록 농사철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넉넉한 숫자를 사와서 앞으로 경작하고 번식시킬 바탕으로 삼으라.”고 하였다(1637년 12월 14일).   

  몽고에서 소를 무역해 온 것에 대해 인조15년 실록에는, “비국랑(備局郞) 성익(成釴)을 보내어 몽고 땅에서 소를 사 오게 하였다(1637년 12월 14일).”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인조15년 승정원일기에는 몽고지방에서 소를 사는 일 등에 대해 보고하는 상세한 비변사의 장계가 수록되어 있다(1637년 12월 14일).

 “몽고지방에서 소를 사는 일을 지금 막 처리하려는데 저쪽의 사정을 자세히 안 다음에라야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사은사(謝恩使)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만 이미 초생(草生)을 시기로 삼았는데 초생의 때는 3, 4월 동안입니다. 미리 값을 보내서 모춘(暮春, 늦봄)에 맞춰 사 오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수 천리 밖에서 오느라 소를 분배할 즈음에는 농사철이 지났기가 쉬우니 바로 멀리 있는 물이 가까이에 생긴 화재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들으니 저쪽의 소 값이 자못 높다고 하니 비록 자세히 다 알 수는 없으나 대개 계산해 보면 수천 금(金)을 가지고 가더라도 사는 숫자는 필시 많지 않을 것입니다.   

 또 저들이 취하는 것은 청서피(靑黍皮), 청포(靑布) 등의 물건인데, 청포는 저축되어 있는 것이 한계가 있고 청서피는 칙사의 행차가 사가는 바람에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지금 비록 사서 얻는다 하더라도 필시 넉넉하지 못할 형편입니다. 설혹 넉넉한 숫자를 찾아 보낸다 하더라도 장차 저들이 욕심낼 길만 열어 줄 것이니 뒤에 어떻게 이어 댈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심양의 쇄마(刷馬)도 오히려 어려운데 더구나 심양을 지나서 절원(絶遠)한 곳에 있는 것이야 더 말할 것 있겠습니까. 면포(綿布)나 지지(紙地, 한지)나 지삼(枝三) 등의 물건을 운송할 때 쇄마를 요구하여 대기시키는 것은 일이 심히 쉽지 않고 필시 농사철에 미치지도 못할 소를 얻기 위해 다소의 물력(物力)을 다 써서 저들이 욕심낼 길만 열어 놓고 뒷날의 폐단을 증가시키는 것은 사의로 헤아려 볼 때 득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도록 허락하였으니 사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각종 가물(價物)을 적절히 처리하여 때에 다다라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심양의 쇄마의 값은 이미 일체 같다고 하였는데 심양을 지나는 값이 몇 배 될 것이니 필경 열댓 마리의 말만 보낸다 하더라도 가격이 무명 십 수동(同)을 밑돌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말해 보건대 차라리 말을 사서 보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마부(馬夫)는 황해도와 평안도로 몫을 나누어 정해서 보내게 하고 별도로 길러 보호하도록 하며 나온 뒤에는 구입한 말을 양서의 역에 분급하면 쇄마에 대해 값을 소비하는 폐단은 없고 길이 공적으로 쓸 것으로 삼게 될 것이니 또한 양쪽으로 편하게 될 것입니다. 무역을 그만둘 수 없으면 이대로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한번 몽고와 말을 무역하는 일과 같이 하면 뒷날 몽고가 트집 잡아 말하여 왕래하며 무역하자는 폐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재력이 탕진되었으므로 멀리 몽고에서 사지 못한다고 말하고 심양에서 약간의 소를 사 얻는다면 현재의 허비가 없을 수 있고 또 뒷날의 환난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뜻이 이와 같으므로 감히 성상의 재결을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나라가 불행하여 우역이 있지 않은 곳이 없어 거의 절종(絶種)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실로 절박한 재앙이고 더할 수 없이 큰 근심이다. 내년이 지난 뒤에도 마련해 낼 곳이 없으니 비록 농사철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넉넉한 숫자를 사 와서 앞으로 경작하고 번식시킬 바탕으로 삼으라. 굳이 지나치게 의심하고 염려하여 백성의 먹을 것을 궁핍하게 할 필요가 있는가. 또 이 일은 황제의 특명에서 나온 것이니 우리나라에서 말한 것과는 또한 차이가 있는 듯하다. 말을 사는 일은 매우 편리하고 좋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 같은 과정에서 몽고에 상단을 보내는 내역이 실록기사에 구체화된다.

○ 인조16년 1638년 1월 4일자 기사

“지금 몽고지방에서 무역해 오려고 합니다. 신이 소 값이 가장 헐한 곳에 가서 사오라는 뜻으로 차인(差人)에게 말해 놓았습니다.”

○ 인조16년 1638년 1월 11일자 기사

소를 무역하러 가는 성익을 한관(閑官)으로 바꿔 차임할 것을 청하는 형조의 계가 있었고, 인조가 허락한다.

“본조의 좌랑 성익이 소를 무역하는 일로 먼 곳에 나가는데 오가는 시일이 얼마나 걸릴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성익을 한관으로 바꿔 차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638년 5월 성익이 이끈 조선 무역 상단이 몽고에서 사온 소가 조선 의주에 도착하였다. 그 기록은 두 번으로 나누어져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 인조16년 1638년 5월 6일,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성익이 사들인 소를 먼저 보내온 것이 53마리이고, 또 25마리를 보냈는데, 청천강(淸川江) 이북 각 읍에 헤아려 나누어 주고 계문하게 하고, 나중에 운송해 올 사들인 소는 의주(義州)에 남겨 두었다가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라는 뜻으로 평안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인조16년 1638년 5월 23일, 역관 조효신이 인솔해 온 소는 청남 각 고을에 나누어 준 뒤에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는 비변사의 계가 있었고 왕이 허락한다. “성익이 사들인 소 가운데 먼저 보낸 71마리를 평안도 청천강 북쪽[淸北]의 각 고을에 먼저 나누어 주도록 재가를 받아 통지하였습니다. 나중에 조효신(趙孝信)이 인솔해 온 36마리는 청천강 남쪽[淸南]의 각 고을 중에 특히 소가 없는 곳에 균등하게 나누어 준 뒤에 똑같이 보고하도록 평안감사에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638년에 성익을 중심으로 한 소 구입 상단이 몽고에 가서 소를 구입해 돌아온 것이다. 성익의 몽고 원정 내용을 상세히 살펴본다.

 우선 소 구입지의 결정이다.

 내륙은 물론 제주에까지 우역이 번져 외국에서 소를 수입하는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교역 당사국으로는 일본이 먼저 검토되었는데 일본은 해운 운송에 어려움이 있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조선에서 소를 수입하는 나라였고, 당시 중국 심양의 소 가격은 한 마리에 은자30량이라는 고가였다. 조선소와 같은 북방계 소를 키우고 값이 비교적 저렴한 몽고에서 육로를 통해 수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몽고 소를 구입하기로 결정된 인조15년은 병자호란(1936.12~1937.1)이 있은 직후였다. 중국지역을 경유해서 몽고 소를 수입하는 데는 청나라와의 조심스런 교섭이 필요했다.

 

  몽고 원정대의 인원이다.

 승정원일기에는 낭청 성익(成釴), 출신(出身) 김경신(金景信), 역관 조효신(趙孝信) 3명만 실명이 밝혀져 있다. 성익은 비변사(備邊司) 낭청(郞廳)으로 무과출신이었고 조효신(趙孝信)은 역관이었다. 김경신(金景信)은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과거 잡과에는 급제하고 보직을 받지 못한 상태인 역관으로 보인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심양일기(瀋陽日記,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에 볼모로 있을 때의 상황을 세자시강원에서 정리한 일기)에는 소 무역상단에 이형장(李馨長), 정백란(鄭伯鸞)이란 사람이 더 동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심양 현지에서 합류한 역관으로 보인다.   

 1937년 12월 14일자 승정원일기에 ‘십 수필’의 역마를 사서 보낸다고 하였으니, 마부가 10명 이상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심양장계에는 상단의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서 심양관소(瀋陽館所)에서 수레 11량을 공금으로 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험지로 가는 여행인 만큼 호위병도 동행하였을 것이다. 청나라에서 장수[淸將] 4인과 청나라 사람 40인이 상행에 동행했다고 하니(심양장계, 1638년 4월 17일) 대규모의 상단이었다. 동행한 청나라 장수 외의 청나라 사람 40인이 상단을 돕기 위한 인력이었는지, 아니면 별도의 청나라 소 구매인력이었는지는 확실히 밝힌 자료는 없다. 청나라 장수라는 표현으로 보아서는 청나라 군병일수도 있다.  

 

  성익의 상단은 어느 경로로 가서 언제 돌아왔는가? 성익의 상단이 조선에서 출발한 것은 1636년 1월 중순경이었고,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심양일기에는 1638년 2월 11일에 당시 청나라 도성인 심양(瀋陽)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심양일기에는 성익 일행이 심양에서 몽고로 출발한 것은 2월 19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성익 일행이 5월 20일에 심양으로 돌아왔고, 5월 24일에 본국으로 출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익의 상단은 당시 청나라 도읍인 심양을 거쳐 몽고로 들어갔다. 인조16년 실록에 성익이 몽고에 가서 소를 사온 경로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비국 낭청 성익이 소를 무역하는 일로 몽고에 들어갔다. 심양에서 서북쪽으로 16일을 가서 오환왕국(烏桓王國)에 도달했고, 3일 만에 내만왕국(乃蠻王國)에 도달했다. 또 동북쪽으로 4일을 가서 도달한 곳이 자삭도왕국(自朔道王國)이었고, 북쪽으로 가서 3일 만에 몽호달왕국(蒙胡達王國)에 도달했고, 또 동쪽으로 가서 투사토왕국(投謝土王國)․소토을왕국(所土乙王國)․빈토왕국(賓土王國)에 도착했다. 소 181마리를 사가지고 돌아왔는데, 평안도 여러 읍에 나눠주어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고 명하였다(1638년 6월 9일).

  실록에 나타난 몽고의 지명은 부족 이름으로 보이며, 현재 지명은 오한(烏桓)은 아오한, 내만(乃蠻)은 나이만, 자삭도(自朔道)는 자삭투, 투사토(投謝土)는 투시예트 지역이다(홍성구, 2010). 심양을 떠난 상단은 소를 구입하는 지역에 따라 성익과 조효신으로 나누어져[分班] 동 몽고지역 내륙으로 들어간다. 성익 상단의 몽고여정도(蒙古旅程圖)는 다음과 같다(이용범, 1965).

 

<그림 1> 성익의 몽고 여정도

 

4월 17일자 심양장계에서는 성익이 소 무역의 전반적인 진행상황을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이번에 도착한 소의 무역을 맡은 낭청 성익은 지난달 3월 23일에 문서를 작성하여 시강원에 올렸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심양을 출발해서 서북쪽으로 10일 걸려 가서 짐과 인부, 말의 수를 각각 절반으로 나누었습니다. 역관 조효신, 김경신, 정백란 이 세 사람과 청나라 장수 2명, 청나라 사람 20명을 아울러 서쪽 변방으로 보냈습니다. 북쪽 변방은 저[卑職]와 역관 이형장(李馨長), 그리고 청나라 장수 2명, 청나라 사람 20명이 두 길로 나누어 간 후 북쪽으로 6일 걸려 가서야 비로소 구매를 했습니다. 소 값이 비싸고 소를 파는 사람도 드물어 매매를 할 수 없어서 또 3일 걸려 옮겨갔으나, 소 한 마리 가격이 소청포 30여필에 수달피•청서피 각각 1장[令], 지삼 10여 봉, 담배 30여 첩이나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구매한 소가 혹은 한 마리, 혹은 날을 걸러서야 한 마리를 구매하였으므로 헛되이 시일만 낭비하고 매매가 쉽지 않아서 단지 25마리를 구매하여 먼저 내보내고, 더 깊이 들어가서 매매하려고 이 값으로 계산해 보니 앞으로 구매할 수 있는 것이 불과 40여 마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쪽의 구매가 이러하니 저쪽의 사정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소득은 비용을 채울 수 없어 일이 극히 걱정스럽습니다. 몽고인이 구하는 것은 잡색 비단필과 대청포, 수달피, 청서피 등입니다. 비단과 청포는 본래 가져오지 않았고 수달피와 청서피도 남은 것이 많지 않습니다. 이미 이 물건들이 떨어져버렸는데 앞으로의 매매가 이루어지기 어려울까 두려우며, 지삼과 담배도 과연 구하지 않는지, 소를 살 때 약간의 수량을 더하여줄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도착한 후 가지고 온 양식은 이미 떨어졌고 이 지방 풍속은 논밭 농사를 하지 않는데 다행히 기장을 구해 근근이 연명하였습니다. 허다한 인부와 말이 여러 달을 지체하다보니 이어갈 양식도 심히 어렵습니다. 가지고 온 물자는 양식을 사는 데 많이 써버렸을 뿐 아니라 망망한 사막에는 물과 풀도 제대로 없습니다. 혹 하루 종일 가다가 물 한 모금 얻지 못하니 상하 사람들과 말이 배고픔에 괴로워하였습니다. 관마 두 마리는 이미 중도에서 죽었으며 앞으로 더위가 성하여 전부 살아서 가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을 마땅히 갖추어 보고들여야 하겠으나 여기를 나갈 사람들의 출송(出送) 여부를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겠으며, 게다가 궁벽한 지역이라 문서가 혹 중도에서 없어질까 두려워서 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실을 서면으로 베껴 임금님께 아뢰도록 문서를 올리십시오.  

 

 이 보고를 보니 몽고지방의 소 구매하는 일은 필히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온 소 25마리는 서울로 군뢰로 교체되어 돌아가는 자와 함께 보냅니다. 성익은 소 구매를 마치고 나오는 즉시 다시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절차에 갖추어 잘 아뢰어주시기 바랍니다.”

 

  성익의 일행이 몽고로 들어간 후 심양관소에서도 궁금히 여기고 있다. 4월 2일자 심양장계의 내용이다.

  “소를 사러 온 사람들이 몽고지방으로 들어간 후 소식이 끊어져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들어간 청나라의 소 구매자들 중 선운(先運)이 그저께 나왔으므로 물어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러는 소를 사서 깊을 곳으로 옮겨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소를 산 사람들은 머지않아 응당 먼저 보내고 아직 사지 못한 사람들은 떨어져 머물면서 모두 구매한 후에야 나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4월 7일에 심양에 상단이 구매한 소 56마리가 심양에 도착한다.

“역관 정백란이 구매한 소 56마리를 몰고 먼저 왔습니다. 성익과 김경신은 남은 물자로 소를 더 사기 위해서 깊은 곳으로 옮겨갔으므로 언제 나오게 될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심양장계, 1638년 4월 13일).”

 그리고 4월 26일에는 역관 조효신과 김경신이 소 37마리를 구입해서 심양으로 돌아왔고(심양장계, 1638년 4월 27일), 5월 20일에는 성익이 소 67마리를 구입해서 심양으로 돌아왔다(심양장계, 1638년 5월 24일).

  소 구매 상단은 두 반으로 나누어져 몽고로 들어가고, 또 순차적으로 소를 몰고 돌아왔다. 분반이 된 이유는 한 곳에서 필요한 소를 전부 구입하기 어려웠고, 소 값이 한 마리에 무명 30필이라는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기 때문이었다. 1638년 비변사의 장계에는 심양 인근의 소 가격은 은30량 정도였고, 몽고지방은 은20량 정도여서 소 값이 싸고, 한 번에 많이 구입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당시 상단이 준비한 자금은 은으로 환산해서 1,900량 정도였다.

  성익의 상단에 청나라 군병이 동행한 이유는 소 무역을 돕고 안내하려는 호의도 있었겠지만,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에 조선인들이 청나라 영역 깊숙이 들어가 활동하는 것을 감시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실록의 기록대로라면 중국 심양에서 30일 이상 몽고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갔던 것이며 한양에서 떠나 2개월 정도 걸려서 목적지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소를 구입해서 오가는 것에도 시한이 있었다. 돌아올 때에는 소에게 풀을 먹일 수 있는 시기이여야 했고, 귀국은 농사철이 시작되기 이전이어야 했다.

  그리고 조선에 인조16년 1638년 5월 6일에 몽고 소가 1차로 의주에 도착했다는 비변사의 보고가 있었고, 2차가 도착한 것은 1638년 5월 23일자로 보고되어 있다. 그런대로 농사철에 시기를 맞추어 귀국한 것이다.

  인조16년인 1638년 6월 10일자 승정원일기에는 소를 사가지고 돌아온 낭청 성익 등에게 시상할 것을 청하는 비변사의 계가 있었다.

 “이번에 사 온 소의 숫자가 선운(先運)과 후운(後運)을 통틀어 계산하면 181마리이니, 적은 수가 아니고 먼 변방의 황량한 사막을 고생하며 왕래하였으니 그들의 노고도 많았습니다. 낭청 성익(成釴), 출신(出身) 김경신(金景信), 역관 조효신(趙孝信) 등을 해조로 하여금 품지하여 시상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왕이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이것으로 장장 5개월이 걸린 성익의 소 무역을 위한 몽고원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성익의 상단이 사온 소는 어떻게 배정되었는가?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성익의 상단이 사온 소 1차 도착 분은 청천강 북쪽에 나누어 주었고(인조16년, 1638년 5월 6일), 2차 도착 분은 청천강 이남의 지역에 분배되었다(인조16년, 1638년 5월 23일). 성익의 상단이 구매해온 소는 대부분 성우였기에 지역에 일소로 공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방목을 하던 소가 아니라 코뚜레를 낀 일소였을 것이다. 코뚜레가 있어야 당시 일행이 소를 몰고 올 수 있었을 것이며, 도착한 후 일소로 공급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성익 상단의 소 181마리 구입대금은 어떤 방법으로 지불되었을까?

  소 구입 대금 지불 수단으로 청서피(靑黍皮), 청포(靑布), 면포(綿布), 한지[紙地], 지삼(枝三) 등이 검토되었으며(승정원일기, 1637년 12월 14일), 실제는 담배를 주축으로 결제되었다. 조선에서는 거액의 포목을 들여 왜관에서 구입한 지삼(枝三, 썬 담배)과 조선산 담배[南草]로 소 구입대금을 준비하였다.

  조선은 경상감영이 비축하고 있던 포목 30동(1,500필)으로 동래 왜국 상인으로부터 지삼과 담배 관련 도구[煙具]를 구입했다(비변사등록, 1638년 2월 10일). 지삼의 근 당 가격은 포목 1.2필이었고, 모두 1,200근이 준비되었다. 소 매입을 위해 가지고 간 담배는 몽고에서 비싼 물건이어서 현지인의 소를 팔려는[賣牛] 의욕을 적지 않게 유발시킬 것으로 예상하였다(이용범, 1965).

  그러나 성익이 보낸 1938년 4월 17일자 심양장계에는 기대한 것과는 달리 몽고인들의 담배에 대한 기호도가 낮았고, 오히려 몽고인들의 기호도가 높은 것은 수달피와 청서피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어쨌든 담배만으로 부족한 소 구입자금은 가지고 간 수달피와 청서피, 포목 등으로 충당한 것으로 보이며, 넉넉지 않은 자금으로 소 181마리를 구입해서 국내에 들여오는데 성공한 것이다.

  당시 담배는 귀한 고가품이어서 청나라에서는 은의 유출을 걱정해서 교역을 금지한 품목이었다. 그러나 청나라 황제의 묵인 아래 몽고에 가서 소를 살 수 있었고, 이는 조선이 몽고와 직접 무역한 역사상 최초의 사례이다.

  몽고 소의 대금 준비 과정은 국고문헌에 나타나 있으나, 긴 여행 중의 경비를 어떻게 마련하고, 어떻게 썼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또 청나라 사람 44명이 동행했는데 그 경비도 어느 쪽이 부담했는지도 미상하다. 상단의 단장이 무관이고, 수행인들도 역관들뿐이어서인지 몽고 여행 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도 공문서 외에는 없다.

  그러나 5개월에 걸친 성익 상단의 몽고 원정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한양에서 목적지인 동 몽고까지는 직선거리로도 1,500km가 넘는 먼 거리이다. 도로나 편의시설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을 당시, 말도 안 통하는 곳의 낯선 풍토를 무릅쓰고 181마리의 소는 조선에 무사히 도착했다. 여행하는 긴 기간 동안에 도적이나 맹수의 위협도 있었을 것이고, 또 먼 길에 폐사된 소도 있었을 것이다. 또 사막을 통과하노라 물과 식량의 부족도 있었다. 그 어려움을 헤치고 181마리라는 적지 않은 소가 조선에 도착한 것이다. 이 길고 힘든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성익 상단의 성과와 그 노고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현종4년에 시정을 논하는 과정에서, “금년 들어 우역이 크게 번졌습니다. 경기와 양서지방은 더욱 심하였는데, 관서지방은 1천 마리 가까이 죽었다니 이야말로 큰 이변입니다.” 왕이, “정축년에는 우역으로 죽은 소가 얼마나 되었는가?”하고 인조 왕 때의 일을 묻자, 대신 정태화는, “병자년(1636)부터 정축년(1637)까지 죽은 소가 수도 없어 거의 남아있는 종자가 없었으므로 나라에서 성익을 시켜 몽고 땅에서 사왔습니다. 지금 있는 소들은 모두 그 종자입니다.”라고 대답한다(1663년 8월 13일). 우리 한우의 뿌리는 몽고 소에도 그 연원의 한 가닥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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