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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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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틈으로 본 조선 이야기(11) , 고구마가 지금 우리 곁에 있기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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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틈으로 본 조선 이야기(11) 
 

고구마가 지금 우리 곁에 있기까지는

 

   

 

하상(夏祥) 이두순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고구마는 300평당 수확량이 생 중량으로 4,000kg내외나 되어 곡류의 10배가 넘는다. 이 때문에 식량이 부족하던 시대에는 구황작물로 관심을 모았으나 최근에는 반대로 다이어트 식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묘한 작물이다.

  고구마는 남미가 원산지로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스페인이 1565년경 필리핀에 진출하면서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고, 중국에는 1594년경에, 오키나와에는 1605년경에 전파되어 1700년대 전반에는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715년경에는 쓰시마[對馬島]에서 고구마가 재배되기 시작하였고, 조선에는 1763년에 조선통신사 조엄(趙曮, 1719∼1777)에 의해 도입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구마가 이 땅에 자리 잡기까지의 우여곡절은 바로 대하소설이다.

  조선시대의 주식은 쌀·보리였지만 어차피 태부족이었고, 특히 흉년이 들면 나라에서는 구황대책에 부심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흉년대책으로 ‘황정(荒政)’이란 이름으로 구황작물의 선정과 보급에 힘썼다. 메밀, 콩잎, 도토리, 칡뿌리, 소나무껍질, 솔잎 등이 구황작물로 이용되었고, 심지어 흰 흙[白土]까지 식량 대용이 되었던 시대였으므로 고구마에 관심이 꽂힌 것은 당연하였다. 

  우리 역사상 최대의 기근이라는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은 현종 때인 1670년(庚戌年)과 1671년(辛亥年)에 일어났다. 조선 전체의 흉작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으며,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피해가 생겼다. 1700년대는 지구의 소빙기(小氷期)로 냉해를 비롯한 이상기상이 잦았고 조선에도 흉작의 피해가 빈번했고 구황대책 수립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었다.

  고구마를 처음 도입한 조엄이 조선통신사 정사(正使)가 되어 일본으로 향한 영조시대에도 흉년이 심했고, 굶주리는 사람이 수십만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엄이 일본 쓰시마에서 마주친 고구마! 그가 고구마를 구황작물이라고 생각하여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목민관, 농정가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고구마가 도입되어 국내에 정착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조엄은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해사일기(海槎日記)」라는 사행기록을 남겼다. 1764년 6월 18일자 일기에 고구마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온다.

 

  섬에 먹을 수 있는 풀뿌리가 있는데 이름을 감저(甘藷)라고 한다. 또 효자마(孝子麻)라고도 하는데, 일본 발음으로는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한다. 그 모양이 참마[山藥] 같기도 하고, 혹은 무[菁根] 같고, 오이[瓜]나 토란[芋] 같으며 모양이 일정치 않다. 잎은 마의 잎 같지만 조금 더 크고 두꺼우며, 옅은 붉은색을 띄었다.

  넝쿨[蔓]은 마 넝쿨만큼 크고, 맛은 마에 비해서 조금 강하며 진한 맛이 있고, 반쯤 구운 밤 맛과 같다. 날로도 먹으며 굽거나, 쪄서 먹기도 한다. 곡식과 섞어 죽을 쑤어도 좋다. 깨끗하게 썰어서 과일삼아 먹어도 된다. 혹 떡을 만들거나 밥과 섞어지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구황작물로 좋은 작물이라 하겠다. 이 물건은 중국 남경에서 일본으로 유입되었다고 들었는데, 일본의 여러 섬에서 많이 나지만 대마도[馬島]에서 재배가 더욱 성하다.

  돌아가는 길에도 구해서 동래의 지방 관리들에게 주려고 한다. 이것을 다 살릴 수 있어 나라에 퍼트린다면 문익점이 목화를 들여온 것처럼 우리 백성들에게 어찌 크나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또 동래에 심은 것이 넝쿨을 널리 퍼진다면 제주도와 다른 섬에도 재배함이 마땅할 것이다. 감저(甘藷)가 과연 번성한다면 제주도백성이 해마다 곡식을 바라고, 나주 곡물창고[羅倉]에서 배를 띄워 운반하는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토질이 적합한지 알지 못하고, 땅에서 나는 것이 모두 다르니, 그 번식이 뜻대로 될 것인가는 어찌 알 수 있겠는가.

 

  1763년 8월 3일에 서울을 떠난 조선통신사 일행은 10월 6일에 쓰시마의 사스나우라[佐須奈浦]에 도착해서 10일까지 머문다. 이때 1차로 고구마를 구해 재배기술 자료와 함께 부산진으로 보냈다.

  1차로 고구마를 싣고 부산포로 온 배는 통신사의 사행 중간보고를 위해 쓰시마에서 떠난 파발선[飛船]이었다. 고구마를 받은 부산진 첨사 이응혁(李應爀)은 다음해인 1764년 봄 절영도(絶影島, 지금의 영도)의 야산에 고구마를 심었다. 이것이 우리 땅에서 고구마가 심겨진 시초이다.

  그 후 조엄은 1764년 6월 22일 부산포로 귀국하면서 고구마를 싣고 와서 동래부사인 강필리(姜必履, 1713∼1767)에게 재배관련 자료와 함께 인계하였다. 강필리는 고구마 종자와 자료를 받고 재배를 시도하였다. 강필리는 1764년 8월 20일에 동래부사로 부임했다가 1766년 11월 10일에 내직인 동부승지로 승진하여 강필리가 고구마를 재배한 기간은 1765년과 1766년 이태뿐이었지만, 조엄에게서 받은 자료와 동래에 와 있던 왜상이나 쓰시마 등지에서 수집한 자료로 「감저보(甘藷譜)」를 저술했다.

  강필리는 고구마 재배에 성공하자 종자를 제주도와 인근 군현에 나누어 주는 한편, 한양 비변사(備邊司)에도 보냈고, 동래부사를 사임하고도 고구마 종자를 서울에 가져와서 재배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고구마를 시험재배하고 고구마 보급에 노력한 최초의 사람은 강필리인 것이다.

  강필리와 함께 고구마를 재배하고, 고구마재배법을 연구한 사람은 동생인 강필교(姜必敎, 1722~?)였다. 강필교는 을유년(1765)에 동래부사가 되자 형인 강필리의 고구마에 대한 뜻을 이어받아 바로 고구마 종자를 얻어 재배하는 한편, 갑술년(1766년)에는 큰돈을 들여 다량의 고구마 종자를 쓰시마에서 구입해서 도내 각 지역에 보냈다고 하였다. 조엄이 1763년과 1764년에 들여온 고구마는 증식에 실패하였고, 1766년에는 고구마 종자를 다시 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필교의 기록에서 강필리가 1764년 8월에 조엄으로부터 고구마 종자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강필교가 󰡔감저보󰡕 서문에서 부안지역의 노인이 고구마를 먹고 정력이 좋아졌다는 소문을 기록한 것은 당시 고구마가 식량작물이 아니라 기호작물, 남방에서 전래한 특이한 작물로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모으고 있었다는 상황을 반영한다.

   조엄이 고구마를 도입하고, 강필리와 강필교 형제가 고구마 재배법을 규명하고 고구마를 전파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시기에 고구마에 관심을 가진 이광려(李匡呂, 1720~1783)라는 실학자가 있었다.  

  이광려는 「군방보」와 「농정전서」 등 중국 서적을 통해 알게 된 고구마가 당시의 식량난을 해소할 구황작물임을 확신하고 고구마를 입수하려고 노력한다. 이광려가 1762년에 「군방보」를 읽고 쓴 글에는 고구마의 장점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고구마의 재배와 보급을 주장한 내용이 있다. “고구마라고 하는 것은 오곡에 못지않으며 재배하고 거두는데 큰 힘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1무(畞)의 땅에 심어도 수십 석이 나며,,, 척박한 모래자갈밭에도 심을 수 있으며 흙을 가리지 않는다. 이것을 우리나라에 들여올 수 있다면 풍흉을 가리지 않고 백성이 먹을거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書群芳譜後].”

   또 고구마를 도입하여야 하는 이유에 대해, “지금 고구마 이야기를 하는 연유는 흉년을 위한 대책만이 아니다. 풍년이 들어 곡식이 흔해진다지만 농민은 더욱 궁색해지므로 부자가 아니고는 곡식 구경도 못한다. 고구마를 거둬들인다면 풍년에도 농민 스스로 먹을 것을 충족하고, 흉년에도 유리걸식하거나 굶어죽는 것을 면할 수 있다. 나라 정사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면 어찌 이를 늦출 수 있을 것인가?”라고 설파하고 있다.

  이광려는 고구마 도입이 흉년시의 구황대책이 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근본적인 식량대책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광려는 고구마 종자를 구하기 위해 당시 호조판서인 서지수(徐志修, 1713~1768)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광려는 중국인 서광계의 농서인「농정전서」를 보내며, 중국으로 왕래하는 사신 행차를 통해 고구마 종자를 구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 편지에, “고구마[藷]는 본래 해외에서 나온 것인데 근래 중국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쉽게 자라며 종자를 적게 심어도 수확이 많아서 가뭄과 충해에도 재난을 입지 않고 농사짓기도 힘들지 않습니다. 오곡과 같이 맛이 좋으며 그 쓰임새는 배가 됩니다. 따라서 풍흉을 아울러 구할 수 있는 천하에 귀한 물건입니다.” 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與徐判書一之書].

  그러나 이광려는 중국 사신행차로부터 고구마를 구할 수 없었다. 이에 이광려는 남쪽으로 시선을 돌려 1765년에 동래에서 고구마 종자를 구해 재배하게 된다. 남쪽지역에서 고구마를 도입하게 된 전말을 ‘강생 계현에게 주다’라는 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강생 계현(啓賢)에게 주다>

  일찍이 듣자니 근래 중국에 한 기이한 물건이 있는데, 그 이름은 감저(甘藷)라고 한다. 종자가 들어온 지 백여 년이 되었고, 민•절(閩浙) 땅에서 내륙으로 점차 퍼지고 있다는데 다시는 수한풍흉의 걱정이 없다하니 참으로 보배로운 것이다. 「농정전서」를 살펴보니, 이 책에는 감저에 대한 전고(典故)와 재배하고 종자를 남기는 방법이 수다히 적혀있었다. 생각대로 이것을 구해서 우리나라에서 심는다면, 그 이익은 말로 다하지 못할 것이다.

  돌이켜보니 한스럽게도 그것에 닿을 방법이 없다. 일찍이 중국 사행의 통역관에게 몇 차례 이야기했지만 아무런 보고 들음이 없이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합당한 사람이 있어서 내가 생각한 바를 전하였다. 서승상 서일지(徐一之)가 마침 호조판서가 되었으니 중국 사신행차에 부탁한다면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사신이 돌아오는 길을 살펴보았으나 모두 헛된 일[皆槁矣]이었다.

  생각해보니 이 물건을 북쪽에서 구하는 것은 어렵지만 일본에는 반드시 있은 지 오래일 것이다. 무릇 중국의 물화와 서적은 필히 일본에서 먼저 구하니, 하물며 이것은 본래 남쪽에서 나는 것이다. 듣자니 일본에서 가진 자가 있고, 그 뿌리와 줄기, 넝쿨 그리고 모양과 맛이 바로 고구마일 것이다. 마침 친구의 아들로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가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간곡히 부탁한 것이다.

  그 다음해 봄날 밤 내가 앉아있고 강생(姜生)이 곁에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통신사가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꼭 고구마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어 성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1년을 헛되이 보내게 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동래와 부산 인근에 반드시 전파된 고구마 종자를 심는 민간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단지 고구마라고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곳에 가서 찾아본다면 혹시 얻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한스럽게도 다녀 올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강생이 개연히 말하기를, “제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청했다. 보내기는 하지만 얻지 못하고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묻기를, “그대는 장차 어떻게 갈 것인가?” 하였더니, 강생이 말하기를, “걸어서 가고 또 가면 어찌 도착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구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때 밀양부사[密陽宰]와 안면이 있었고, 동래부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였다. 강생은 인사를 하고 떠났다. 손에 노자도 넉넉지 않았지만, 버들개지 날리는 봄철에 남쪽으로 떠났다.

  날씨는 더워지고 돌아올 날을 알지 못하겠다. 일이 자못 허황하고, 여러 어려움이 있음은 알만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어려운 빛이 없이 떨치고 떠남에 내 마음에 기특하게 여겼다. 허나 그 종자를 얻을 수 있는가는 알 수 없었다. 4월 모일에 떠났고, 한번 떠나고 나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바로 7월 그믐이 될 때, 내가 병으로 피곤해서 방에 있자니, 홀연 창밖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먼 곳에서 온 사람입니다.”하였다. 강생의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창에 가서 창문을 열고 밖을 보았다. 강생을 따라 한 사람이 들어와서 등에 진 나무 궤를 대청에 놓았다. 궤 안에는 식물의 넝쿨이 1자가량이나 나 있고 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종자를 많이 얻어 수확한 알이 제법 많았지만, 종자로 쓸 것은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끝내 문제가 된 것은 심는 법을 몰라서 모두 한두 차례 심는 것에 그치게 된 것이다.

  이길보(李吉甫)가 농작물 재배법에 매우 밝았다. 내가 길보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이 고구마를 많이 심어서 민간에게 그 효과를 보여주지 않는가?” 길보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큰 사발로 밥을 먹는 것이 익숙합니다. 어찌 즐겨 고구마로 밥을 대신하겠습니까? 고구마는 비록 맛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종내 중국처럼 쓰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 말이 옳지 않아보였지만, 지금 생각하니 길보의 말이 물정에 밝은 것이었다.

  무릇 모든 물건은 쓰이고 버려지고, 성하고 쇠함이 모두 때가 있다. 열매과일[果蓏]과 담배, 목화 등 종류는 본래 중국의 땅에서 났던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 이제와 일용하던 것이 우리나라에 유전된 것이고, 또 지금에 와서는 몇 백 년이 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 그것들이 우리 토산으로 알고 있고, 그것이 본래에는 외국에서 들어온 것인지 생각지도 못한다. 고구마에 이르러도 그렇지 않겠는가. 고구마는 맛이 매우 좋고 쓰임새가 여타작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고구마 재배가 성행하지 못하는 것도 그 맛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그 혜택을 보지 못하니 그 어려움을 구제함이 더 급하지 않겠나.

  강생(姜生)이 죽었다. 내가 시를 지어 알리고자 한다. 그는 처자가 없었고, 몸 외에 지닌 물건이 없었으며, 사람들 집에 얹혀살았다. 그의 마음과 재주는 무소불능이어서 사람들을 위해 기물을 만들고 채소를 가꿈에 모두 그 묘리를 얻었지만 종내 살아갈 방도는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그 더운 날에 걸어서 수 천리를 걸어가서 고구마 종자를 얻어왔다. 이는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시를 지어 읊는 것이다. 만약 고구마가 나라에 퍼졌다면, 그 민생을 구황하고 기아에서 구한 이익을 어떻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가난한 선비이어서 농상(農商)을 할 수 없는 자, 또 땅이 없는 자들에게 먹을거리로 바로 기여할 것이다. 또 경성 안팎의 홀아비와 과부의 집에 놀리는 작은 땅이 있어, 심으면 1년을 자족할 것이다. 어찌 넉넉하고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풍흉,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나라가 백성의 근심을 걱정한다면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있겠는가? 아, 어찌 작은 일이라고 하겠는가?

 

 이광려는 1764년에 일차 고구마 종자를 구했지만 증식에 실패하였고, 1765년에 다시 강필리의 서울 집에서 종자를 받아 증식에 성공한다. 이광려는 고구마가 구황작물로 널리 쓰이고,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이 되기를 바랐지만 고구마 전파는 기대보다 부진했다.

  이광려의 친지인 이길보(李吉甫)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큰 사발로 밥을 먹는 것이 익숙합니다. 어찌 즐겨 고구마로 밥을 대신하겠습니까? 고구마는 비록 맛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종내 중국처럼 쓰이지는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즉 주식으로서 고구마는 쌀만은 못했던 것이다. 또 고구마가 진귀한 기호작물로 받아들여져서 오히려 ‘가난한 사람은 그 혜택을 보지 못하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고구마가 귀물로 취급되어 도입초기의 가격이 비쌌던 것이 그 이유로 추정된다

  1700년대는 지구의 소빙기(小氷期) 시대여서 조선에도 흉년이 잦았다. 조선조정에서는 식량을 증산하고 기근에 대비한 구황대책을 수립하고자 한다. 정조18년인 1794년 12월 25일에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 서영보(徐榮輔, 1759∼1816)가 호남지방의 사정을 보고하면서 고구마 증산을 건의하고 있다.

  

 연해지방 고을에는 이른바 고구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구마는, 명나라의 명신(名臣)인 서광계(徐光啓)가 찬술한「농정전서」에 처음 보이는데 칭찬을 하며 말하기를, “그것은 조금 심어도 수확이 많고,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가뭄이나 황충에도 재해를 입지 않고, 달고 맛있기가 오곡과 같으며, 힘을 들이는 만큼 보람이 있으므로 풍년이든 흉년이든 간에 이롭다.”고 하였습니다. 수천마디를 늘어놓으며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말한 것을 보면 그 말이 반드시 속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고구마 종자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백성들이 다투어 심어서 생활에 보탬이 되는 경우가 왕왕 많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영읍(營邑)의 가렴주구가 따라서 이르면서 사나운 관리가 문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수색을 하였습니다. 관에서 일백 포기를 요구하고 아전은 한 이랑씩 다 거두어 가니 심은 자는 곤란을 당하고 아직 심지 않은 자는 서로 경계하여 부지런히 심고 가꾸는 것이 점점 처음만 못해지다가 이제는 희귀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와 같이 좋은 물건이 있어 다행히 종자를 가져오게 되었으니, 국가로서는 마땅히 백성들에게 주어 심기를 권장하고 풍속을 이루게끔 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좋은 혜택을 받기를 문익점(文益漸)이 가져온 목화씨처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번식도 하기 전에 갑자기 가렴주구를 행하여 어렵사리 해외의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좋은 종자를 오래 자랄 수 없게 하고 씨받이 종자까지 먹어버렸으니, 어떻게 종자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양남의 도신 및 각 해당 수령에게 분부하여 먼저 연해안 고을부터 번식시키도록 신칙하고, 그 과정을 엄하게 하여 마을마다 일을 주관할 사람을 한 사람 택하여 그 일을 맡게 하여서 어느 마을 어느 집이든 다 심게 하고, 부지런히 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해당 이임(里任)을 태장(笞杖)을 쳐서 죄를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

  남방의 토지 성질은 어디든 고구마 심기에 알맞지 않은 곳이 없는데, 오곡을 심기에 적당치 않은 산밭이나 돌밭에는 더욱 심기가 좋습니다. 그러니 우선 삼남 연해안 고을과 섬 지방부터 널리 심기를 권장하고 차차 토질이 알맞은 곳에 보급시켜 나간다면 서북지역 외의 6도에는 심지 못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제주도의 3읍에 있어서는 아주 작은 섬이라 호령이 행해지기 쉬울 것이고 또 대마도와 마찬가지여서 토질에도 적합할 것입니다. 이렇게 잘 심으면 비록 흉년을 당하더라도 거의 배로 곡식을 실어 나르는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營)과 읍(邑)의 토색질하는 폐단에 대해 먼저 과조(科條)를 세워 엄하게 금지를 가한다면 10년을 넘지 않아서 지금의 담배나 수박처럼 나라 안에 두루 퍼져 있는 것을 보게 되어 물이나 불처럼 흔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토색질하는 폐단도 없어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훗날을 위해 미리 대비하는 대책으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을 듯합니다(정조18년 실록, 1794년 12월 25일).”

 

  고구마가 조선에 들어온 지 30년이 지난 정조 시대에도 고구마는 식량작물이 아니라 남방에서 들어온 신기한 기호작물로만 취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구마 재배 확산에 장애가 된 것은 지방 관리들의 수탈이었다. 정조는 고구마 재배를 수탈하는 폐단을 엄금하는 한편, 고구마를 재배하는 농민에게 부역을 탕감하는 등 장려정책을 쓰기로 한다. 정조시대의 고구마 증산 정책이 얼마나 실효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남지방에 들어온 고구마는 호남지방에도 확대되었고, 제주도에도 장려되었던 것이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1817년에 쓴 「경세유표」에는, “서도(西道)의 연초(煙草) 밭, 북도의 삼밭, 한산(韓山)의 모시 밭, 전주(全州)의 생강 밭, 강진(康津)의 고구마 밭, 황주(黃州)의 지황(地黃) 밭은 모두 상지상(上之上) 논과 비교해도 그 이가 10갑절이나 된다.”고 적고 있다. 또 정약용의 시에, “토산으로는 귀한 고구마가 있어, 구하려는 사람이 이곳으로 몰려든다네[土産貴藷芋, 求者此湊會].”라는 구절도 있다. 정조가 1794년에 고구마재배 장려정책을 실시한지 2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마는 귀한 작물, 수익성이 높은 작물로 취급받고 있어 고구마재배가 쉽게 일반화된 것 같지 않다.

 

 우리는 고구마가 당연히 우리 땅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작물이 우리 백성을 살리는데 필요하다고 믿고 중국에서 구하려고 노력한 사람, 바다 건너에서 어렵게 구해 온 사람, 그리고 고구마 한 알을 등에 지고 천리 길을 달려 온 사람, 이를 널리 재배토록 하기 위해 애쓰며 재배법을 연구한 목민관, 농학자의 열정과 지혜가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의 혜안과 열정이 펼쳐진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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