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 펄펄 뛰는 지식의
당신이 틀렸음에도 당신이
이제 차원이 다른 남북 농
북한 개발협력의 필요성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
정경화, 조성진 두 거장의
한우 사육구조의 변화, 무
너도나도 ‘한우’ 농사에
[63] 돼지고기이력제 이력
아이슬란드의 아름다운 풍
GS&J 감성교차
 
Home > GS&J논단 > 에세이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7.12.08
제목
임진왜란 이야기(10), 참전 3국의 경제와 군수체계 비교(1) 
첨부파일
 

 

 

 

 임진왜란 이야기(10), 참전 3국의 경제와 군수체계 비교(1) 

 

 

 

오호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1. 조ㆍ명ㆍ일의 국력

 

 1) 인구

 

  (1) 조선

 

 16세기 후반 조선반도에서 임진왜란을 치렀던 조선과 명 그리고 일본의 국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통계자료가 없었던 시절이므로 삼국간의 국력 차이를 객관적으로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중세시대 경제의 크기와 발전을 나타낼 수 있는 중요한 지표는 인구와 농토 그리고 농업생산량 등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인구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조선시대에는 호구조사를 하였는데 호구조사의 목적이 인구의 파악이 아닌 세금과 신역의 부과였기 때문에 실제 인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호구의 정의가 일정하지 않고 여자와 어린 아이들이 제외된 경우가 많고 또 천인과 노비의 인구가 제대로 포함되지 않아 호구조사 자료에 의한 인구는 과소 추정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원래 호구조사는 3년에 한 번씩 하기로 되어 있으나 정부가 직접 조사한 것이 아니라 가호에서 가족과 노비를 기록한 호구단자를 소속 군ㆍ현에 제출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 때문에 세금을 줄이기 위하여 식구의 수를 줄여 보고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전국적 조사는 태종과 세종 때 뿐이고 나머지는 비정기적인 것으로 일부 도와 군의 자료만 간헐적으로 있을 뿐이다.

 

 조선 전기의 인구추정을 위한 방법은 두 가지가 쓰인다. 첫째의 방법은 당시의 호구조사 자료를 검토하여 일정한 수정계수를 만든 다음 이 계수를 가감하여 추정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일제시대에 실시한 최초의 인구센서스(1925) 등에서 얻은 인구 성장율을 기초로 과거로 역산하여 인구를 추정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인구 추정은 연구자와 사용방법에 따라 편차가 크다.

 

 李樹健은 태종 4년과 6년의 전국적 규모의 호구조사와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난 전국의 호구자료를 기반으로 호구조사의 문제점을 분석하여 거기에서 얻은 정보를 가감하여 성종 때까지의 인구를 추계하였다. 이 연구는 건국 초에는 약 5백 50만, 세종 말에서 성종 초까지 이르는 기간의 인구를 6백만~7백만 내외로 추정하고 있다. 임진왜란기 직전의 조선인구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중간 값으로 보면 약 7백만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 명

 

 명나라의 인구 추정도 자료에 따라 편차가 심하다. 명나라는 태조 홍무제의 지시로 처음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는데 1381년(홍무 13)에 약 6천만 명으로 조사되었다. 명대의 호구조사에서는 인구가 계속 6천만 정도로 집계되었는데 이 숫자는 1천 5백 년 전 漢代에 이미 도달한 수치이다. 전문가들은 실제 인구는 1억 명은 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인구 전문가인 Angus Maddison의 추정에 따르면 1580년 명나라의 인구는 약 1억 6천만으로 과거의 조사보다는 훨씬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

 

 (3) 일본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인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일본의 인구 추정은 조선이나 명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편차가 적은 편이다. 대체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을 전 후 한 연대의 일본인구는 1천 2백만에서 1천 8백만으로 추계되고 있다.

 

 일본사회공학연구소는 1770년 일본의 인구를 1천 30만으로 보고 있고, 吉田東吾는 1인당 연간 1석을 먹는다는 가정 아래 1598년의 石高조사로부터 추정한 1600년의 인구를 1천 8백만으로 보고 있다. 齋藤修은 인구 성장률을 기초로 1600년의 인구를 약 1천 7백만으로 추정하였다. 1600년 일본 인구는 연구에 따라 1천 만, 1천 2백만, 1천 7벡만, 1천 8백만 등이 있는데 중간치를 선택하면 임진왜란이 시작될 무렵의 일본 인구는 약 1천 5백만 정도로 볼 수 있다.  

 

 2) 경지면적과 농업생산량 및 경제력

 

 (1) 조선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경지면적은 1백 52만~1백 71만 結로 보고 있다. 결은 토지의 면적 단위가 아니고 일정량의 생산량을 낼 수 있는 토지의 생산량 단위이다. 즉 1결은 현미로 환산하여 30斗의 세금을 낼 수 있는 토지 단위였다. 평균적으로 볼 때 중간 정도의 비옥도를 가지고 있는 토지 1결의 면적이 2,897평이었으므로 지금의 1정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농지 생산력이 평균적으로 中田에 해당된다고 보면 당시 조선의 경지면적은 약 1백 50만 정보 가량이라고 추정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전 조선의 총 농업생산량은 발표된 자료는 없으나 과전법에서 최고의 풍년인 上上年에 1결에 대한 田稅가 30斗였고 그 당시의 전세액은 10분의 1세였으므로 1결의 생산량은 20石으로 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1백 50만 결의 생산량은 현미 환산 3천만 석으로 계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당시 상상년의 작황은 매우 드물었으므로 중간 정도의 작황으로 결당 20斗를 받았다면 평균적으로 연간 약 2천만 석의 농업생산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2천만 석에 대한 10분의 1세는 2백만 석이다.

 

 세종 때 세법이 불공평하다고 하여 세법을 貢法(공법)으로 바꾸었다. 이 법에 따라 토지의 생산력을 1등전에서 6등전으로 나누고(田分6等法) 흉풍의 정도는 9단계로 나누었다(年分9等法). 공법에 따른 1등전 1결의 면적은 대략 2천 7백 평 내외였다. 6등전 1결의 면적은 1만 2천 평 정도였는데 1등전과 6등전의 비율은 대략 1:4 정도였다. 공법은 최상의 풍년에 결당 20두의 세금을 받았다. 공법은 농민들의 전세부담의 경감을 가져왔다. 정부는 세수가 줄자 貢納(공납)이라는 현물세를 늘리는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흉년이 자주 들어 수확량이 줄었다. 뿐만 아니라 권문세가의 토지겸병이 증가하면서 면세전과 탈세전이 늘었다. 잦은 흉년과 가렴주구로 인한 민심의 배반을 달래기 위하여 연분등급을 낮춰 최저율의 과세를 자주하다 보니 이것이 관례화되어 결당 4~6두를 과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당 6두로 과세할 경우 연간 세수는 60만 석으로 줄어든다.

 

 조선 정부의 전세 수납액은 세종 때 평균적으로 약 60만 석, 성종 1년 44만 석, 중종 20년에 27만 석으로 감소하였다. 명종 원년에는 26만 석, 임진왜란 직전에는 25만 석 가량이었다. 그 당시 함경도와 평안도의 전세는 군사비로 현지에 할당하여 준 것을 감안하더라도 정부의 세수가 2백만 석에 훨씬 미치지 못한 것은 세정에 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세수가 계속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공법개혁 이후 다시 토지제도가 문란하여지면서 권문세가 및 지방관리 등에 의한 세금 포탈행위가 만연하였음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

 

 (2) 명

 

 건국 초인 1393년(홍무제 26)에 조사한 명나라의 경지면적은 8백 50만 頃(약 5천 1백만 정보, 1경은 약 6정보)이었다. 명 초기에는 전체 경지면적의 10분의 1인 약 89만 3천 경을 屯田으로 할당하여 여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軍戶와 군대를 유지하였다. 15세기 중반 선종ㆍ선덕 연간에 토지세(田賦)만 3천만 석을 거두었고 약 3백만 명의 상비군을 유지하였다.

 

 명나라는 15세기 중반부터 농업생산이 증가하고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이로 인하여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銀이 주력 화폐로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16세기부터는 가내공업이 발전하여 일부 업종은 매뉴팩튜어 단계에 진입하였고 이런 곳을 중심으로 도시와 상업이 발전하였다. 예를 들면 蘇州(소주)의 비단, 景德鎭(경덕진)의 도자기 등은 다량 생산단계에 들어갔는데 그 품질도 뛰어나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명은 16세기 중반부터 토지조사의 기반 위에 일조편법의 실시로 은본위경제가 확립되었다. 이 때부터 모든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도록 하였고 정부의 지출도 은으로 하였다. 이 무렵 명은 해양세력인 포르투갈ㆍ스페인ㆍ일본과의 공식 비공식 무역을 통하여 전세계 은 생산량의 4분의 1 가량을 빨아드렸다. 명나라의 주요 국부의 원천은 농업과 더불어 가내공업과 무역이었다.

 

 (3) 일본

 

 풍신수길이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인 태합검지를 완료했을 때 일본의 경지면적은 약 150만 정보로 나타났다. 당시 일본의 총 농업생산량은 石高로 약 5천 4백만 석이었다. 이 가운데 大名들이 거두는 세금(年貢)은 약 1천 8백만 석 가량이었다.(전체 생산량의 약 33%) 이 가운데 수길이 받은 연공미는 慶長 3년(1598) 약 2백만 석이었다. 당시 석고는 벼로 계산하였으므로 현미로 환산하면 수길이 받은 연공미는 약 1백만 석이다. 이는 일본 전체 세금의 약 9분의 1이었다.

 

 수길은 전국을 통일한 후 주요 금ㆍ은광을 직접 소유하고 해마다 생산된 금ㆍ은을 수취하였다. 수길이 大阪城에 보유한 금과 은의 수량은 다음과 같다. 당시 금 1枚는 은 10兩의 가치가 있었고 은 1냥은 쌀 2석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黃金: 3,397枚 8兩

 銀子: 79,415枚 7兩

 

 수길은 일본에 있는 주요 금ㆍ은 광산을 접수한 후 금ㆍ은을 증산하도록 지시하였다. 수길은 이 은으로 포르투갈ㆍ스페인ㆍ중국ㆍ동남아 제국과의 무역을 확대하였다. 일본은 외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신흥 해양세력으로 대두하고 있었다.

 

 2. 임진왜란시 조ㆍ명ㆍ일의 참전 병력

 

 1) 조선

 

 조선은 건국초기에 良人皆兵(양인개병), 兵農一致(병농일치)의 원칙에 따른 병제를 운영하였다. 조선의 군사는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에 소집되어 군사훈련을 받거나 또는 일정기간 서울에 올라가 왕궁을 수비하거나 국경지역에 파견되어 赴防(부방)하였다. 조선 군대의 특색은 군사에게 급여는 없고 식량과 무기는 자변, 전쟁 시에만 국가에서 군량을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조선의 군사 수는 군량미의 보급 수준에 따라 끊임없이 가변적이었다. 군량이 보급되지 않으면 부대를 해산하거나 인근 군ㆍ현에 군사를 보내 민가를 돌아다니며 얻어 먹게 하는 것이 상례였다. 군대가 있으면 계속 군량을 이어대야 하는데 당시 조선의 사정은 조선군 부대에게 군량을 계속 接濟(접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병력은 병조를 통하여 계속 보충 받을 수 있었으나 군량을 대주지 못하면 군사들이 도망가거나 해산상태에 들어가고는 하였다. 왜란기간 동안 조선군의 수가 얼마인지 파악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조선군의 실태는 유성룡이 1594년(선조 27) 4월 선조에게 올린 時務箚子(시무차자)에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유성룡의 보고에 따르면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군사력은 장부상으로 볼 때 4만 7천 820명이었다. 장부상의 正兵 4만 7천 820명에 대한 保人은 9만 7천 8백 명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조선군 수는 현역과 보인을 합하여 모두 14만 5천 명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근접한 숫자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숫자는 장부상의 군사와 보인 일뿐 실제 전쟁에 투입 될 수 있는 정상적인 군사의 수는 아니었다.

 

 2) 일본

 

 일본의 병제는 직전신장과 풍신수길 이후에 병농이 분리된 상비군 체제를 갖추었다. 군사의 동원과 이들에 대한 급여지급의 주체는 각 大名들이었다. 수길은 평상시에는 자기가 거느리는 직속부대의 보급과 군량에 대해서만 책임을 졌다. 그러나 수길이 동원한 대명군이 전쟁 중 식량이 떨어졌다든지 또는 전투시의 포위상황 등 특수한 경우에만 병참을 지원하였다.

 

 임진왜란기 일본의 총 동원인원은 약 33만 명, 이 가운데 약 16만 명을 조선에 투입하였고, 나머지 17만 명은 名護屋성과 각 영지에 대기시켰다. 명호옥성 안 밖에는 약 20만 명의 병력이 주둔 할수 있었다. 일본은 정유재란시 약 14만 명을 조선에 투입하였다. 일본이 조선에 투입한 병력은 임진ㆍ정유재란을 합하여 모두 30만 가량이었다.

 

 3) 명

 

 명나라는 건국 초부터 군호제와 둔전제를 바탕으로 세습적 직업군인제를 채택하였다. 명나라는 북쪽에서 끊임없이 국경을 침범하는 몽고족을 막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쌓고 국방력을 강화하면서 군호제 만으로 병사를 충당할 수 없게 되자 모병제를 통하여 군사를 보충하였다. 모병을 통하여 뽑은 군사들은 국가에서 각종 급여를 지급하여 그 가족의 생활까지 보장하였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시 약 5만 명, 정유재란시 약 10만 명의 군사를 조선에 보냈다. 도합 15만 명이 참전하였다. 참전 군인들의 절반 가량은 모병을 통하여 선발한 지원병이었다.  

  

댓글
아이디 비밀번호

다음글
임진왜란 이야기(10), 참전 3국의 경제와 군수체계 비교(2)_마지막회
이전글
임진왜란 이야기(9), 조선군의 보급 상황과 백성들의 고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