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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2.09.13
제목
[산골여행 12] 2월 27일, 마지막 회: 운명이 눈썹에서 떨어진다.  (1)
첨부파일
 

* 이정환 이사장이 지난 겨울 다녀온 산골여행 열두번째 글입니다.

 

 

 

「산골여행 12」

2월 27일, 마지막 회: 운명이 눈썹에서 떨어진다.

   

 

GS&J 이사장 이정환

 

 

 

돌아온 주말농장집 마당에는 올해도 복수초가 우뚝 모습을 드러냈다. 땅은 아직도 꽁꽁 얼어있는데 이 연약한 생명체가 그 땅을 뚫고 올라왔다. 때로는 눈에 덮이지만, 끄떡없이 견뎌낸다. 생명의 힘이다. 놀랍고 신비롭다,

 

 

마당에 복수초가 올라왔다. 잣 껍데기에 둘러싸여 보일 듯 말 듯 하지만 언 땅을 뚫고 우뚝 솟아올라 당당하다. 때로는 눈에 덮이지만 끄떡없다. 생명의 신비이고 긍지이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늦은 가을 이른 아침, 밭에 나가보면 무 배춧잎은 물론 무 머리 부분까지 얼어있지만 해가 뜨면 말짱하게 살아난다. 그러나 밭에서 뽑아 놓은 무 배추는 살아나지 못한다.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있음에 다시 소생하는 생명의 힘이 발휘되기 때문이리라. 생명의 모습은 항상 나에게 이렇게 감동을 준다. 쟁기로 갈아엎어 속살이 드러난 넓은 논과 밭, 배추와 벼가 너울지는 들판을 보면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벅차고, 주말농장 텃밭이 한없이 즐거운 이유이다.

 

정성 들여 가꾸어온 마당과 텃밭을 다시 마주하고 생명의 신비에 새삼스럽게 감동하면서도 집에 돌아온 후 알 수 없는 불안과 우울함이 나를 괴롭혔다. 잠도 깊이 들지 못했다. 급격한 환경변화에 몸과 마음이 적응하지 못하는 것일까. 뭔가 ‘동안거’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며 보냈다. 다행히 어제는 일찍 깊은 잠에 빠졌고, 오늘 아침 일어나자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러고 보니 동안거 내내 즐겁고 편안하게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남아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감, 하현달의 비감 등등 머리는 복잡하고, 어깨가 아파 이른 새벽에 깨기도 하면서 잠을 깊이 들지 못했던 듯하다. 암튼 오늘은 몸과 마음이 편해져 아침부터 ‘동안거’ 동안 적어 놓은 메모 등을 보며 정리작업을 하였다.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70여 년 삶의 기억과 50여 년 연구를 통해 내가 깨우쳐 가지고 있는 인식일 것이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서전과 전문적인 책을 쓸 수 있으리라. 긴 삶의 기억과 내가 깨우쳐 가지고 있는 인식, 그 두 가지가 바로 ‘나’이므로 그것을 쓰는 것은 나를 내보이는 일이다. 근데 그것을 책으로 써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 그것이 과연 재미있고 메시지가 있어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이 될까?

 

전문서? 인터넷에 지식과 정보가 넘치고, 구글과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하고 토론하는 시대, 종이로 된 책을 쓴다는 일이 의미가 있을까?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라는 말이 있다. 코끼리의 눈, 코, 꼬리, 심지어 털의 모습을 세세히 실시간으로 전하는 수많은 정보가 있더라도 이 생명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는 어렵다. 전체의 모습을, 가능하면 입체적으로, 그려야 코끼리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책을 쓴다는 것은 그런 의미, 그런 목적이 있다. 그런데 코끼리 전체 모습이 분명히 보이는 듯하다. 그 코끼리가 지급 우리 앞에 와있다. 그것을 전하고 싶다.

 

연구 생활 50년 동안 많은 보고서와 논문, 컬럼을 썼다. 공동으로 전문서도 몇권인가 발간하고 ‘농업의 심연을 향한 여행’이란 컬럼 집과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태양을 향해 달린다‘는 여행기도 썼다. 그러나 단독으로 쓴 전문서는 1998년에 쓴 ‘농업의 구조전환 그 시작과 끝’ 단 한 권이다. 이 책은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농업의 수많은 현상은 경제적 필연이므로 정책은 그 변화를 촉진하거나 파생되는 문제를 완화하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영국,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덴마크, 미국, 일본 등 7개국의 산업화 과정을 분석하고 우리나라 현실을 그 프레임 속에서 해석하여 정책의 방향과 역할을 제안하였다.

그 후 WTO 시대가 본격화하고 FTA 시대가 도래하였다. 우리나라는 ‘선진통상국가’라는 발전전략을 채택하여 2000년대에 그 변화의 선두에 섰다. 또한 식품의 안전성, 생태환경, 농업의 다원적 가치가 중요한 의제로 부상하였다. 그와 함께 4차산업혁명을 말하고 AI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최근에는 코로나 팬데믹과 미중 갈등으로 WTO의 자유화 이상이 흔들리며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게 되었다.

산업화에서부터 팬데믹 시대에 이르는 긴 과정에서 농업의 존재 이유와 정부의 역할을 시대의 흐름이라는 긴 시각에서 일관성 있게 파악하는 책을 쓰자. 전문가를 위한 책이 아니라 누구나 읽고 농업과 농정을 이해하고 현안에 대해 나름대로 의견을 말할 수 있는 토대를 얻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자. 4차산업혁명과 AI가 지배하게 된다는 21세기에 왜 농업을 말해야 하는지, 왜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지, 어떤 역할은 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정부 역할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시장개방을 농업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해야 하는지, 식량안보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하자. 농업을 미래 성장산업, 수출산업으로 육성하자는 말, 식물공장과 대체육이 재배업과 축산업을 대체하게 된다는 말, 우리나라 농업은 낙후되어 있다는 말, 농업은 공익적 기능을 수행하는 공익산업이라는 말, 식량안보를 위해서 밀 콩 등 곡물자급률을 높여야 한다는 말이 과연 맞는 말인지를 논해보자. 아마도 이 책이 나의 농업과 정책에 대한 통찰력을 시험하게 될 것이다. 제목은 ‘농업과 정부’로 하고 집필을 시작한다.

 

전문서는 그렇다 치고 자서전을 쓴다구! 역경을 이긴 인간승리의 감동도 없고, 역사에 남길 증언이나 새로운 자료는 더더욱 없다. 그런데 왜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재미있을까? 유익할까? 사람들이 즐겨 읽을까? 그렇지 못하면 결국 쓰레기를 만드는 일인데----

그러나 생각해 본다. 한사람이 살면서 느끼고 생각하고 깨달은 것을 기록한 산문이 읽는 사람에게 감명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메시지가 있고 진정성이 있고 소설적 요소까지 있다면.

인생은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상상을 뛰어넘는 기회와 행운이 오고 간다. 노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성취가 있는가 하면 간절히 원하고 노력해도 잡히지 않는 것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운명은 사주팔자가 아니다. 예정된 것,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크고 작은 기회가 온 순간 이를 담을 그릇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준비한다’고 했으나 그 그릇은 그 순간까지의 그의 삶 모든 것이 녹아 있는 지식, 능력, 소양, 품성 등 한 인간 모든 것의 결과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 순간 형성되어 있는 그릇이 마침 다가온 기회를 담을 수 있는 크기와 모양일까? 그것은 우연이고 운명이다.

그러나 기회가 오는 것은 더 큰 우연이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농구황제 조던의 성취는 그의 노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우연의 결과라고 말한다. 미국 사람들이 농구에 열광하는 시대를 만났고, 그것은 그의 노력과 관계없이 나타난 우연한 사회현상이라는 것이다.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50이 넘어 그 실력을 인정받는 기회를 잡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방송국이 그 오디션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은 그와는 전혀 관계없이 나타난 우연이다. 그래서 인생은 운명이고, 그래서 성취에 대해서 항상 겸허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고통과 불행이 찾아들고 사라진다. 학생 때 읽은 소설 ‘젊은 사자들’이 잊히지 않는 것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한 소대원 모두가 맞닥뜨린 전투에서 전멸하는 장면 때문이다. 전쟁이 발발한 것--긴 역사의 그 순간에, 그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생각, 믿음, 주장, 욕망으로 마침 그 순간에 전쟁이 발발한 것! 그리고 그 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혀 다른 계기와 길을 거쳐 그 자리에 온 것, 그리고 맞닥뜨린 전투! 그저 우연, 운명이라는 것 외의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나의 책에서 말하고 싶은 또 하나는, 인생은 사람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만난 첫 번째 사람, 어머니와 아버지부터, 내가 누구를 만나는지 그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가 내 운명을 결정한다. 별같이 많은 사람 중에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을 통해 기회가 오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만남은 운명이다. 나는 이선희의 ‘그중에 그대를 만나’를 노래로서 좋아하지만 동시에 그 가사에 깊이 매료된다. “별같이 많은 사람 중에 그대를 만나 서로를 꿈같이 알아보고----, 그것은 기적이었어--”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그중에 그대를 만나’로 하고 싶다.

이 책을 쓰는 또 하나 이유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용도 인망을 얻어야 승천한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라고 가르치셨던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다. ‘신은 우주와 생명의 규칙, 바로 그것’ ‘일을 멈추면 곧 목숨이 다한 것’이라고 하시던 아버지에게 바치고 싶다. 두 분의 가르침이 이 책의 마음이기도 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물론 생전에도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내 삶과 느낌, 생각, 후회와 한을 말씀드리고 싶다.

 

‘농업과 정부’를 2023년까지 발간하고, ‘그중에 그대를 만나’는 2026년을 목표로 작업한다. 그리고 나면, 아니 그러면서 뭔가 농사일, 먹거리 일을 잘해보고 싶다. 우선은 주말농장 텃밭과 마당 가꾸는 일을 더 열심히 하면서 생각해 보자. 혹시 ‘이화에 월백하고’처럼 일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조그만 사업이나 나에게 남아있는 것으로 잘할 수 있는 봉사 활동을 발견한다면 그것도 좋다. 아무튼 이 모든 일은 원초적 공감(primal sympathy)과 평정심(smoothing thoughts)으로 철인의 마음(philosophic mind)에 이르는 과정이 되고 싶다. 과연 이 모든 계획을 이룰 수 있을지, 심신이 지쳐 이 계획이 가을 잎 떨어지듯 메말라 스러질지, 그냥 세월은 흐르고 어느덧 모든 것이 잊힐지, 시간이 탈고를 기다려주지 않을지, 두렵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운명일 것이다. 어머니는 ‘운명이 눈썹에서 떨어진다’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저 시작할 뿐이다.

 

tang7  [date : 2022-09-14]
마무리 글이 너무 멋집니다! 책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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