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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3.03.27
제목
[이정환의 겨울산골 살기 4] ‘고메똥골’에서 ‘소똥령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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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환 이사장의 겨울 산골 살기 네번째 에세이입니다.

 

 

「이정환의 겨울산골 살기 4」

‘고메똥골’에서 ‘소똥령이야기’로

    

 

GS&J 이사장 이정환

 

 

곰배령 밤하늘

 

오늘이 곰배령 골짜기 15일 차다. 내일은 진부령으로 간다. 마지막 만찬은 나의 주특기 요리인 바지락 새우찜이다. 후라이펜에 올리브유를 듬뿍 붓고 통마늘을 큼직큼직하게 썰어 넣어 마늘 기름을 낸다. 마늘이 누리끼리해지면 양파와 방울토마토, 냉동 바지락과 새우를 넣어 볶는다. 그리고 물을 조금 부어 자박자박하게 한 후 소금으로 간을 하면 기가 막힌 와인 안주이자 애피타이저가 된다. 그 후라이펜에 소고기 한 조각을 구어 내고, 밥은 어제 밥공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둔 것을 전자레인지에 1분이면 오케이! 곰배령으로 오면서 집에서 와인 두 병과 소주 두 병을 가져왔다. 그동안 소주 두 병은 다 마시고 와인은 반병 이상 남았다. 술을 좋아하는 것에 비하면 금주에 가까운 근신을 한 것이다. 내일 진부령으로 가면서 슈퍼에 들러 중간 보충할 예정이므로 남은 와인은 다 마셔도 된다.

와인 다 마시는 건 좋은데 2주가 넘는 동안 한 것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끼 밥해 먹고 산책하는 데 대부분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이렇게 유유자적하는 것이 동안거야. 아등바등할 일이 아니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불현듯 좀 불안하고 우울해졌다. 콜니 드라이, 자클린의 눈물, 망각, 운명의 힘 서곡 등 좀 멜랑콜리한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다 마셨다. 그리고 밤하늘을 보러 나갔다. 별들이 많지만 역시 어렸을 때 보았던 그 기억에는 미치지 못해 아쉬웠다. 그러나 가만히 바라다 보니 별 주변이 조금 뿌옇게 보였다. ‘맞아, 저 별들이 다 성운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야. 조금만 더 맑았다면 저 뿌연 부분이 모두 작은 별로 드러나 하늘이 온통 별로 뒤덮여 보였을 거야. 다른 데서 못 보던 성운이 본 것도 대단하지 않은가’라고 멋대로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음을 추슬러 다시 2주간 한 일을 되짚어 본다. 우선 그동안 썼던 칼럼과 「시선집중」을 다시 읽으며 내가 지난 17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점검해 보았다 (처음엔 꼼꼼히 읽다가 점점 대충대충 훑었지만^^). 칼럼은 148편을 썼다. 그중에 농가에 조언이랍시고 한 말인즉슨 맞는 말이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라 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았고, 실제 그런 댓글도 있었다. 정책에 대한 조언과 달리 현장에서 하루하루 삶을 다투는 농가에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집중」도 145편을 단독 혹은 공동으로 발표했다. 양도 많고 주제의 범위도 넓었다. 쌀 직불제의 증산 효과에 관한 분석은 최근 생각과 차이가 있었으나 대부분 내용은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고 모두 적지 않은 조회 수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나의 연구로 정책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정책담당자나 사람들의 생각과 선택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까? 결국 자기만족이었나? 라는 허탈감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금 계획하는 책 ‘농업과 정부’는 누구나 읽고 쉽게 내 생각과 주장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행동할 수 있게 쓰자. 그래서 이 허탈감을 씻을 수 있게 하자.“ 그 여세를 몰아 세부 목차는 만들었지만, 초안 쓰기는 별 진전 없이 마지막 밤을 맞았다. 그래서 보름이 지난 지금 허전하다.

   

문단속 못한 주인의 책임이지만

 

그 야단을 해서 준비해온 책도 ‘하얼빈’과 ‘벽을 통해 드나드는 남자’ 겨우 두 권을 읽었다. 하얼빈은「남한산성」의 작가 김훈 작품답게 울림이 있었다. 그 간결한 문체가 힘을 더했다. 조선 왕실과 조정 대신은 전투 한번 없이 일본에 나라를 넘긴다. 세계사에 전례가 드문 일이다. 그리고 일본 황실에 머리를 조아린다. 그러나 조정에 핍박받던 민초들이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죽고 도망가다 죽고, 잡혀서 죽는다. 의병의 효과에 비관한 안중근 의사는 이 비극의 원흉을 제거해야 조선과 동양에 평화가 온다는 믿음으로 하얼빈으로 달려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다. 일본은 재판과정을 통해 무지한 식민지 과격분자의 테러로 각인시키려 한다. 안중근 의사가 믿었던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와 주교는 근대화의 혜택을 거부하는 피식민지의 공통된 안타까운 행동이라고 탄식한다. 식민주의 논리에 가담한다. 그리고 안의사 사후 부인과 자식들의 삶에 대한 기록은 읽다가 덮어버리고 싶을 만큼 안타까웠다.

안중근 의사의 믿음, 조선 왕실의 행동, 천주교 신부와 주교의 생각, 일본 정부의 주장, 어느 것이 맞나? 이 질문은 조선의 국권 상실이 일본 책임인가? 조선 책임인가? 당시의 세계적 식민주의 책임인가? 일본 식민지 지배가 혜택이었나? 수탈이었나? 하는 현재의 공방과 맞닿아 있다. 나는 조선의 국권 상실은 나라를 지킬 힘도 의지도 없었던 조선 조정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아 불한당에 집을 빼앗겼다면 전적으로 그 집 주인의 불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의 집을 차지하고 여자를 욕보인 것은 명백한 범죄이다. 당시의 세계사적 조류나 조선 왕실의 무능이 일본의 범죄를 가볍게 할 수 없다. 그것이 인류 문명이 도달한 합의라고 믿는다. 일본은 그 범죄를 분명히, 언제까지나 인정해야 한다. 곰배령의 마지막 겨울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뭔가 하나 챙기고

 

아침부터 서둘러 간장, 된장, 고추장, 올리브 오일, 김치, 양파, 대파, 냉동 바지락과 새우 등 두 보따리나 되는 먹을거리 짐을 싸고 옷가지와 빨랫감을 트렁크에 챙겼다. 그리고 주인집 거실에서 ‘겨우살이 차’를 한잔 마시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일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다 힘들지만 이불 빨래가 제일 시간이 많이 든다고 했다. 손님이 나가면 바로바로 빨아 바꾸려니 힘들지만 그래서 손님이 많은 것 아니냐고 위로의 말을 하고 ‘소똥령이야기’로 출발한다.

그런데 일단은 마을 끝에 있는 ‘산골나들이’로 향했다. 산책길에 본 이 식당이 전국 100대 식당에 오를 만큼 평판이 좋다고 하여 떠나기 전에 꼭 들러 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인 할머니랄까 아주머니는 표정이나 목소리가 소녀 같으나 기품이 있었다. 아침 메뉴는 산채 나물에 토종 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 맛은 깔끔하고 특히 평양식 김치 맛은 일품이었다. 아버지가 평북 용천 출생이고 어머니는 홍천 사람이라는데 평양식 김치를 담근다니 신기했다. 된장, 김치는 물론 거의 모든 재료를 스스로 만들며 이 자리에서 15년 식당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뭔가 하나 챙긴 것 같은 뿌듯함을 안고 이제 진짜 진부령으로 간다.

 

낙산사를 잊을 수 없는 이유

 

네비는 양양 속초를 거쳐 미시령 터널을 지나 진부령으로 가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으니 낙산사를 지나칠 수는 없다. 내가 50이 넘어 어머니 모시고 낙산사 요사채에 묵으며 새벽 예불을 드렸던 기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부처님에 대한 신앙이 깊어 절에 가시는 것을 좋아하셨지만 나이 든 아들과 둘이서 이 멋진 절에 오신 것을 정말 뿌듯해하셨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시흥 본가에서 혼자 사시던 시절 그 외로움을 자식 된 도리로서가 아니라 공감하여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위로해 드리지 못한 회한이 나를 괴롭히곤 한다. 그러나 낙산사 요사채에서 나란히 누워 잠을 자고 같이 아침 예불을 드렸던 기억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되어 낙산사를 잊을 수가 없다. 낙산사를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다. 새벽 3시에 도량석이라 부르는 목탁 소리에 잠이 깼다. 그리고 4시에 모든 스님이 장삼에 가사를 걸치고 법당에 모였고 어머님과 나도 법당 구석에 앉았다. 스님들이 ‘지심귀명례’(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로 시작하는 아침 예불을 묵직한 음성으로 합창한다. 그 모습, 그 소리는 어떤 실내악단의 연주보다 감동적이었다. 그 후 큰 절 근처에 묵을 때 두어 번 아침 예불에 참석했다. 신앙심은 없으나 그 분위기가 너무 좋고 또 어머니를 마음 깊숙이 추억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것은 모두 나만의 추억이자 감상일 뿐, 보타전 앞마당의 매화는 봉우리를 터뜨려 매혹적인 모습을 내보이고 방문객들은 모두가 분주하게 오간다. 오늘 아침 떠나온 눈 덮인 곰배령과는 정말 딴 세상이었다.

 

 

그동안 밀린 빨래를 하고 먹을거리도 보충해야 하므로 속초 시내로 들어갔다. 빨래방은 쉽게 찾았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라 어리버리했으나 어찌어찌 세탁기에 빨랫감을 집어넣고 근처 이마트에 갔다. 방울토마토, 계란, 쇠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샐러드 믹스 등 열흘 먹을거리는 충전했다. 길게 줄을 늘어선 계산대를 겨우 빠져나와서 차로 가다 보니 아이고 정작 중요한 와인과 소주 충전을 깜박! 내가 하는 일이 노상 이 모양이라니까. 매장으로 되돌아가 다시 긴 줄 계산대를 거쳐 나와 빨래방으로 허겁지겁 돌아갔다. 늦게 와서 세탁기가 잠겨버린 것은 아닐까 하며 새가슴 할배가 겁을 냈으나 아무 일 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건조기로 옮겨 넣고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펜션이고 바로 앞이 속초 해변이었다. 양양 속초가 서핑 성지가 되어 여름에는 젊은이들이 몰려든다더니 여기가 거기인가 보다. 영화나 포스터에서나 보던 서핑이 우리 젊은이들이 즐기는 스포츠가 되었다니 놀랍고 역시 우리나라는 대단하다.

 

보부상 넘나들던 진부령 또한 잊을 수 없다.

 

미시령으로 향하는 차장에는 눈 덮인 장엄한 설악산 연봉이 펼쳐지고 울산바위의 위용이 다가선다. 생각하지 않았던 경관을 선물 받고 기분 좋게 진부령을 달려 올라갔다.

 

 

 진부령! 내가 대학 1학년 여름방학에 친구 재진이와 이미 고인이 된 영용이 셋이서 무전여행을 떠났다. 휴전선 아래 최북단에서 동해안을 따라 고성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 등 관동팔경을 돌아보며 부산까지 돈 들이지 않고 가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그리고 서울서 고성행 시외버스를 타고 첫 번 목적지 화진포로 향했다. 버스는 당시 편도 비포장도로였던 진부령을 털썩 들썩 고불고불 흙먼지를 내며 넘었다. 우리는 무전여행 중이라 버스비가 없다 하고 차장 아가씨는 안된다며 당장 내리라고 했지만 결국 고성까지 데려다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임승차 경범죄로 경찰에 인계되지 않으면 다행인 무지막지한 행동이다. 더구나 당시로는 선망의 대상인 대학생이 즐거운 여름방학 여행을 가면서 먼지 풀풀 길을 덜컹덜컹 매일 왕복하며 고달픈 하루하루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을 또래 친구를 괴롭힌 것이다. 정말 미안하고 그러나 정말 고마운 그 차장 아가씨는 편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을까. 이번 ‘동안거’ 일정을 짜며 진부령에 자꾸 마음이 끌린 것은 그런저런 추억이 나를 잡아당겼기 때문이리라. 오늘 진부령 길을 달려 올라오며 공연히 마음이 짠한 것도. 정상에 오자마자 같이 이 고개를 넘었던 이재진에게 전화부터 한 것도.  

진부령 정상에 있는 1989년 표지석에는 이 길이 조선시대 동서를 잊는 가장 편한 통로, 보부상이 등짐 지고 넘나들던 오솔길이었다고 적혀있다. 1930년 비포장 편도선으로 확장하였고, 1987년에야 2차선 포장도로가 되었다고 하니 내가 이 고갯길을 넘은 1965년, 먼지 풀풀나는 비포장 도로로 기억하는 것은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근데 이 도로가 46번 국도란다. 아니 그럼 내가 60년 전에 46번 도로를 타고 화진포로 갔단 말야! 요새 매주 남양주 주말농장 가느라 오가는 길인데. 알고 보니 46번 도로는 인천에서 출발하여 마포를 지나 광나루, 춘천, 양구를 거쳐 인제, 고성으로 이어지는 동서 횡단로였다.

 

 

아마도 보부상들이 제물포, 마포나루에서 남도 물건을 받아 짊어지고 당시는 오솔길이었을 이 46번 길을 걸어 고성 속초 동해 바다마을로 갔으리라. 그리고 동해 건어물을 짊어지고 또 이 길을 따라 마포나루 제물포로 걸어갔겠지. 그렇게 보부상들의 수많은 사연이 쌓여있고, 내가 18세 청년으로 야심 찬 무전여행을 떠났던 잊을 수 없는 길인데, 그것도 모르고 그저 경춘국도로만 알고 주말마다 오갔으니 너무 뭘 모르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진부령 정상 휴게소 주변을 둘러보니 미술관이 보였다. 신기했다. 그런데 미술관 입구 홀에는 김승호, 황해, 허장강, 도금봉, 최은희, 문정숙 등 나의 어렸달까 젊었달까, 그 시절 대스타들의 빛바랜 사진이 벽면 한쪽을 꽉 채우고 있어 또 한 번 신기했다. 그리고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하숙생’ ‘실낙원의 별’ ‘자유부인’ ‘노다지’ 등의 선전 포스터가 그득하여 시선을 끌었다. 60여 년 전 한 달 간의 무전여행이란 설렘을 안고 넘었던 그 추억의 고갯길에서, 그때 그 시절 가슴을 설레게 했던 영화와 스타들을 만나는 행운을 만나다니! 그러고 보니 영화 ‘노다지’에서 골짜기에 망연히 앉아 돌을 던지던 엄앵란이 모습을 한참이나 잊지 못했던 기억도 아스라이 떠오른다.

 

 

소똥령이야기

 

진부령 정상을 넘어 조금 더 내려가자 4일간 묵을 예정인 ‘소똥령이야기’ 펜션이 왼편에 나타났다. 안내해준 방은 바로 앞이 자그마한 잔디밭이고 나지막한 동산이 보이는 별채 황토방이었다. 천장은 통나무 서까래를 방 중앙의 굵직한 기둥으로 버팅겨 층고를 높인 6각형 멋진 방이었다. 주방의 식기와 조리 기구도 일품이었다. 우리나라 산골 펜션의 수준에 감탄한다. 우리나라는 역시 대단하다. 주인은 정갈스럽게 무친 다섯 가지 나물을 칸이 진 유리 접시에 가지런히 담고 가운데 비빔장까지 갖추어 갖다주며 환영하여 주었다. 너무 좋다. 그런데 짐을 풀고 보니 ‘고메똥골’ 수납장 구석에 두었던 쌀을 깜박하고 왔다. 당장 저녁이 난감했다. 주인은 무슨 걱정이냐며 쌀 큰 되 하나는 될 양을 갖다주었다. 그리고 자기네가 받은 것이라며 고로쇠 수액 한 병도 주었다. 아, 정말 인심 좋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살고있는 나는 행복하다!  

그런데 곰배령에서 머물던 황토방이 ‘고매똥골’이었는데 여기는 ‘소똥령이야기’라니 또 ‘똥’인가! 사연은 이렇다. 진부령 길이 나기 전 그 소싯적에 고성에서 인제로 가는 고갯길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인제가 강원도 북부의 중심지여서 여기저기에서 인제로 오가는 오솔길이 있었던 것 같다. 양양에서 인제로 가는 곰배령 길이 있었다면 고성에서 인제 가는 고갯길도 있었다. 소에 등짐을 지워 가다 이 고갯마루에서 쉬어가게 되었는데, 아마 주막도 있었겠지, 소들이 쉬며 싼 똥이 고갯마루를 덮었다. 사람들이 소통이 많은 고갯길, ‘소똥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곰의 똥이 많아 ‘고메똥골’이라 했듯이. 아무튼 고갯길 이름이 너무 정겹고, 그 이름을 따서 이 근처 마을은 소똥령마을, 펜션은 ‘소똥령이야기’ ‘소똥령가는길’ 등으로 이름 붙였다고 한다. 내가 그중 한 곳에 묵게 된 것이다. 아무튼 곰의 똥이 많은 골짜기에서 소똥이 많은 언덕으로 온 것이다.

진부령은 곰배령보다 훨씬 북쪽인데 어찌 된 건지 곰배령에 비하면 봄날이었다. 백두대간을 경계로 강원도가 영동과 영서로 나뉘어 인제를 위시한 영서 산골은 혹독하게 춥지만, 속초 등 영동은 동해 바닷바람을 맞아 서울보다 따뜻하다고 한다. 소똥령마을도 동해의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이미 잔설이 아쉬운 계절이 된 것이었다. 낙산사에는 매화도 피고.

 

아, 이 아름다운 깊은 산골 자연이

 

다음 날 알프스 스키장으로 산책을 갔다.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스키장이었으나 지금은 폐장되었다. 용평 등 대관령 스키장에 밀리기도 했지만, 스키 인기가 예전 같지 않아서일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는 스키와 테니스가 정말 인기 최고의 스포츠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인기가 시들었단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고 이 선망의 스키장이 폐쇄의 운명을 맞았다니. 그러나 지금도 마을 입구에는 간판이 붙어있는 상점이 즐비하여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복장의 스키어들로 북적였을 리조트 마을이 한 시간 정도 둘러보는 동안 딱 한 사람을 만났을 뿐인 유령촌이 되어 있었다. 콘도 건물은 흉물이었다. 눈에 덮여 그 참담한 모습 일부는 감추어져 있었지만, 우리의 혼을 빼앗았을 만큼 아름다웠을 백두대간 깊은 산속 자연이 이렇게 흉물이 되다니! 여기가 다시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을 되찾는 때가 올까?

 

 

 

산골 마을의 두 가지 모습

 

다음날 산책은 소똥령마을로 갔다. 내가 묵고 있는 황토방도 소똥령마을이지만 본 마을에서는 한참 떨어져 있다. 소똥령마을은 마을 입구에 있는 장신유원지가 캠핑촌으로 유명하고 교육농장, 체험농장 등이 늘어선 농촌관광 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이라서 방문객은 거의 안 보이고 시설물들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스산한 느낌이다. 마을회관, 커피 솦을 겸한 듯이 보이는 안내동, 공동화장실, 캠핑장 등이 모두 덩치는 크고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산골 마을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려워 아쉽다. 조금 마을 뒤쪽으로 가면 쓰레기와 폐농기구 등도 여기저기 보여 스산함을 더한다. 농촌 마을을 관광마을로 개발할 때는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건물 시설물 하나하나를 디자인해야 한다. 그리고 쓰레기와 폐기물 처리 시스템을 갖추어 항상 깔끔한 농촌 자연의 모습을 보전해야 한다. 언젠가 방문객은 사라지고 알프스 스키장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없듯이 마을의 운명도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자연 속에서 자연을 보전하며 부가가치를 구하는 활동을 해야 하고, 또 그래야 그런 운명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 오솔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자 산골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길게 뻗은 오솔길과 잔설이 수놓은 논과 산, 게다가 자작나무 한 그루가 그 흰 몸통을 눈부시게 드러내고 오솔길에 서 있다. 기막힌 경관이다. 아, 역시 자연은 아름다워라!

 

 

 

 

  

 (2023. 0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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