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J 이사 김한호(서울대 교수)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하기 전까지 농업정책은 국제 규범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었다. 각국 정부는 자국의 농업 여건에 맞춰 독자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대체로 선진국일수록 보호주의 성격이 강한 농업정책을 펼쳤다. 당시 세계 농업정책은 크게 미국형과 유럽형으로 나뉘었다. 두 유형 모두 농업 보호를 목표로 했지만 정책 수단은 달랐다. 미국형은 재정 지출 중심이었고 유럽형은 시장가격 지지 중심이었다.

미국형은 국내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고 생산자와 소비자는 낮은 국제 시장가격으로 농산물을 거래하도록 했다. 다만 생산자는 정부가 약속한 목표가격과 판매가격 차이를 재정으로 보상받았다. 반면 유럽형은 시장을 폐쇄하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높은 목표가격으로 거래하도록 했다. 소비자가 높은 가격을 감내함으로써 생산자를 보호하는 구조였다. 당연히 유럽형이 국제 시장을 훨씬 더 크게 왜곡하는 정책으로 평가받았다. 이 두 정책 모델은 역대 최대 규모의 국제통상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에서 충돌했다. 협상은 시장 왜곡 정도가 상대적으로 적은 미국형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타결됐다. WTO 체제가 출범하면서 인정한 ‘직접지불제도’가 그 결과물이다.

WTO 체제 이후 30여 년이 흐르며 선진국 농업정책은 상당 수준 국제표준을 이루었다. 농가의 소득·경영 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고정 목표가격이 아닌 과거 수년간 시장에서 형성된 평시 가격의 일정 수준을 보장하는 게 표준의 큰 줄기이다. 이는 생산자가 시장 기반 수급 조절에 참여하고 일정 수준의 소득·경영 안정을 지원받는 정책이다. 정책 수단으로는 보험 방식을 주로 활용한다. 개별 농가 특성에 따라 보호 수준을 선택·참여하는 ‘농업수입안정보험’이 대표적이다. 이에 더해 생산자 자조 조직을 육성해 생산자 주도 수급 관리도 돕는다. 이렇게 정부, 생산자 조직, 개별 농가가 책임을 나누며 소득·경영 안정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농업정책은 국제표준을 이루어 왔다.

한국 농업정책도 지난 반세기 동안 꾸준히 진화했다. 1961년 ‘농산물가격유지법’은 농가 소득·경영 안정 정책의 출발이었다. 정부 주도로 주곡을 비싼 값에 사들여 싼 값에 팔아 생산자와 소비자를 동시에 보호하는 ‘이중곡가제’가 이때 도입됐다. 그런데 WTO 체제에서 이 제도는 지속이 어려워 1997년 직접지불제도로 대체해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런 가운데 한국 정부도 마침내 농정의 국제적 추세에 따르게 됐다. 농업수입안정보험 도입 필요성에 따라 2015년 시범 사업 시작 후 10년 동안 현장 실증과 제도 개선을 병행해 왔다.

그동안 시범 사업에서 얻은 경험과 자료를 바탕으로 올해 농업수입안정보험 본 사업을 시작한다. 품목별로 기준 수입을 설정하고 실제 수입이 그 이하로 떨어지면 차액을 보험금으로 지급한다. 이때 기준 수입은 직전 과거 5년 시장가격을 근거로 산출한다. 이렇게 시장가격에 근거해 기준 수입을 설정하면 과잉생산을 최소화할 수 있다. 농가는 보험에 가입할 때 60~85% 범위에서 보장 수준을 선택한다. 예를 들어 80% 보장 수준을 선택하면 실제 수입이 기준 수입의 80% 미만일 경우 80% 해당 금액과 실제 수입의 차액을 보험금으로 받는다. 농가는 자기 특성에 맞게 보장 수준을 선택하고 일정의 책임을 분담한다.

농업수입안정보험이 정착하기까지는 다양한 현장 애로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정책적 인내가 필요하다. 또한 현행 정책의 조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보조형식의 유사 목적 정책을 병행한다면 정부 재정의 중복 투자, 정책 간 유불리와 그로 인한 현장 혼란 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다. 정당을 넘어 농업정책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농가 선택과 책임을 근간으로 하는 농업수입안정보험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출처: 조선일보] 원문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