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과 농정에 대한 '무한 토론의 장'을 만들자

GSnJ 이사장 이정환

   반년 이상 끌어온 쌀 협상 비준안이 겨우 국회를 통과하여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느닷없이 관세화로 가게 되는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전국적으로 격렬한 시위가 벌어져 부상자가 속출하고 농업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농업인은 정부와 농정에 대해 더 큰 불신을 갖게 되었고, 정부는 토론과 협의를 거쳐 정책을 추진한다는 이른바 참여농정의 가능성에 더욱 깊은 회의를 갖게 되었다.

  내가 만난 한 농업인은 “정부가 우리를 속이고 드디어 우리를 버렸다” 고 분노하고 있었고, 정부의 한 간부는 “정말 지치고 힘들다. 밤낮 가리지 않고 일 했는데 농업인들의 거친 힐난 앞에 긍지와 보람이 다 무너져 버렸다”라며 좌절하고 있었다. 정말 매우 근심스런 일이다. 쌀 협상 비준안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 이런 불신의 구조 속에서 외국과 치열하게 협상을 하고 시의적절하게 현명한 선택을 해 나갈 수 있을까?  

  도하개발아젠다(DDA)협상에서 관세를 대폭 감축하되 일부 품목을 민감품목과 특별품목으로 지정하여 최대한 신축성을 확보하는 타협안을 수용할 것인가? 민감품목 혹은 특별품목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개도국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무언가 양보해야 한다면 어떤 것을 내줄 것인가? 협상 결과 쌀의 관세화 유예를 중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관세화로 전환할 것인가? 농가소득보전 직불제도 등은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무역으로 먹고 살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자유무역협정(FTA)을 무조건 저지하여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떠안을 것인가? FTA를 수용하는 경우 어떤 협상 조건과 국내 대책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할 것인가? 모두가 민감하고 농가 간에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릴 수 있는 문제들이다.

  이러한 어려운 선택의 순간이 오기 전에 충분히 논의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틀을 만들지 못하면 불신과 반목만 거듭하여 정부는 실익을 챙길 수 있는 협상의 기회를 놓쳐 버리고 결국 농업인만 더욱 더 어려워지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제 쌀 협상은 역사에 묻고 새로운 논의의 틀을 만드는데 모두가 나서야 한다.   

  정부는 협상과 정책의 최대 이해 당사자는 농업인임을 인정하고 모든 것은 농업인과의 협의와 합의를 통해 추진한다는 원칙을 명백히 하자. 이러한 원칙 아래 공식 비공식, 공개 비공개, 고위급 실무급의 토론을 몇 날 며칠 밤낮없이 무제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자. 119조원의 범위 내에서 어디에 얼마를 쓸 것인가는 농림부가 농업인과의 협의를 통해 독자적으로 결정한다는 원칙도 분명히 하자. 

  농업인은 정부가 농업인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납세자의 이익도 보호되어야 함을 인정하자.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과 대안, 합의를 위한 요구 사항을 명백히 제시하고 그 요구 사항에 대하여도 무제한 토론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자. 이런 저런 이유로 토론과 협의를 거부하지 말자. 농민 단체 사이의 이견도 토의를 통하여 단일화하고 그 요구 사항이 수용되는 경우 그 결과에 대해 정부와 같이 책임을 분담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자.

  물론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불신과 갈등의 골이 깊고 토론과 합의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못하므로 이러한 논의의 틀이 순항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서로의 진정성만이라도 인정하게 된다면 분노하고 좌절하는 일이 줄어들고, 뻔히 보이는 실익을 놓쳐 훗날 모두가 후회하고 원망을 듣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