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이후 정부는 구조조정을 통한 경쟁력 향상을 농정의 목표로 설정하고 수백가지 재정지원 사업을 추진했다. 그런 재정지원에도 불구하고 자유무역협정(FTA)이 추진될 때마다 농가가 이에 격렬히 저항하자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보다 작은 네덜란드는 세계적 농산물 수출국이 됐는데 한국농업은 왜 이렇게 무능력하고 게다가 부도덕하기까지 하냐”고 구박했고, 농업계는 주눅들 수밖에 없었다. 과연 한국농업은 구박받을 만큼 정말 초라하고 형편없는가?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로 시장개방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95년 이후 농업생산은 21%나 증가했고, 노동생산성도 연평균 4.8% 증가해 비농업 부문의 증가율 3.4%보다 훨씬 높았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토지생산성은 네덜란드에 뒤지지 않아 국민 1인당 농지면적이 네덜란드의 4분의 1밖에 안 되어 세계에서 가장 작지만 쌀과 채소·과일·축산물의 상당 부분을 자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또 농업구조가 수십년간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농업생산의 대농 집중도가 1995년 이후 무려 4~7배나 높아질 만큼 구조변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됐다는 사실도 대부분 모르고 있다. 　

 부가가치 1단위 생산에 투입되는 비료·농약·사료 등 중간재 투입량은 13% 감소했고, 농기계 등 고정자본과 고용노동 투입량은 40%나 줄어들 만큼 생산의 효율성이 향상됐다. 수입농산물과 국내산 농산물의 가격 차이가 몇배나 되고 수입량이 늘어도 국내산 가격이 별로 떨어지지 않을 만큼 국내산 농산물의 소비자 가치가 높다. 　

 그렇다면 농가는 왜 시장개방에 저항하는가? 그것은 농업의 교역조건이 너무나 급격히 악화돼 생산성이 증가됐음에도 실질 농가소득이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5년 이후 농산물 가격은 27% 상승하는 데 그쳤으나, 중간투입재 가격은 126%, 농기계 가격은 95%, 소비자물가는 72%나 상승했다. 이 같은 교역조건 악화는 다른 산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인데, 이는 1995년 이후 농산물 수입이 77%나 증가하고 이에 대응하여 농가는 생산을 20% 이상 늘렸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농업은 물가를 낮추고 소비자 후생을 높이는 데는 크게 기여했으나 실질 농업총소득이 39%, 무려 9조6,000억원이나 감소하여 도농간의 소득격차는 물론 농가간 소득격차도 급격히 확대됐다. 사정이 이러한데 농업이 물가상승의 주범이고 농가는 부도덕하다고 구박하다니!

 요컨대 생산성 향상과 구조개선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음에도 농업의 교역조건이 급격히 악화돼 농가소득 문제가 발생한 것이므로 농업이 구박받고 주눅들 이유가 없다. 문제는 정부가 농업문제를 구조조정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설계주의적 입장에서 수많은 재정지원 사업을 추진하여 재정소요만 증가시키면서 한편으로는 농가소득 문제를 단순한 통계상의 착시 현상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그 결과 농가소득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여 FTA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고, 경쟁력 향상을 위한 재정지원으로 생산과 투입이 과도하게 자극되어 환경문제가 심화될 뿐만 아니라, 농산물의 안전성에 대한 소비자의 불안감이 높아져 농정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이제 우리는 농업의 비전과 정부의 역할을 새롭게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되고 지난 30여년 동안 한국농정이 매몰되어 왔던 설계주의적 구조농정에 종언을 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