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nJ 농정전략연구센터 소장  고영곤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마치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넓은 주차장 한쪽에 있는 조그만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가게 입구에 붉은 건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또 다른 쪽에는 건마늘 엮음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가게의 위치가 오스트리아인지 헝가리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헝가리 국민은 95%이상이 마자르(magyar)족인데 이들이 쓰는 마자르어는 우랄알타이계의 언어로서, 사람 이름의 표기에 있어서도 대부분 서양에서 이름이 앞에 오고 성이 뒤에 오는 것과 반대로 성을 먼저 쓰고 이름이 뒤에 오는 등 동양적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아들을 낳으면 문 밖에 고추를 내 거는 것이나 아기들에게 몽고반점이 있는 것은 다 마자르족의 나라 헝가리를 ‘유럽속의 동양’이라고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이 가게의 건고추와 건마늘도 동양적 냄새를 물씬 풍긴다. 마자르인들이 즐기는 수프 ‘굴라쉬’는 우리나라 육개장 맛과 비슷하고 종종 서울의 호텔에서도 맛을 볼 수가 있다. 이런 동양적인 친근감에다 15세기 후반 마티아시1세 집권당시의 헝가리는 유럽 중부의 최강국이었으나 그 후 끊임없는 외세 침략에 시달려 온 역사가 어쩐지 우리와 비슷한 것 같아 애잔한 느낌도 든다.  

그 피의 역사 속으로

  헝가리는 13세기 몽골족(칭기스칸)의 침략을 받지만 15세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마티아시의 통치기간에는 화려한 문화와 강력한 국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1541년 터키의 침공으로 나라가 3분할되면서 국토의 대부분은 터키에, 일부는 합스부르크가에 내주고 나머지는 헝가리인이 점유하지만 이로부터 약150년의 기간은 사실상 터키 지배기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686년 터키의 철수는 합스부르크에 의한 헝가리 통일로 나타났고 결국 헝가리는 다시 150년간의 합스부르크 지배하에 놓이는 운명이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 아들 조세프2세(JosephⅡ)등이 헝가리 국왕으로 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1848년 합스부르크에 저항하는 독립전쟁이 일어나고 승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1년도 안되어 헝가리군은 합스부르크와 러시아 연합군에게 완전히 항복하고 그 보복으로 독립군 지도자들은 처형당하는 치욕을 겪는다. 그리하여 합스부르크의 강압적인 지배가 20년 가까이 계속되다 결국 1867년 두 나라간의 대 타협으로 이른바 합스부르크-헝가리 이중제국이 되어 합스부르크 왕조가 끝날 때까지 50년이 지난다.

  20세기에 들어와 1차 대전이 일어나자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 독일편에 섰다가 결국 패전국이 되어 1920년의 트리아농조약으로 국토의 2/3가량을 체코,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의 주변국에 빼앗기는 수모를 당한다. 뒤이어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1941년에는 독일군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위해 헝가리를 통과하도록 길을 열어주고 당시 수상이 자살하는 비극을 겪는다. 그 후 헝가리는 독일의 압력으로 러시아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독일편에 서서 2차 대전을 치르게 되는데 이는 청일전쟁 노일전쟁 그리고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결국 연합군의 공격으로 수도 부다페스트의 태반이 폐허로 변하는데 2차 대전 중 헝가리는 약 1백만의 인명피해와 국부의 40%가 파괴되고 마는 시련을 맛본다. 헝가리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소련군의 점령지가 되고 1949년에는 헝가리 인민공화국이 출범하여 소련의 위성국이 되고 만다. 그로부터 50여년 후 1990년 소련 군대가 철수할 때까지 헝가리는 피눈물을 흘리며 ‘잃어버린 반세기’를 보낸다.

  특히 1956년 우리나라에도 ‘헝가리 반공의거’로 알려진 공산독재정권에 대한 항쟁은 어쩌면 1980년 우리나라 광주항쟁을 연상시키는 참으로 쓰라린 과거다. 1949년 소련의 꼭두각시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헝가리국민은 압제와 폭력, 구속과 고문, 착취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1956년 10월 23일 부다페스트의 대학생이 주축이 되어 거리로 나섰고, 이들은 언론자유의 보장과 소련군 철수를 주장하며 평화시위를 벌였는데 시민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수만 명으로 발전됐다. 헝가리 공산정권은 소련에 개입을 요청했고 소련군 1만 명이 탱크 80대를 앞세우고 헝가리로 진주해 온 것이 바로 그 다음날인 10월 24일이었고 이에 자극을 받아 부다페스트의 시위는 전국적인 폭동과 대규모 유혈사태로 번졌으며, 10월 25일에는 국민적 지지를 받는 개혁주의자 임레 너지(Imre Nagy)가 총리로 취임한다. 불과 며칠만의 일이었다. 너지 총리는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소련군 철수와 일당제 폐지 등 정치개혁과 독립을 선언하고 NATO에 대항한 소련 중심의 바르샤바조약 탈퇴를 선언(11월1일)한다. 이런 와중에 부다페스트 시내에서는 소련군과 시민군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지고 소련군은 시외로 후퇴하겠다는 약속을 번복하고 시위대 강경진압에 나섰고 11월 1일과 2일 탱크 8천대를 앞세운 20만의 병력으로 부다페스트를 봉쇄한다. 그리고 이틀 뒤 부다페스트 시내를 공격하여 무장 시민 혁명군은 완전 진압되고 새로운 총리가 취임한다.

  조국의 민주화와 진정한 독립을 외치던 13일간의 투쟁은 소련군 탱크 앞에 무참히 짓밟히고 2,500명의 사망자와 2만 명의 부상자가 흘린 피는 다뉴브 강으로, 역사 속으로 소리 없이 흘러들고 말았다. 소련군은 혁명 진압 뒤 5천명을 체포했고 229명을 처형했으며 20만 명의 헝가리 사람들이 해외로 도피했다.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에 망명을 시도했던 너지총리도 결국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958년 처형되었다. 이 13일간의 쓰라린 과거는 헝가리의 민주화 항쟁 내지는 또 하나의 독립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타는 목마름으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슬픈 13일의 투쟁 후 3년이 지난 1959년 지구의 다른 한 쪽, 한반도의 시인 김춘수는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으로 그 곳에서 피 흘리며 쓰러져간 사람들을 추도한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김춘수, 1959년)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 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監視)의 일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중략)...........

기억의 분(憤)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중략)...........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달의 항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부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중략)......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내던진 네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逆)으로 싹 튼 것일까,

싹은 비정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아쥬로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不眠)의 염염(炎炎)한 꽃을 피운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정말 김춘수 시인이 말하는 그 싹은 숲이나 나무들에서 움트지 않고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의 자유를 찾는 뜨거운 핏속에서 움트는 것일까.

 동포의 치욕과 비굴함 속에서 생생하게 움트며 위협하고, 불면의 밤에 꽃을 피우다 기억의 분한 강물이 동포의 눈 속에 흐르고 인류의 양심에 흘러가다가 언젠가 불면의 밤이 아닌 5월의 뜨거운 태양아래 염염한 꽃을 피우는 것인가.

1958년의 자유를 향한 그 항쟁이 무참히 짓밟힌 후 들어선 공산당정권은 “우리에게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 편이다.(He who is not against us is with us)"는 다소 선무(宣撫)적인 구호를 내걸었으나 정권장악 후에는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면 적이다.(He who is not with us is against us)"라는 강압적인 구호로 바꾸었다.

당시 헝가리 사람들을 억눌렀던 공산정권의 숨 막히는 감시와 탄압과 강제노동, 그리고 자유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타는 목마름으로’추구했던 헝가리 마자르 민족을 상상해본다. 

 (전략)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중략)...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중에서),

  헝가리는 현재 1848년 합스부르크 지배에 저항한 독립전쟁기념일과 108년 뒤인 1956년 공산당 독재와 소련군 점령에 저항한 항쟁 기념일을 각각 국경일로 삼고 있다. 두 번 다 막강한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정신과 그들이 흘린 피는 오래 기억되어야 하리라. 이처럼 슬픔으로 얼룩진 헝가리의 역사는 어쩌면 우리나라의 역사와 유사하다는 생각도 들고, ‘유럽속의 동양’이라고 불리는 이 나라에 대한 알 수 없는 친근감이 어우러져 애처로운 느낌마저 지울 수 없다.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헝가리는 동구권 국가 가운데 우리나라와 가장 먼저 1989년에 국교를 맺은 나라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