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nJ 농정전략연구센터 소장  고영곤

파이팅! 한국 기업들

  저녁노을 비치는 부다페스트의 첫인상은 둥근 돔 형식의 지붕위에 뾰족 뾰족한 첨탑으로 장식된 고딕식 성당들과 고풍스런 건물모양, 그리고 마로니에 가로수 등이 비엔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뿌리 깊은 문화의 풍성하고도 포근한 정이 느껴지면서도 비엔나에 비해 지저분하고 가꾸어지지 않은 모습이 역력하고, 어딘지 모르게 빈곤의 때가 벗어지지 않은 을씨년스러움이 여기저기서 풍겨나고 있었다. 다만 부다(물을 의미)지역과 페스트(도자기를 의미)지역을 가로지르는 다뉴브 강이 마치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 한강처럼 시원하다. 강물은 최근 내렸다는 많은 비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는 아니었다.

  우리 일행은 부다페스트로 들어가면서 우리나라 기업들의 광고판을 만날 때마다 “저기 00회사다”하며 반가워했다. 특히 영웅광장으로 이어지는 마로니에가 무성한 부다페스트의 상제리제라고 불리는 언드라쉬(Andrassy)거리는 서울의 강남대로나 태평로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1872년부터 15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한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 보존거리로 지정한 이 도로의 번화가 네거리, 양쪽 코너의 빌딩위에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커다란 광고판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버티고 있는 모습에 우리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한국 기업들이여 파이팅!

  영웅광장은 마자르족의 정기를 살리기 위해 헝가리 건국 천년을 기념하여 1896년에 만들어졌다. 이 광장 안쪽 중앙에는 36m 높이의 둥근 탑 위에 가브리엘 천사의 모습이 있고 좌우로 탑의 기단부분에는 이 민족의 7개 부족을 상징하는 부족장들의 청동기마상이 둘러있다. 탑의 좌우로는 양팔을 벌린 듯 이 나라를 빛낸 역사적 인물 14명의 동상들이 늘어서 있었다. 광장 양쪽의 국립박물관과 오페라하우스가 헝가리역사에 맺힌 슬픔을 안고 다소곳하게 석양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다뉴브의 진주 부다페스트

   유럽의 날씨는 금방 햇빛이 쨍쨍 나다가도 어느 순간 비가 내리는지라 비엔나에서도 부다페스트에서도 가이드는 우산 챙기라는 말을 몇 번씩 반복하곤 했다. 다행히 비는 우리나라처럼 쏟아지는 게 아니라 비단결 같은 보슬비, 우산 없이 그냥 맞아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비가 내리다가 또 어느 결에 활짝 갠다. 9월 상순인데도 날씨가 제법 쌀쌀하여 마로니에 잎이 아래쪽부터 낙엽지고 있어 우리나라 늦가을 같은데 위도 상으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위인 북위 47도여서 그런지 여름은 짧고 겨울은 길다고 한다. 벼농사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그럴 테지만 이 곳 사람들의 주식도 밀가루와 돼지고기 등 서양식이다. 그래도 우리는 식당에 갈 때마다 쌀이 나오는 메뉴를 골라 먹었는데 쌀은 인디카 타입이어서 끈기가 없이 푸석푸석했다.

  우리는 아침에 이곳 농민들이 생산하는 화훼작물을 알아보기 위해 화훼시장으로 갔다. 쌀쌀한 날씨에 찾아간 화훼시장은 사실상 볼품이 없었다. 부다페스트 거리의 건물에 있는 고풍스런 장식, 성당이나 건물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나 상들리에 등이 풍기는 화려함과는 전혀 달랐다. 화훼시장에서는 이런 저런 절화와 분화 그리고 솔방울로 만든 실내장식 따위를 파는 가게들이 20여개 늘어서 있었고 우리가 들어가자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장미꽃 가격은 우리나라보다 약간 싼 듯했고 품질은 다소 못한 것 같았다.

 음산하고 쌀쌀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우리는 겔레르트 언덕에 올랐다. 서울의 남산 같은 느낌의 이 언덕 위 오래된 건물과 성벽에는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총알자국과 연기에 그을린 모습이 남아 있었다. 또 길가의 기념품가게는 이동식 간이 건물처럼 허름했고, 하얀 레이스로 만든 식탁보 같은 것을 주로 팔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표정이나 옷차림이 전쟁의 상흔과 어우러져 어쩐지 아프게 가슴에 다가왔다.  

언덕 꼭대기에는 월계수 잎을 들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높이 세워져 있는데 그 방향이 모스크바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2차 대전 직후 헝가리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여신상이 소련군 점령하의 공산당 정권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 한다. 헝가리의 독립을 기념하는 것인지 소련군의 헝가리 점령과 공산정권 수립을 기념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겔레르트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시원스런 다뉴브강, 강의 왼쪽 건너편 언덕위의 옛 왕궁과 주변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보이는 부다지역, 강 오른쪽 화려한 국회의사당과 붉은 색 지붕의 주택들 사이에 띄엄띄엄 들어서 있는 성당들로 장식된 페스트지역, 이들 두 지역을 연결하는 세체니 등 여러 개의 다리들이 한 장의 그림처럼 펼쳐져 왜 부다페스트가 ‘다뉴브의 진주’라고 불리고 유네스코는 이 도시를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 때 중부 유럽의 최강국으로 비엔나까지 호령했던 헝가리, 그 나라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왠지 모를 연민을 느끼면서 마티아시 성당, 어부의 요새, 옛 왕궁 등을 둘러보았다. 어부의 요새는 영화 ‘미션 임파서블’이 촬영된 장소로 일곱 개의 독특한 고깔 모양의 탑을 연결한 성벽이었다. 옛날 다뉴브 강의 어부들이 이 성벽에서 외적의 침입을 막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특이한 고깔건물 안에 둘러서서 다뉴브강을 내려다보며 생수통에 옮겨 담은 귀한(?)‘석간수’를 입에 털어 넣고 튜브 고추장을 손가락에 짜서 빨아먹으며 헝가리의 역사를 음미하였다. 멸치라도 있었더라면 더 기가 막혔을 어부의 요새에서의 ‘성찬’은 짜릿함과 아쉬움이 어우러진 추억의 한토막이 될 것이다.

  어부의 요새 안쪽의 마티아시 교회는 13세기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성당으로 왕의 대관식 같은 주요 행사가 치러지던 곳이다. 마침 공사 중이어서 그 화려하다는 내부는 들여다보지 못하고 옛 왕궁으로 갔다. 왕궁은 13세기부터 건축되기 시작해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시대를 거쳐 죠세프 황제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5백여 년에 걸쳐 만들어진 옛 왕궁이 지금은 박물관 미술관 그리고 대통령 관저 등으로 사용된다. 특이한 것은 그렇게 많은 관광객이 이처럼 가까이 접근하고 드나드는데도 경비병 한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모두 사복근무중인지 물었더니 경비는 건물 내에서 그것도 해당되는 구역에 한한다고 한다. 왕궁 옆에는 국립미술관과 역사박물관이 있는데 우리는 건물 주변만 쳐다보고 지나갔다.

  왕궁의 정문 입구에서 내려다보는 다뉴브강, 세체니 다리, 그 건너의 국회의사당은 참 아름다웠다. 바로 발밑의 세체니 다리는, ‘자살의 찬가’ 또는 ‘자살의 송가’로 유명한 영화 ‘우울한 일요일(Gloomy Sunday)’에서 아름다운 여인 일로나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독일 남자가 다뉴브강물에 뛰어드는 장면이 촬영된 부다페스트의 이정표이며, 이 영화로 인해 사람들의 가슴에 한 편의 시(詩)가 된 아름다운 다리다. 이 다리는 또 김현희가 KAL기 폭파라는 어이없는 중대 결심을 한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다리 건너편에 뾰족 뾰족한 수많은 첨탑들이 아름다운 건물, 길이 268m, 너비 126m의 큰 건물이 국회의사당인데, 이 나라 건국원년인 서기 896년을 기념하기 위해 돔의 높이를 96m로 하였다 하고 691개의 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904년 완공된 이 건물은 네오고딕과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이 한데 어우러진 다뉴브 강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1904년이면 우리나라 고종 때로 일본군대의 한반도 진입을 허용하는 ‘한일의정서’가 조인되고 일본군이 인천으로 상륙하여 남대문까지 진주한 그 해 아닌가. 그 무렵 이처럼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었다니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의원내각제인 이 나라 총리 집무실도 여기 있다는데 이곳에서 저 아름다운 건물처럼 오랜 기간 시린 역사를 살아온 헝가리가 아름다운 민주주의를 활짝 피우기를 빌어본다.

옛 왕궁이 서 있는 성벽을 끼고 도는 도로변 벤치에 앉아서 우리는 어느 전쟁의 상흔인지 알 수 없는 총탄자국을 바라보며 버스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