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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9.04.22
제목
문틈으로 본 조선 이야기(3), 해녀의 고단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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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틈으로 본 조선 이야기(3) 
 

해녀의 고단한 삶

 

   

 

하상(夏祥) 이두순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제주도는 돌이 많고, 바람이 많고, 여자가 많아서 삼다도(三多島)라 불리며, 해녀의 고장이기도 하다. 진수(陳壽, 233~297)의「삼국지」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도 제주도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베옷 한 겹만 입고 바다를 떠다닌다[一布衣從海中浮出].”고 하였으니 제주도의 잠수 채취업의 연원이 오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도, “제주에서 큰 진주 두 개를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으며(문종 33년, 1079), “원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제주[耽羅]의 진주를 채취하려 하였다가 채취하지 못하고 백성들이가지고 있던 1백여 개의 진주를 탈취하여 돌아갔다.”는 충렬왕 때(1276)의 기록이 있어 고려 때에도 잠수어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에서 바다 속을 잠수해서 미역을 캐거나 전복을 채취하는 일은 주로 여인들이 해왔으며, 그 여인들을 잠녀(潛女)라고 하였다. 또 미역을 따는 해녀는 채곽녀(採藿女), 전복을 따는 여인은 채복녀(採鰒女)라 부르기도 했다.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해녀(海女)란 이름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바뀐 명칭이다.

 

 제주 해녀에 대한 시문과 기록을 살펴가며 옛 해녀들이 살았던 모습을 더듬어본다. 제주에서 깊은 바닷물에 잠수해서 수산물을 채취하는 일은 여인들의 몫이었고 고된 일이었다. 게다가 조선시대에는 제주 전복이 왕실에 바치는 진상품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녀들은 과중한 진상물 할당량을 채우려 고생하였다.

 

 이건(李健, 1614~1662)이 쓴 「제주풍토기」에는 당시 해녀의 생활의 모습이 기록되어있다.

“미역을 캐는 여인을 잠녀(潛女)라 부른다. 2월에서부터 5월에 이르기 전까지 바다에 들어가 미역을 캔다. 미역을 캘 때에는 소위 잠녀들이 벌거벗은 알몸[赤身露體]으로 물가에 그득히 들어선다. 낫을 가지고 물밑바닥에 들어가서 미역을 캐서 끌고나온다. 남녀가 뒤섞여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해괴하다. 산전복[生鰒]을 잡는 것도 그와 같다. 캐어서 관가의 징수하는 요구에 따라 응하고 나서 남은 것을 팔아서 의식을 해결하는데 그 몸이 힘든 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염치없는 관리를 만나면 욕심 많고 더러운 마음보로 각종 명목을 만들어 착취하는 것이 한이 없다. 일 년 내내 일해도 뜯어가는 것을 채우지 못해 관가에 바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아전들의 간악한 폐단은 극에 달해서 의식을 해결하기도 난망한 상황이다. 만약 욕심 많은 관리를 만나게 되면, 소위 잠녀들은 모두 빌어먹는 거지가 될 것이다(葵窓遺稿卷之十一).”

 

 전복을 따는 작업 자체도 힘든 일이었지만 해녀들에게 더욱 고통을 준 것은 전복을 진상하는 일이었다. 제주 해녀들은 진상이라는 명목으로 매년 정해진 량의 전복을 관에 바쳐야 했다. 제주 주민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해 중앙에 알린 이형상(李衡祥(1653~1733)의 장계가 있다(‘濟州民瘼狀’, 甁窩集卷之十七). 그 내용의 일부이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제주도의 풍속은 남자가 전복을 채취하지 않아, 진상 책임이 해녀에게 있고, 여자가 관역(官役)에 나오는 것은 제주도뿐이다. 남자도 전복채취[鮑作]에 선원노릇을 겸하는 등 힘들지만, 여자는 일 년 내내 진상할 미역과 전복을 마련해 바쳐야 한다. 일 년을 통틀어 남자가 포작으로 바치는 금액이 20필(疋)이며, 해녀가 바치는 것도 7, 8필에 이르러 한 집안에서 부부가 바치는 것이 거의 베 30여필에 이른다.”

 

 조관빈(趙觀彬, 1691~1757)의 기록에 의하면 해녀가 진상할 전복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관부(官府)에 불려가서 매를 맞고, 심한 경우는 부모도 붙잡혀서 질곡에 신음하고 남편도 매를 맞는다. 그녀에게 부과된 수량을 모두 납부하기까지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해녀가 할당을 채우려 무리해서 바다에 들어갔다가 낙태를 하는 수도 있다.”고 하였다(悔軒集).

해녀들이 수중에서 작업하는 과정과 그 어려움은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이 쓴 글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囚海錄, 北軒集). 직접 해녀를 만나 듣고 기록한 잠수작업의 어려움에 대해 해녀가 말한 부분을 옮겨 본다.

 

<잠녀>

 소위 잠녀라 하는 이는 잠수를 업으로 한다. 미역이나 전복을 채취하는데, 미역 채취에 비해 전복 채취는 매우 어려워 그 괴로움이 도가 지나칠 정도이다. 잠녀의 얼굴을 살펴보면 검고 파리한데다 걱정과 괴로움으로 죽을상을 하고 있다. 내가 근심스러워 그 일하는 자세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러니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해변에 장작으로 불을 피워 놓고는 벌거벗은 몸으로 박을 가슴에 안고 끈으로 짠 주머니를 박에 묶고는, 이전에 잡았던 전복을 주머니에 채웁니다. 손에는 쇠꼬챙이를 잡고,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다가 적당한 곳에서 물속에 잠깁니다. 물밑에 이르러 한 손으로 바위를 더듬어보면 전복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돌에 붙어있는 전복은 껍데기로 단단히 엎드려 있고, 단단히 붙어 있기 때문에 바로 딸 수가 없고, 그 색깔이 검고 돌과 뒤섞여 있기도 합니다.

 

  묵은 껍데기가 위를 보고 있어 그 있는 곳을 알 수 있고, 그 뒷면이 반짝거려 물속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때 숨이 가쁘게 되면 즉시 나와 그 박을 안고 숨을 쉬게 되는데, 그 소리가 ‘휘익’ 나는데 그 어려움을 사람들이 모를 것입니다. 그런 후에 생기가 돌면 다시 물속에 잠수합니다. 먼저 확인해 두었던 곳에 가서 쇠꼬챙이로 따서 끈으로 짠 주머니에 넣고 출발하여 갯가에 도착하면 추위에 얼어서 오돌오돌 떨려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여름인 6월이라도 그렇습니다. 불을 피워 놓은 따뜻한 데에 가면 생기가 돌아옵니다. 간혹 한 번 잠수해 전복을 발견 못하면 다시 물에 잠기곤 하는데, 따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릇 전복 하나를 따려다가 죽은 사람이 여럿입니다. 더구나 물밑의 돌은 매우 날카로운 것도 있어, 부딪쳐 죽기도 합니다. 거기에 있는 큰 물고기[蟲]나 뱀과 같이 사나운 것에 물려 죽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작업하던 사람이 얼어서 급사하거나 돌과 큰 물고기 때문에 죽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비록 요행히 살아있지만 병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제 얼굴을 살펴보십시오.”

 

  해녀들이 처한 이러한 참상을 관리들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제주목사를 지낸 기건(奇虔, ?~1460)은 제주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전복을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니,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세조6년 실록, 1460년 12월 29일). 그러나 청렴한 관리보다는 탐관오리가 더 많았다. 관리들은 진상하는 물량 외에도 관부에서 뇌물로 쓸 물량까지 수탈했기 때문에 관의 전복 요구량이 과다할 수밖에 없었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제주에서 매년 바치는 공물의 내역[貢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淸陰集, 南槎錄).

○ 별진상 품목: 추복 3,030첩, 조복 230첩 인복 910줄, 오징어 680첩

○ 사재감 공물: 대회전복 500첩, 중회전복 945첩, 소회전복 8,330첩

○ 별공물: 대회전복 1,000첩, 중회전복 700첩,

○ 대정읍: 대회전복 500첩, 중회전복 230첩

○ 정의현: 대회전복 500첩, 중회전복 195첩

 

 그리고 「남사록」에는, “이것은 삼읍의 포작으로부터 취하며, 기타 해채(海菜) 및 수령의 봉송하는 수량은 이것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전 도의 물력이 거의 여기에 없어진다.”고 기록하였다(1602년 9월 22일).

상황이 이러하니 전복을 따는 잠녀[採鰒女]가 되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이 생겼다.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李益泰, 1633~1704)의 기록을 보면 진상하는 말린 전복[搥引鰒]을 만들기 위해 전복을 잡는 잠녀는 90명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지워왔는데, 늙고 병들어 거의가 담당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한다. 미역 캐는 잠녀가 8백 명에 이르는데, 익숙지 못하다고 핑계를 대어 위험한 것을 피하려고만 한다고 하였다. 이에 목사는 전복 잡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을 염려하고 일을 나누어 시키려고 미역 캐는 잠녀에게 전복 잡이를 익히도록 권장하였다 한다(知瀛錄).

이렇듯 어려운 해녀의 삶과 고난을 그린 시가 여럿 있다. 우선 그 중 한 수.

 

<제주를 읊은 시 중 해녀>

가련하구나, 전복 캐는 여인이여,

휘파람 불고는 깊은 물속으로 헤엄쳐 간다.

마치 인어가 물속에 잠기는 것 같아,

구름 물결 사이로 아득하기만 하네.

<濟州雜詠 二十二首> 金允植(1835~1922, 雲養集卷之五)

可憐採鰒女, 歌嘯游深淵. 恰似鮫人沒, 雲濤正渺然.

 

 시에는 해녀의 작업 모습을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잠수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학자 이학규(李學逵, 1770~1835)가 김해에서 귀양을 살면서 전복을 캐는 여인의 괴로움을 읊은 장시가 있다. 제주와 김해는 지역은 다르지만 해녀가 겪는 어려움은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시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전복 따는 여인(採鰒女)>

물고기 먹음에 전복을 탐하지 말고,

모름지기 길쌈하는 아내를 얻을지라.

길쌈을 하면 죽어서 같은 무덤에 묻히지만,

전복을 탐하면 물고기 뱃속을 살찌게 하리.

·······························································································

························································································

가련하구나, 그 여인을 마주하자니,

가마우지 같이 잘도 자맥질하였네.

몸이 따뜻하여 추위도 느끼지 않으니,

힘써 일하기는 비로소 어른이 되어서부터라네.

물속으로 이십 장이나 들어가,

밥 먹을 동안이나 숨을 쉬지 않는구나.

어려서는 아무런 걱정 없었고,

청혼이 온 마을에 넘쳤었는데....

 

 ‘채복녀’ 시의 전반부는 해녀 생활이 위험한 것을 묘사하고 있다. 시의 마지막 구에서는 물질하는 처자에게 ‘청혼이 온 마을에 넘쳤다네[求㛰溢門閭].’라고 읊고 있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 바닷가를 읊은 ‘탐진어가’에도 물질을 배우는 어린 해녀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탐진어가(耽津漁歌) 10장의 해녀 부분> 丁若鏞(1762~1836, 與猶堂全書)

물머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계집애들,

그 어미가 자맥질을 처음 가르치는 날이라네.

그 중에서 오리처럼 물속을 헤엄치는 처녀애,

남포의 신랑감이 혼인 예물을 보내왔다네.

兒女脘脘簇水頭, 阿孃今日試新泅. 就中那箇花鳧沒, 南浦新郞納綵紬.

● 阿孃: 어머니, 어미.

 

 해녀는 물질이라는 특수 기능을 가져서 가계에 경제적인 도움이 되기에 어촌에서 탐내는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 감이었다. 그러나 일단 전복을 따는 해녀[採鰒女]로 지정되어 등록되면, 그녀들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제주라는 섬이라는 척박한 자연환경과 중앙정부의 과중한 역(役)의 부과로 도민의 생활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으며, 여인들도 일정한 생업수단을 가져야 했다. 게다가 조선전기 이후 제주 남정의 격감에 따라 군역(軍役)과 진상(進上)의 역이 여인들에게 전가되었던 것이다.

 

 17세기 초 제주에 어사로 왔던 김상헌은, “제주성 안의 남정(男丁)은 500인이요 여정(女丁)이 800인이다. 대개 남정은 매우 귀하여 만약 사변을 만나 성을 지키게 되면 민가의 튼튼한 여자를 골라 살받이터 어구에 세워 여정이라고 칭하는데 삼읍(三邑, 제주(濟州), 대정(大靜), 정의(旌義)의 세 고을)이 한가지다.”라고 하였다(남사록). 제주 여인들이 군사 일에도 동원된 것이었다.

 

17세기 전반까지만 하여도 전복을 따는 것을 잠녀들이 전적으로 담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자 잠수 일을 하는 남자인 포작인(鮑作人)의 수는 절대적으로 감소하였고, 그들이 맡던 전복 채취의 역을 잠녀들이 맡게 되었다. 제주목사였던 이원진(李元鎭)은, “해산물 채취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자가 많다.”고 기록하고 있으며(耽羅志, 1653), 정의현감 김성구(金聲久)의 기록에는, “노인들의 말을 들으면 전에는 포작의 수가 대단히 많아서 족히 진상역에 응할 수 있었던 까닭에 진상할 때 조금도 빠뜨림이 없었는데, 경신년(1620) 이후로 거의 다 죽고 남은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였다(南遷錄, 1679).

 

조선후기에 전복 진상의 역(役)이 잠녀들에게 전가되면서 잠녀들은 관아에서 작성한 잠녀안(潛女案)에 등록해야했고, 채취한 수산물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진상용 또는 관아용 명목으로 상납해야 했다. 그 중에서도 깊은 물속에 들어가야 되는 전복을 채취하는 부역의 부담은 가장 혹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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