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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2
제목
문틈으로 본 조선이야기(6), 얼음을 뜨는 사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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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틈으로 본 조선 이야기(6) 

얼음을 뜨는 사람의 노래

 

   

 

하상(夏祥) 이두순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얼음은 오늘날 가정에서 필수품이지만, 옛 생활에서도 얼음은 긴요했다. 얼음을 저장하는 제도와 시설이 있었던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삼국사기」에 신라 3대왕인 유리왕(儒理王, 재위 24~57)이, “장빙고(藏氷庫)를 지었다.”고 하였고, 지증왕(智證王) 6년(505)에도, “신라에서 얼음을 저장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는 것을 보면 얼음을 저장하는 역사는 꽤 오랜 것이다. 신라 당시에 얼음을 보관하는 시설인 석빙고(石氷庫)가 현재에도 경주에 남아있다.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이듬해 가을까지 보관하기 위해서는 빙고(氷庫)라는 시설이 필요했는데, 일반 백성들로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사철 얼음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예부터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고, 옛 중국에서는 대부 이상의 고위층만이 집에 얼음을 저장해 둘 수 있었다 한다.

 

조선시대에 얼음은 상례, 제례, 공물의 신선도 유지, 열병 치료를 위한 귀한 물건이었고, 한 여름에 왕실에서 신하에게 내리는 주요 하사품 중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얼음을 저장하고 관리하였으며, 성종 무렵에는 일부 종실이나 권력층에서 사빙고(私氷庫)를 설치하였고,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민간 장빙업(藏氷業)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에 얼음을 채취, 보존하고 얼음의 출납을 담당하던 관서로 빙고(氷庫)가 있었고, 도읍인 한양에는 얼음을 저장하는 시설인 서빙고(西氷庫)와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서빙고는 태조5년(1396)에 동빙고와 함께 설치하였고, 예조에 속한 관청이었다. 서빙고는 한강가의 둔지산(屯智山)에 있었으며, 오늘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 파출소 근처이다. 서빙고의 저장 얼음은 13만 4,974덩이[丁]에 이르렀고, 8개의 저장고가 있어 궁중에서 사용하고, 문무백관에 나누어줄 얼음까지 저장했다.

 

서빙고의 얼음 저장은 음력12월에 시작되었고 이듬해 날이 더워지면 빙고를 열고 얼음을 반출하기 시작한다. 저장된 얼음은 제향과 각종 행사 때, 그리고 궁궐 내의 음식을 보관하는 데 쓰였고, 국상이 있는 경우에는 수개월 동안 시신을 보존하는데 사용되었다. 또 여름철에는 정2품 이상의 관료에게도 나누어주었다. 궁중의 부엌에서 쓰이는 얼음을 음력 2월부터 10월까지 공급되었고, 관아에는 5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관원에게는 음력 6월 한 달 동안 배급하였다. 해마다 관리들은 서빙고에서 얼음을 나누어 받는데 이를 반빙(頒氷)이라 하며, 받을 수 있는 얼음의 양이 표시된 빙패(氷牌)를 지급받았다.

 

이밖에 활인서(活人署)의 환자, 의금부(義禁府)의 죄수들에까지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 김종직은, “성상께선 오히려 백성의 더위를 염려하여, 감옥에까지 얼음을 나눠 주도록 윤허하도다.”라고 시를 지어 읊고 있다.

 

 <여름에 금중에 숙직하면서 지은 2수 중 둘째 수>

 

흰 모시옷 검은 모자에 땀이 흠뻑 젖어라,

분수 넘치게도 무능한 나를 경연에 참석시키셨네.

해가 정오에 이르니 꽃그늘은 말려들고,

대궐 모서리 서늘하니 대나무 그림자 없어졌다.

때로는 상아첨대 집어다 졸린 눈에 문지르고,

한가히 물시계 소리 들으며 저녁 종을 기다린다.

임금께선 오히려 백성의 더위를 염려하여,

감옥에까지 얼음을 나눠주도록 허락하시다.

<夏日禁直應制二首> 金宗直(1431~1492, 佔畢齋集)

白紵烏紗汗正濃, 金華非分著疎慵. 日輪午駐花陰卷, 闕角凉生簟影空.

時點牙籤挑睡睫, 閑聽銅漏待昏鐘. 九重尙軫元元熱, 更許頒氷岸獄中.

 

 동빙고는 나라의 제사에 사용할 얼음만을 저장했고 크기도 서빙고의 12분의 1정도였다. 태조5년(1396) 두모포(豆毛浦, 서울 옥수동)에 처음 설치되었고, 얼음을 공급하는 시기는 음력 3월부터 9월 상강 때까지였다.

서빙고와 동빙고 외에도 내빙고(內氷庫)가 궁궐 내에 설치되어 있어 왕실의 여름철 얼음 수요에 대처하였다. 내빙고는 조선시대에 왕실에서 쓰는 얼음을 보관하고 관리하던 이조(吏曹)의 경직(京職) 종6품 아문(衙門)이다. 조선초기에는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안에 있었지만, 정조13년(1789) 양화진에다 옮겨 설치되었다. 내빙고는 오로지 임금의 식사[御供]를 위해 궐내에 두었고, 저장하는 얼음은 4만여 덩어리[丁]였다. 그중 3만정은 한강 연안의 백성의 호역으로써 얼음을 채취하여 공납하였고, 나머지 1만여 정은 병조에서 대가를 주고 사들였다.

 

우리나라에서 겨울에 얼음을 떠서 보관하였다가 여름에 먹는 것은 예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강에서 얼음을 뜨고, 한여름까지 보관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에 채빙의 장소, 사용처, 채빙 방법 등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지금의 빙고는 옛날의 능음(凌陰)이다. 동빙고는 두모포에 있는데, 얼음을 넣는 창고가 하나뿐이라서 국가의 제향에 쓰이는 수요만 담당한다. 얼음을 저장할 때는 봉상시가 주관하며 별제 두 사람이 함께 검찰한다. 또 감역부장과 벌빙군관의 감독 하에 저자도 부근에서 얼음을 채취하는데, 이것은 개천(청계천) 하류의 더러움을 피하기 위함이다. 서빙고는 한강 하류 둔지산 기슭에 있는데, 빙고가 8채나 되므로 모든 국용 및 여러 관사와 고위 관료가 이 얼음을 쓴다.

얼음은 두께가 네치 가량 언 뒤에 채빙작업을 하는데, 그때는 여러 관사의 관원들이 동원되어 경쟁을 하므로 군인이 많아도 잘 채취하지 못한다. 그래서 강촌 백성들이 얼음을 채취하여 군인들에게 팔곤 한다. 또 칡 끈을 얼음 위에 걸쳐 놓아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강가에는 땔나무를 쌓아두어 동상에 대비하며, 의원과 약을 갖춰 두어 병들거나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등 사고에 대한 대비가 철저하다. 8월에 군인들을 보내서 고원(雇員)의 인솔 하에 빙고의 천정을 수리하고, 대들보와 서까래가 썩은 것을 갈고, 담이 허물어진 것을 고친다. 또 난지도[鴨島]의 갈대를 베어다가 빙고의 상하 사방을 덮는데, 갈대를 두껍게 덮으면 얼음이 녹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담당 관원이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얼음 저장하는 일을 하리들에게 맡기곤 하였다. 계축년(1493)에 얼음 저장이 허술하게 되자 왕이 노하여 담당 관원들을 모두 파직하였다. 그 때문인지 갑인년(1494)에는 얼음 저장이 잘 되어 을묘년(1495)의 국상과 중국 사신 접대에도 얼음이 부족하지 않고 가을까지 빙고에 얼음이 남아 있었다.”

 

  추운 강에서 얼음을 뜨는 것은 모두 백성들의 일이었고, 한겨울 강에서 얼음 뜨는 모습을 묘사한 시가 있다.

 

 <얼음을 뜨는 사람의 노래>

 

늦겨울에야 한강에 얼음이 꽁꽁 얼기 시작하니,

수많은 사람들 강가로 몰려나왔다.

 꽝꽝대며 도끼로 얼음을 찍어 내니,

울리는 소리가 용궁까지 들리겠다.

찍어낸 얼음이 설산처럼 쌓이니,

싸늘한 음기가 사람을 엄습하네.

아침부터 등에 져다 빙고로 얼음 나르고,

밤늦게까지 얼음을 파 들어가네.

낮은 짧고 밤은 길어 밤늦도록 쉬지 않고,

힘들게 일하며 부르는 노랫소리 모래톱에 이어지네.

짧은 옷은 정강이 겨우 가리고 발에는 짚신조차 없어,

매서운 강바람에 손가락 얼어 떨어지려는 듯.

높다란 집 오뉴월 무더위 푹푹 찌는 날에,

아름다운 여인의 고운으로 손 맑은 얼음을 내어오네.

작은 칼로 얼음 깨서 온 자리에 돌리니,

밝은 대낮에 하얀 김이 피어나네.

집에 그득한 사람들 즐거워하며 더위를 모르니,

얼음 뜨던 노고를 그 누가 말해주랴.

그대는 못 보았나? 길가에 더위 먹고 죽은 백성들이,

강에서 얼음 뜨던 바로 그 사람들인 걸.

<鑿氷行> 金昌協(1651~1708, 農巖集卷之一)

季冬江漢氷始壯, 千人萬人出江上. 丁丁斧斤亂相斲, 隱隱下侵馮夷國.

斲出層氷似雪山, 積陰凜凜逼人寒. 朝朝背負入凌陰, 夜夜椎鑿集江心.

晝短夜長夜未休, 勞歌相應在中洲. 短衣至骭足無屝, 江上嚴風欲墮指.

高堂六月盛炎蒸, 美人素手傳淸氷. 鸞刀擊碎四座徧, 空裏白日流素霰.

滿堂歡樂不知暑, 誰言鑿氷此勞苦. 君不見道傍暍死民, 多是江中鑿氷人.

 

  조선시대에는 겨울에 한강에서 채빙하는 사람은 부역으로 차출된 백성들이었다. 옷도 변변히 입지 못한 백성들은 매서운 강바람, 추위를 무릅쓰고 나라에서 여름에 쓰기 위한 얼음을 캐서 저장하였다. 그것도 한 밤중에까지 일해야 했던 것이다. 시에 ‘짧은 옷은 정강이 겨우 가리고 발에는 얼음 위에서 신는 짚신도 없다’고 하니 참으로 혹독한 상황에서 일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한여름이 되면 그 얼음을 먹고 더위를 피하는 사람은 귀족 양반네들이었고, 더위에 지치고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은 얼음을 캐던 백성들이었다. 조선시대에 한강에서 뜬 얼음을 저장하던 빙고의 흔적은 지금도 서울의 서빙고동, 동빙고동이란 지명으로만 남아있다.

 

얼음을 채취하는 인력은 주로 한양 주변의 주민들이 동원되었지만, 때에 따라서 인근 도의 인력도 동원되었다. 태종15년 실록에는, “장빙(藏氷)할 때를 당하여 경기의 백성들을 써서 얼음을 저장하는 여러 일에 대비하고, 얼음을 떠내고 얼음을 들이고 하는 것은 성저인(城底人)을 쓴다(1415년 9월 5일).”고 하였다.

 

또 세종20년 실록에는, “국가에서 얼음을 저장할 때 으레 경기도의 백성들을 사역시키는데, 금년에 이르러서는 또 충청도·강원도 두 도의 백성을 부역시키오니, 멀고 가까운 곳의 백성들이 양식을 싸 가지고 길에 올라서 그 얼음이 굳게 어는 때를 기다리느라고 여러 날 유숙하므로, 굶주림과 추위에 너무나 몸이 시달려 그 괴로움이 막심하옵니다(1438년 11월 23일).”라는 기사가 있다.

 

얼음을 뜨는 작업도 힘들었지만, 얼음이 얼지 않았을 때는 외지에서 동원된 인력이 객지에 와서 얼음이 얼기를 기다리는 고역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추운 계절에 채빙이라는 어려운 일에 동원된 인력인 당시 빙정(氷丁)에게 노임은 지불되었는가? 노임을 지불한 것이 아니라 외려 한양주변의 도민들에게 장빙에 필요한 경비 조달을 위해 쌀을 거뒀다는 기록만이 왕조실록과 국조보감 등 국고기록에 나온다.

 

숙종5년 실록에,

“해마다 대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발가벗고 도하(都下)의 굶주림이 지금보다 더할 때가 없었으니 방민(坊民)과 시민(市民)에게서 거둘 다량의 장빙미(藏氷米)를 독촉하여 받아낼 형편이 못됩니다. 작년의 예대로 진휼청으로 하여금 주선하여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1679년 11월 23일).

 

또 비변사가 기근으로 인하여 방민(坊民)들로부터 받아오던 장빙미(藏氷米)를 면제하는 대신 진휼청(賑恤廳)에서 끊어주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따랐다는 숙종7년의 실록기사도 있다(1681년 12월 6일). 특수한 경우에는 장빙미가 면제되기도 한 것이다.

 

여러 자료에서 백성들이 자기가 먹을 것을 챙겨서 장빙을 하는 부역을 나가고, 또 백성들이 장빙 비용인 장빙미를 부담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노임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백성들이 장빙 부역의 의무를 어겼을 때는 감옥에 갇혔다.

 

세조10년 실록에 왕이 의금부 제조를 불러, “장빙의 일에 빠진 사람들이 오랫동안 감옥에 있으니, 실로 마음이 불편하다. 그런데 논죄하지 않는다면 불가하니, 장차 어떻게 하여야 좋을까?” 하고 묻는다(1464년 12월 17일). 제조인 정식(鄭軾)이 대답하기를,

 “그 역사를 빠진 사람들이 경시서(京市署)·한성부(漢城府)에서 많은데, 경시서는 저자[市] 안의 사람들이고, 한성부는 성저(城底)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보내어 잡으니, 와서 모두 말하기를, ‘우리는 죄인이 아닙니다. 아무 향(鄕), 아무 촌(村)에 사는데, 일로 인하여 서울로 올라 와서 그 집에 기숙하다가 잘못 붙잡혀 왔으니, 무슨 일 때문인지 알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호패(號牌)를 상고하니 옳았으므로, 신 등이 삼가 이미 여러 번 신문하여 죄를 공평히 한 다음 석방해 준 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갇혀 있는 자도 또한 적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죄가 없는 자는 내보내고, 죄가 있는 자는 우선 논계하지 말고 그 즉시 벌을 주고 석방하여 주어서 옥에 오래 갇혀있는 지경에 이르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는 장빙 부역에 빠졌다가 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장빙에 동원되는 부역이 힘이 들자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면제해 주는 사례도 생겼다. 선조33년 실록에 의하면, 경상감사 한준겸은 장빙에 동원되는 장정 한 사람의 대가를 포목(布木)으로 환산해서 받은 것으로 인해 탄핵을 받는다(1600년 2월 20일).

 

엄동설한에 꽁꽁 언 강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도성 안으로 운반해 들이고 저장하고 일이 쉬웠을 리는 없다. 부역으로 나갔건 고용되었건 간에 이 일에 동원되었던 민초들이 겪었을 고충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때로는 동상에 걸리거나 부상을 입기도 했고, 강에 빠지는 일도 잦았다. 채취할 때 담당 관원들의 부정과 횡포도 심했고, 빙고로 운반하여 저장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중앙에서는 서빙고와 동빙고가 있어 얼음을 저장했지만 지방에서도 빙고를 두고 운영하였다. 지방 빙고는 설치 목적은 중앙으로 보내는 공물, 진상물의 보관에 있었다. 빙고는 지역마다 있었지만 대부분이 목조빙고이어서 현재 실물이나 유적이 남은 것은 석조빙고 7개소에 불과하다.

<1> 안동 성곡동(城谷洞) 석빙고

<2> 경주 인왕동 월성(月城) 석빙고

<3> 창녕 창녕읍 송현동(松峴洞) 석빙고

<4> 창녕 영산면 교리(校里) 석빙고

<5>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東川里) 석빙고

<6> 대구 달성군 현풍면 상리 석빙고

<7> 황해도 해주 석빙고

이 외에 대구석빙고(1713~1716)가 파괴되어 석비만 남아 있고,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도 목빙고(17세기) 유적이 있다.

 

세종15년의 왕조실록에 ‘문경현에 얼음 저장하는 곳인 빙고를 혁파하다’라는 기사가 있다.

“문경현에 얼음을 저장하는 곳을 혁파하였다. 이에 앞서 은어를 천신하기 위하여 특별히 저장시켰는데, 그 뒤에 진상한 생선이 썩어 문드러져서 쓰지 못하였기 때문에 혁파한 것이었다(1433년 8월 9일).”

세종 때에는 지방에 있는 빙고를 혁파하였다는데, 후일 빙고가 많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지방 빙고가 특히 경상지역에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은어 진상과 관련이 있다. 공물로 바치거나 진상하는 생은어는 산지에서 한양까지 신선하게 보내져야 했기 때문에 은어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얼음이 필요했다. 예전부터 각 지방에서는 빙고를 설치하고 얼음을 저장해서 은어를 냉장했다.

 

성종23년(1492년 7월 19일) 실록에 사옹원 제조 유자광이 은어의 봉진에 관해 ‘지금부터는 생선을 얼음 통에 담거나 소금을 약간 뿌려서 봉진하게 하여....’라고 상소가 있었던 것을 보면 생은어의 수요는 늘어났고 이에 따라 얼음 수요도 늘었을 것이다.

 

인조3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서 황해도와 강원도에 생은어 3백 마리를 배정하였다. 그러나 은어 산지 사정이 영 좋지 않아 신하들이 난색을 표명한다. 즉 ‘사신이 반드시 요구하는 물건이 아니며, 계절이 몹시 가문데다 은어 크기도 아주 작으며 그나마 잡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일기가 몹시 더워 얼음에 채워 멀리서 오노라면 그 제 맛을 잃어 접대에 사용하기 적합지 않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은어는 계절 따라 나는 물건이며 준비하려면 멀리서 운반해야 하는 폐단이 많으므로’ 소금에 절인 은어로 대용키로 한다(승정원일기, 1625년 5월 6일).

 

음력 5월의 기사이어서 양력으로 하면 6, 7월에 해당한다. 은어 산지에서는 더운 계절에도 생은어를 얼음에 재워서 한양으로 보내야 했다. 이와 같이 중앙의 생은어 수요가 있었기 때문에 지방 빙고의 건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안동 성곡동 석빙고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예안면 동부동 낙동강가의 산기슭에 있던 것을 1976년에 옮긴 것이다. 예안읍 읍지인 「선성지(宣城誌)」에는, “이매신이 예안현감으로 부임하여 3년 동안 재임하던 중 녹봉을 털어 1737년에 석빙고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성지」에는 또 진상하는 공물로 ‘7월초 은어 30마리’라고 기록되어 있어 나라에 바치는 은어를 잡아 상하지 않도록 간수하기 위하여 이 석빙고를 짓고 겨울에 낙동강 얼음을 채취해서 보관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지방의 빙고는 경상도 지역에 몰려 있으며 공통점은 18세기 숙종, 영조시대에 건축되거나 개축된 것이며, 또 은어 산지와 겹치고 있다. 관련 읍지에도 낙동강 연변에서 나는 은어를 한양으로 수송하기 위한 얼음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였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인조 때부터 고종까지의 기록인 승정원일기에는 은어 공납과 관련된 기사가 63건이 있다. 이중 숙종조의 기사가 25건, 영조조의 기사가 16건에 달한다. 그 시기에 지방 진상품의 하나인 은어에 대해 왕실의 관심이 더욱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는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전란이 끝나고 조선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였고, 문물이 발전하고 소비가 신장된 시기였다.

 

이에 따라 신선한 은어를 보관하고, 수송하기 위한 얼음의 수요도 커졌고, 지역 빙고의 건축, 개축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안동 성곡동 석빙고는 현감이 자기 봉급으로 축조할 정도였다니, 은어를 신선하게 제 때에 진상하는 것이 지방 수령의 자리보전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은어 산지에서도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는 작업은 백성들이 동원되어 했을 것이다. 한양의 왕실과 부귀한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신선한 은어를 보내려고 차가운 낙동강에서 얼음을 캐어 날랐을 것이다.

 

오늘날 안동지역에서는 보물 제305호 안동석빙고를 기념하는 ‘안동석빙고 장빙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안동석빙고는 겨울철 얼음을 보관해 두었다가 여름철 안동까지 거슬러 올라온 은어를 잡아 저장한 후 한양으로 운반이 가능하도록 초겨울까지 은어를 신선하게 보관하는데 쓰였던 빙고다. ‘안동석빙고 장빙제’는 조선시대 진상품인 안동은어를 신선하게 운송하는데 필요한 얼음을 어떻게 낙동강에서 채취하여 운반되고 저장하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채빙과 운빙, 장빙 과정을 재연하는 행사이다.

 

‘안동석빙고 장빙제’의 진행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기한제(祈寒祭): 겨울날씨가 추워 얼음이 잘 얼도록 해달라고 기원하는 제사.

<2> 채빙(採冰): 강에 얼어붙은 얼음을 톱으로 잘라 낸다.

<3> 운빙(運冰): 강에서 캔 얼음을 석빙고로 옮긴다.

<4> 장빙제(藏冰祭): 빙고에 얼음을 넣기 전에 얼음이 잘 보관되도록 지내는 제사.

<5> 장빙(藏冰): 채빙하여 운반한 얼음을 석빙고에 넣는다.

<6> 개빙제(開冰祭): 봄철 석빙고의 문을 열기 전에 지내는 제사.

 

1년에 걸쳐 할 일을 ‘장빙제’라는 이름으로 한꺼번에 축제를 진행해서 좀 두서는 없지만, 옛 채빙과 저장 과정을 재현하여 오늘날 사람에게 보여주는데 의의가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옛 행사의 재현을 흥밋거리로만 바라보고 있지만, 엄동설한에 낙동강에서 얼음을 캐야 했던 옛 민초들의 어려움과 애환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얼음의 중요성 때문에 옛날에도 한강의 결빙은 국가의 주요 관심사였다. 한강이 얼면 세곡(稅穀) 운반이 중단되고, 어획에 차질이 빚어지며, 수로를 통해 도성으로 왕래하기 어려워진다. 반면, 한강이 얼지 않으면 다른 문제가 발생하였다. 다가올 봄부터 가을까지 사용할 얼음을 비축하기 어려워지는 것이었다.

 

한강이 얼지 않으면 이듬해 가을까지 사용할 얼음을 확보하는 데 비상이 걸렸으며, 멀리 떨어진 강 상류나 계곡의 하천에서 얼음을 채취해서 빙고로 운반해야 했다. 이렇게 되면 얼음의 품질도 떨어지지만, 얼음 채취에 동원된 사람들이 더 큰 고역을 치러야 했다. 또 뒤늦게 추위가 몰아닥쳐 한강이 얼면 미리 저장했던 얼음을 두고 새로 얼음을 채취했으므로 이중의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므로 제때에 한강이 얼지 않는 것도 재난으로 여겼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사한서(司寒署)를 두고 빙실에 사한단을 지어 놓고 장빙(藏氷)할 때와 개빙(開氷)할 때 사한신(司寒神)에게 사한제를 올렸다. 기한제(祈寒祭), 동빙제(凍氷祭)라고도 한다. 주로 음력 12월 얼음을 떠서 빙고(氷庫)에 넣을 때 장빙제를 지냈고, 춘분 또는 음력 2월 빙고 문을 열 때 개빙제를 지냈다. 저장된 얼음은 궁중제사와 잔치·피서 등에 쓰였다. ‘사한’은 추위를 관장하는 북방신의 이름으로 현명씨(玄冥氏)라 한다.

 

채빙해야 될 시기에 겨울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이 얼지 않으면 재이(灾異)라고 하여 사한단을 설치하고 날씨가 추워지기를 기원하였다. 사한제의 시기가 음력 12월이므로 기설제와 병행하여 실시하기도 하였다.

 

<추워지기를 바라는 제문, 尹行恁(1762~1801)>

 

겨울신이 계절을 안배하시니, 동짓달이 되었습니다.

성인이 항상 계시어서, 계절은 이제 겨울입니다.

저희들 안녕함을 살펴보면, 계절의 순서에 따를 뿐입니다.

예부터 추위는 맵고 심하며, 하늘 바람은 따듯하다 하였습니다.

궁에서 제단도 없이 기도드리며, 하늘위로 향을 피웠습니다.

그윽한 법도로 인도하시어, 시기에 맞는 추위를 주시기를.

제가 왕위를 계승함은, 신과 조상의 음덕입니다.

금년도 저물어 가는데, 얼음은 얼지 않고 해만 비춥니다.

밝은 헤아림에 응한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명하시고 살펴주시어, 이에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히 신께 은혜를 구하며, 희생과 제물을 엄숙히 바칩니다.

싣고 쌓을 얼음이 얼기를, 따사로운 봄볕처럼 도와주시기를.

 

사한제는 기우제·기설제·기청제와 같이 풍년 농사를 위한 농경의례적인 면보다는 나라의 제향과 잔치, 그리고 여름의 더위를 식히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얼음을 잘 얼게 하기 위한 제의인 동시에, 한편 자연의 이변이 없기를 바라는 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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