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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2
제목
문틈으로 본 조선이야기(8), 제주 감귤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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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틈으로 본 조선 이야기(8) 

제주 감귤의 진상

 

   

 

하상(夏祥) 이두순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오늘날 감귤이 제주농업에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역사적으로도 감귤은 제주도민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오늘날도 감귤이 익어가는 제주의 풍경은 이색적인 정취를 품고 있다. 조선초기의 문신 서거정은 제주의 풍광을 시로 읊었다.

 

〈제주를 읊음〉

눈 가득한 꽃 사이에서 물총새는 울어 대고,

서리 깊은 울타리엔 감귤이 노랗게 익었네.

제주 섬에 구름 걷히니 신령스런 산은 가깝게 보이고,

해는 동쪽에서 떠올라 바다기운에 잠기누나.

<濟州題詠> 徐居正(1420∼1488, 四佳詩集卷之十四)

雪滿花間鳴翠鳥, 霜深籬落熟黃柑. 雲開蓬島鰲岑近, 日出扶桑海氣涵.

 

  시에서는 바다 가운데 섬인 제주가 신비롭게 그려져 있다. 신선의 섬인 봉래도라는 것은 제주 섬을 이르는 것일 터이고, 신령스러운 산인 오잠(鰲岑)은 한라산을 비유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제주의 풍경은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제주의 대표적인 풍경으로 감귤이 익어가는 모습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도 감귤은 제주의 특산품이자, 도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나무이기도 하다.

 

  감귤은 운향과 감귤나무아과 감귤속, 금감속, 탱자나무속의 과일을 총칭하지만, 오늘날에는 제주감귤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자생 감귤류는 우리 땅에 선사시대부터 있었고, 제주와 남부 해안지대에서 흔히 자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에서 감귤이 재배된 역사는 오래다. 『고려사』에는, “탐라에서 세공하는 귤자(橘子)의 수량을 1백포로 개정 결정한다(고려 문종6년, 1052년 3월).”고 기록되어있다. 세공은 해마다 정기적으로 공납하는 것을 뜻하므로 오래전부터 감귤이 지역 토산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감귤은 옛글에 감귤(柑橘), 목노(木奴), 황감(黃柑), 귤노(橘奴), 금귤(金橘), 귤감(橘柑), 귤(橘), 향감(香柑)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도 감귤은 맛있고 귀한 남방의 과일로 왕실의 중요한 소비품이고 진상품이었다. 또 감귤은 계절에 따라 새로 난 과일이나 농산물로 종묘에 제사지내는 천신(薦神) 품목이었다. 종묘 천신 품목은 월별로 정해져 있으며, 12월에는 숭어․생토끼․유감(乳柑)․정귤(庭橘)․당유자(唐柚子)를 천신하였다(『연려실기술』 사전전고). 세조1년 실록에도, “감귤은 종묘에 천신하고, 빈객을 대접하므로, 그 쓰임이 매우 절실하다.”고 표현하고 있다(1455년 12월 25일).

  감귤은 왕실의 귀한 하사품의 하나이었다. 양촌 권근(權近)이 중궁전에서 보낸 감귤을 받고 쓴 시가 있다.

 

 <동전(東殿)에서 감귤을 내리신 은혜>

동그란 선과가 하늘의 향기를 풍기는데,

영롱한 빛깔은 서리 기운을 띠었네,

병든 눈이 갑자기 보배인가 놀랐고,

마른 목은 선약을 마신 듯하네.

귤나무[千奴]는 모아서 심어야 얻어지지만,

감귤[四老]은 사람 손닿는 곳에선 간수하기 어렵네.

한 번 맛보매 모든 병이 몸에서 물러가니,

은혜에 감사하며 오로지 만수무강 빌 뿐이네.

<伏蒙東殿賜柑橘>

權近(1352∼1409, 陽村集卷之十)

團團仙菓裛天香, 顔色玲瓏尙帶霜. 病眼忽驚看寶璧, 渴喉欣得飮瓊漿.

千奴合向栽時得, 四老難從擘處藏. 一嚼沈痾渾去體, 感恩唯祝壽無彊.

 

  왕비마마로부터 감귤을 하사받고 감격스러워 하는 시이다. 왕실에서는 진상물로 올라온 감귤을 개인에게 하사하기도 했지만, 왕이 선비들에게 주는 하사품의 하나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감귤과 관련된 황감제(黃柑製)라는 과거가 있었다.

 

  제주목사가 진상하는 제주의 특산물인 귤이 한양에 도착하면 나라에서는 이를 경하하는 뜻에서 황감제(黃柑製)라는 과거를 베풀었다. 성균관의 유생에게 감귤을 하사하며 과거를 보았기 때문에 감과(柑科)라고도 한다. 황감제에 장원급제한 사람은 황갑(黃甲)이라 했고 직부전시(直赴殿試)에 나가는 혜택을 주었다. 직부전시는 조선시대 과거의 최종 시험단계인 전시에 곧바로 응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전시는 임금의 친림해서 행하던 인재 선발의 마지막 단계였다.

 

  황감제에서 황당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숙종25년 실록에, “근래 감귤을 반사할 적에 유생들이 앞을 다투어 탈취하기 때문에 분란이 일고 있는데, 이번에는 전일보다 더 극심하여 다투어 탈취하는 즈음에 거조가 해괴하였다고 한다. 명색이 선비로서 임금의 하사품이 중한 줄을 모르니, 더욱 한심한 일이다. 단단히 일러 타이름이 옳다.”며, 황감제에서 감귤을 나누어줄 때 서로 다투어 탈취한 유생들을 중벌로 다스린 기록이 있다(1699년 1월 7일).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 제주 감귤이 귀중하게 여겨진 것은 먼 고장 제주의 가장 대표적인 공물이며 진상품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륙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귀한 남방의 과실이기 때문이었다.

 

  ‘탐라순력도’라는 기록화가 남아 있어 제주 감귤의 진상모습을 오늘에 전해준다. 순력은 관찰사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회하는 것을 말하지만, 제주가 속해 있던 전라도의 관찰사가 매년 2차례 섬인 제주에 와서 순력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순력의 임무를 제주목사에게 위임하였다. 제주목사는 관찰사를 대신해서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제주의 3읍인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을 순력했다.

 

  1702년 제주목사인 이형상(李衡祥)은 음력10월 29일~11월 19일에 가을 순력을 실시하였고, 관내를 순회하면서 자연, 역사, 산물, 풍속 등 제주의 풍물을 그린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를 남겼다.  

 

  순력도에는 당연히 당시 제주의 특산물이자 중요한 진상품인 감귤에 대한 그림도 있다. ‘감귤봉진(柑橘封進)’에는 각 종류의 감귤과 한약재로 사용되는 귤껍질을 봉진하기 위해서 제주에 있던 망경루(望京樓) 앞뜰에서 귤을 상자에 넣고 봉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망경루는 2층 누각으로,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임금이 있는 한양을 바라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제주 앞바다로 침범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망루 역할도 하였다. 

 

  ‘감귤봉진’ 하단에는 진상 내역과 수량이 적혀 있다. “9월에 시작해서 2월까지 천신 2차 진상 21운(運)에, 당금귤(唐金橘) 678개, 감자(柑子) 2만 5,842개, 금귤(金橘) 900개, 유감(乳柑) 2,644개, 동정귤(洞庭橘) 2,804개, 산귤(山橘) 828개, 청귤(靑橘) 876개, 유자(柚子) 1,460개, 당유자(唐柚子) 4,010개, 치자(梔子) 112근, 진피(陳皮) 48근, 청피(靑皮) 30근” 등이었다.

 

<그림1>탐라순력도 강귤봉진

 

  봉진도에 기록된 봉진 수량은 감귤류가 약 4만개이며, 이외 탱자와 약제로 쓰이는 치자, 그리고 말린 감귤껍질인 진피와 청피도 감귤과 함께 진상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탐라순력도에는 감귤 과수원의 풍광을 그린 ‘귤림풍악(橘林風樂)’도 있다.

 

  귤림풍악에는 망경루 후원인 귤림(橘林)에서 풍악을 즐기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제주읍성 안에는 동과원·서과원·남과원·북과원·중과원·별과원 등 6개소의 과원이 있었는데, 그림의 과원은 북과원(北果園)이고 과원 둘레에 대나무가 방풍림으로 심겨져 있다.

 

   귤림풍악에는 1702년 제주 삼읍의 귤 총 결실 수량을 부기하였다. 당금귤 1,050개, 유자 48,947개, 금귤 1만 0,831개, 유감 4,785개, 동정귤 3,364개, 산귤 18만 8,455개, 청귤 7만 438개, 유자 2만 2,041개, 당유자 9,533개, 등자귤(橙子橘) 4,369개, 우금귤(右金橘) 1,021개, 치자 17,900개, 지각(枳殼) 1만 6,034개, 지실(枳實) 2,225개 등이다.  

 

  귤림풍악에 부기된 감귤류의 결실 숫자는 치자와 탱자 종류를 제외하고도 32만개에 달해 당시 제주의 감귤 생산력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 관에서 관리하고 있는 과원 외에도 민간이 재배하고 있는 감귤도 있었을 것이어서 제주의 감귤 생산력은 이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그림2> 탐라순력도 귤림풍악

 

  감귤은 종류마다 익는 시기에 따라 9월부터 2월까지 진상되었으며, 9월에 제일 먼저 유자가 봉진되고 10월에 감자와 동정귤을 시작으로 늦게는 산귤이 진상되었다.

 

  제주도에 어사로 파견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1601년에 쓴 남사록(南柶錄)에 의하면 8종의 감귤이 진상되었고, 가장 많이 진상된 품종인 감자(柑子)는 3만 1,525개로 전체 감귤 진상량의 60%를 차지하였다. 다음으로 동정귤 6,490개, 유감 4,290개였다. 감자·동정귤·유감 3종류의 감귤이 진상 전체물량의 82%를 차지하였다. 당유자는 결실된 수에 따라 봉진하였다 한다.

 

  1653년에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이 편찬한 제주의 읍지인 『탐라지(耽羅志)』 과원조를 보면, 제주 3읍의 과원에는 감자·금귤·당금귤·당유자·동정귤·등자·산귤·석금귤·유감·유자·지각·청귤 총 12종의 감귤이 식재되어 있었다. 제주목에는 전체 12종의 감귤 중 금귤을 제외한 11종, 정의현에는 금귤·당유자·산귤·유감·유자·청귤 6종이, 대정현에는 당유자·동정귤·산귤·석금귤·유감·유자·지각·청귤 8종이 식재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주의 기록 외에도 조선시대 역사서에도 20여종의 감귤 품종이 기록되어 있다.

 

  ○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유감(乳柑), 청귤(靑橘), 산귤(山橘), 금귤(金橘), 감귤(柑橘), 유자(柚子), 유감(乳柑), 동정귤(洞庭橘), 금귤(金橘), 청귤(靑橘), 돌귤[山橘]

 ○ 『경국대전(經國大典, 1476년)』: 감(柑), 귤(橘), 산유자(山柚子)

 ○ 『동국여지승람』 제주목(1481년): 황감(黃柑), 왜귤(倭橘)

 ○ 『속대전(續大典, 1746년)』: 당감자(唐柑子), 감자(柑子), 당유자(唐柚子), 동정귤(洞庭橘)

 

  감귤 품종 이름에 당(唐), 왜(倭)라는 이름이 들어있는 종류가 여럿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품종 도입도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6년 실록에는, “대마도에서 감귤묘목[柑橘栽] 50본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으며(1424년 7월 2일), 성종3년 실록에, “당귤(唐橘)·왜귤(倭橘) 등의 종자는 일찍이 이미 3읍에 들여보내어 재식하였다(1472년 1월 30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제주도의 감귤을 내륙의 남해안에 이식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태종12년에는 상림원 별감(上林園別監) 김용(金用)을 제주로 보내어, 감귤 수백 그루를 순천 등지의 바닷가에 위치한 고을에 옮겨 심게 하였다(1412년 11월 21일). 또 태종 13년에도 감귤 수백 그루를 전라도의 바닷가 여러 고을에 옮겨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1413년 10월 20일).  

 

  감귤을 내륙에 이식하려다보니 무리한 시도가 생기기도 하였다. 세종20년 실록에는, “강화(江華) 인민의 말을 들은즉 당초 귤나무[橘木]를 옮겨 심은 것은 본시 잘 살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는데, 수령이 가을에는 집을 짓고 담을 쌓고 온돌을 만들어서 보호하고[守令秋而造室, 築墻作堗而守護], 봄이 되면 도로 이를 파괴하여 그 폐해가 한이 없으며, 그 귤나무의 길이가 거의 10척이나 되기 때문에 집을 짓는 데 쓰는 긴 나무도 준비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이 몹시 곤란을 겪는다 하옵니다(1438년 5월 27일).”라는 보고가 있어 왕이 시정을 명한다.  

 

  태종과 세종시대에 내륙에 대규모 감귤 과수원을 조성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감귤은 기후에 민감한 열대작물이기 때문에 보온시설이 없이는 내륙에서 대규모 재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법전인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제주 감귤을 언급할 정도로 중앙 조정에서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경국대전』에는 감귤나무와 유자나무 증식을 위해 접붙이고, 돌보고 지키는 이를 따로 두기도 하였으며, 감귤나무와 유자나무의 수는 연초에 그 숫자를 자세히 적어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工典」, 裁植條).  

 

  조선시대에 제주 감귤은 농민뿐 아니라 관에서도 재배하였고, 관에서 감귤류를 재배하던 장소가 과원(果園)이었다. 본격적으로 제주에 과원이 조성되기 시작된 것은 1526년 제주목사 이수동이 감귤을 진상하기 위해 서귀(西歸)·별방(別方)·수산(水山)·동해(東海)·명월(明月)에 감귤과원을 설치하고 감귤을 옮겨 심은 뒤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한 것에서 비롯된다. 

 

  중앙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감귤과원은 16세기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653년 제주목에서 관리하는 과수원은 36개소이었고(『탐라지』), 1688년에는 목사 이희룡이 성 남쪽에 과수원을 설치하였고, 1704년에는 목사 이형상이 감귤 과원을 총 42개소로 늘렸으며, 순조 때에는 감귤과원은 54개소로 늘어났다. 이러한 과원의 증가는 감귤 진상을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증가 추세를 보이던 제주 과원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공노비의 해방으로 관수원을 관리하기 위한 과직(果直)을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감귤 생산량이 줄었고, 진상하는 량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제주에서는 관의 과원에서 생산하는 귤만으로는 중앙의 소요량을 충족시킬 수 없어 일반민가에 귤 재배를 정책적으로 장려하였다.『속대전』에는 제주 3고을에서 당감자, 당유자, 각 8주, 유감 20주, 동정귤 10주를 심은 자에게는 호역과 세금을 면제해주고, 당감자, 당유자 각 5주, 유감 동정귤 각 15주를 심은 자에게는 면포 30필을 상으로 주었다. 

 

  또 성종20년 실록에도 당감자와 유자에 대해 ‘제주에서 귤 재배를 하면 세금을 감해 주도록 하다’는 기사가 있다. “이 물건을 누가 우리 땅에 맞지 아니하다고 하는가? 내가 듣건대, 제주 백성이 감귤나무를 가진 자가 있으면 수령(守令)이 열매가 맺고 아니 맺는 것을 물론하고 괴롭게 징수하므로 이로 인해 백성들이 살 수 없어서 나무를 베고 뿌리를 없애는 자까지 있다고 하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한갓 해만 있고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나무를 심는 자가 있으면 그 집에 세금을 면제하거나 혹은 후히 상주면 백성들이 반드시 나무 심기를 기뻐할 것이다. 해당 관서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게 하라.” 하였다(1489년 2월 24일).  

 

  그러나 여러 왕의 감귤 장려정책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서는 감귤로 인한 폐단이 생기고 백성들이 감귤 재배를 기피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세종9년 실록에 찰방 김위민(金爲民)이 오랫동안 제주도에서 폐단이 되고 있는 일들을 아뢰는 가운데 감귤재배의 폐단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1427년 6월 10일).  

 

  “민간에서 과일 나무를 가꾸는 것은 앞으로 그 이익을 얻어서 자손을 위한 계획으로 하는 것이며, 또 민가에서 과일을 거두지 못하게 금하는 것은 이미 분명한 법령이 있는데, 지방관이 민가의 감귤로써 진상한다고 칭탁하고 나무를 세어 장부에 기록하고, 열매가 겨우 맺을 만하면 열매 수를 세어 감독해서 봉하여 두고, 혹시 그 집 주인이 따는 일이 있으면 절도죄로 몰아대고 전부 관에서 가져가므로, 백성은 이익을 보지 못하여 서로가 원망하고 한탄하오니, 청하건대 수령들로 하여금 해마다 심게 하고 동내마다 심은 것을 인계 서류에 등록하게 하면 십 년 뒤에는 장차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만큼 될 것이오니, 관은 민가에서 거두는 폐단이 없게 되고, 백성들은 죄를 받는 원망이 없게 될 것이오며, 만일 부득이 민가의 감귤을 가지고 진상할 경우에는. 그 값을 넉넉하게 주어 사람들이 모두 심고 가꾸기를 권장하고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세조1년 실록에도 감귤 재배의 폐단에 대한 기록이 있다. 관의 과원에서 부족한 감귤은, “민호(民戶)에 부과하여 공물을 채우는데 나무를 심는 집에 겨우 열매가 맺으면 억지로 보살피고 지키게 하고, 낱알 수를 헤아려서 표지를 달고, 조금이라도 축이 나면 곧 징속(徵贖)하고, 또 주호(主戶)로 하여금 관부까지 운반해 오게 하며, 만일 기한에 미치지 못하면, 형벌을 엄하게 하여 용서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나무를 심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심한 자는 혹 뽑아 버리기까지 한다.”는 것이다(1455년 12월 25일).

 

  이러한 문제는 3백년이 지난 영조 때에도 변함이 없었다. 영조24년에 제주에서 체직되어 돌아온 동부승지 한억증(韓億增)에게 제주의 민속과 토산에 대해 왕이 물었다. “듣건대 감귤의 진공 또한 폐단이 있어 여염집에 이 나무가 나면 반드시 끓는 물을 부어 죽인다고 하니, 사실이 그런가?” 

  한억증은, “과연 이런 폐단이 있습니다. 민가에 이 나무가 나면 관에서 집주인을 과주(果主)로 정하고 나서 열매를 따서 바치게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1748년 1월 10일).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이러한 폐단이 상세하게 지적되어 있다.  

  “남쪽의 바다 연변에 있는 6~7고을은 모두 귤과 유자를 생산한다. 서쪽 해남(海南)으로부터 동쪽 순천에 이르기까지다. 거기에 소속된 여러 섬에서는 그 생산이 더욱 풍성하더니, 수십 년 동안에 점점 줄어들어서 요즈음은 오직 귀족들의 집에 간혹 한 주씩 있고, 온 섬 안에 오직 관에서 키우는 4~5주가 있을 뿐이다. 그 까닭을 물으니,  

  ‘매년 가을이 되면 관리 사령이 이첩(吏帖)을 가지고 와서 그 과실의 알 수를 세고 그 나무에 봉인하고 갑니다. 그것이 누렇게 익게 되면 비로소 와서 따는데, 어쩌다 두어 개쯤 바람에 떨어진 것이 있어도 즉시 추궁하여 보충시킵니다. 만약 보충할 수 없으면 그 원가를 징수합니다. 이처럼 몽땅 가져가면서도 1전도 보상하는 일이 없습니다. 또 닭을 삶고 돼지를 잡아 대접하기에 그 비용이 과다한데, 온 이웃이 모두 떠들고 일어나 귤나무나 유자나무 가진 집을 원망하며 이 비용을 그 집에 물립니다. 그리하여 남몰래 그 나무에 구멍을 뚫고 후추[胡椒]를 비벼 넣어 나무를 저절로 말라 죽게 하니, 이는 그 나무가 말라 죽어야 곧 대장에서 삭제되기 때문입니다. 싹이 옆에서 나오면 끊어 버리며, 종자가 떨어져서 싹이 나면 나는 대로 뽑아 버리는데, 이것이 귤과 유자가 없어진 까닭입니다.’라고 하였다.  

 

  요사이 들으니, 제주에도 또한 이러한 버릇이 있다 한다. 만약 이 폐단이 그치지 않는다면 몇 해를 넘지 않아 우리나라에 귤이나 유자가 없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왕실의 제사에도 귤․유자를 쓸 수 없게 되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대체로, 법을 만든 처음부터 좋지 못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애당초 거기에서 생겨난 폐단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하늘이 낳고 땅이 기르며, 봄바람과 비와 이슬에 의해 자연히 무성해 지는 것이라, 사람을 시켜서 간수하게 하는 것은 바른 계책이 아니며, 관원을 보내어 보고 살피게 하는 것도 바른 계책이 아니다. 다만 그 심는 것만을 타일러 격려하고 다시 간섭하지 말며, 그것이 성숙하게 되면 값을 후하게 주고 침해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그때야 귤ㆍ유자가 번식하게 될 것이다. 금제하는 조문이 세밀할수록 백성들의 고통은 더 많아지니, 누가 이것을 키우기를 즐겨하겠는가.” 

 

  감귤열매가 맺히면 관아에서 일일이 그 열매를 헤아려 장부에 기록하였다가 그 수를 귤나무 소유자에게 모두 책임지게 한 것이다. 열매가 맺히고 나서 수확 시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걸려서 그간에 해충 또는 바람 등에 의해 떨어진 귤마저 소유자에게 책임이 전가되었던 것이다. 이에 민가에서는 귤나무가 ‘고통을 주는 나무’라 하여 도리어 귤나무에 더운 물을 끼얹어 비밀리에 고사시키는 경우가 허다하여 민간의 감귤 재배는 점차 줄어들었다.  

 

  감귤이 맺히면 수량을 세어두는 것은 민간의 감귤나무뿐 아니라 관에서 관리하는 과원에서도 하던 일이었다. 그러나 민간에게 가혹하게 적용했을 뿐 아니라, 수탈의 한 방법으로 악용했고, 또 진상 과정에서 관리들이 횡포를 부렸기 때문에 감귤나무가 원성의 대상이 된 것이다. 감귤 재배 장려가 농가의 수입증대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조정에 진상하는데 1차적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다. 과다한 진상과 가혹한 감귤 재배 독려를 피하기 위해 민간이 의도적으로 생산을 기피하는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이다. 

 

  감귤류의 재배 뿐 아니라 감귤의 진상과정에서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왕조실록을 비롯한 일성록 등 국고기록에는 감귤 진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제주목사 등 봉진관이 견책을 받은 기록이 있다. 영조1년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제주목사가 봉진한 천신할 동정귤이 봉상시에 도착했는데, 도제조와 제조가 모두 사정이 있어서 유중무(柳重茂)가 대신 와서 간품하였습니다. 종묘와 영휘전(永徽殿)에 천신할 동정귤은 수량대로 봉진하였으나 빈전(殯殿)에 천신할 것은 봉진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글을 올려 추고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빈전에 봉진한, 삭선(朔膳)을 위해 진상한 동정귤 160개 중에서 제 물건으로 봉진한 것은 50개뿐이고 등자귤 120개를 대신 봉진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본색의 50개를 천신하는 데 옮겨다 쓰고, 대신 봉진한 등자귤 120개는 사옹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동정귤을 천신한다는 장계 중에 유감에 대해서는 원래 함께 기록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지 동정귤로 간품하였습니다. 

  천신할 유감을 봉진하는데 대한 장계를 정원에서 본조에 내렸기에 장계를 상고해 보니, 종묘에 천신할 것만 봉진하고 빈전과 영휘전에 천신할 것은 봉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종묘에 천신할 원래의 수량 중에 196개를 전례대로 변통하여 수량을 나누어 156개는 종묘에, 20개는 빈전에, 20개는 영휘전에 봉진하려고 합니다.” 하였다(1724년 12월 7일).  

 

  영조4년 실록에는 천신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유감 등을 봉진한 제주목사 한범석(韓範錫)을 추고할 것을 청하는 봉상시의 계가 있다. 

  “제주에서 봉진한 지난 12월분으로 천신할 유감과 동정귤이 당도하여 본 봉상시의 윤헌주(尹憲柱)가 나아가 간품하였더니, 동정귤과 유감은 아직 익지 않아 크기도 작고 색깔이 푸르렀으며 간혹 썩은 것도 있어 천신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바다를 건너 올라오는 물품에 대해서는 물려 보내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형편상 어쩔 수 없이 선장(膳狀)에 따라 수대로 봉진하였으나, 막중한 천신이 이처럼 구차하게 되었으니 일의 체모 상 온당치 않습니다. 봉진관인 제주목사 한범석을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1727년 1월 7일).  

 

  정조시대의 일성록에도 감귤 진상과 관련되어 봉진관인 제주목사가 벌을 받는 기록이 있다. 봉상시(奉常寺)가 아뢰기를, “제주에서 봉진한 유감 360개 중에서 57개가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막중한 천신 물종을 이처럼 썩어 수효를 줄게 만들었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봉진관인 전 목사 김영수를 파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였다(1780년 12월 19일). 

 

  또 정조19년에 봉상시가 아뢰기를, “제주에서 종묘의 천신에 봉진할 유감, 동정귤, 청귤이 도착하였습니다. 유감 288개, 동정귤 288개, 청귤 278개를 봉진하였으나 더 봉진한 것까지 아울러 썩은 것이 너무 많았기에 천신할 만한 것을 가린 결과 유감이 겨우 276개, 동정귤이 겨우 266개, 청귤이 겨우 141개였습니다. 전에 이런 일이 있을 때에는 혹 수를 줄여서 천신한 전례가 있었으니, 이번에도 전례대로 종묘의 각 실(室)에 유감 19개, 동정귤 19개, 청귤 10개로 변통해서 봉진하겠습니다. 그러나 더없이 중요한 천신을 이처럼 구차히 하였으니, 해당 봉진관인 제주목사 이우현을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여, 윤허하였다(1795년 2월 18일).  

 

  또 정조20년 제주목사의 장계에, “초운(初運)에 봉진하는 천신 진상은 바로 감자와 당금귤인데, 공사의 과원에서 일일이 따서 유자는 수효대로 봉진합니다마는 당금귤은 조경묘(肇慶廟)에 천신할 16개는 봉진하였으나 종묘에 천신할 것과 경모궁(景慕宮)에 천신할 것은 수효를 갖출 길이 없었습니다. 감히 마음대로 수효를 줄여 봉진할 수도 없어서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종전에 이러한 때에는 수효가 부족한 대로 모두 봉하여 예조에 올려 보내면 예조에서 상의 뜻을 여쭈어 봉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삼가 전례에 의거하여 당금귤 51개를 모두 봉하여 예조에 올려 보냈습니다. 막중한 천신이 수효가 맞지 않은데다가 품질도 나쁘고 작기 때문에 황공하여 대죄합니다.”하여,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고 회유하라.” 하였다(1796년 1월 12일).  

 

  정조21년에도 제주목사가 감귤 진상 때문에 벌을 받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방금 제주목사 조명집(曺命楫)의 장계를 보니 ‘지난 10월령(月令) 종묘와 경모궁에 천신(薦新)할 당금귤(唐金橘)이 열매를 맺은 것이 겨우 7개였는데 2개는 그간에 말라 떨어졌습니다. 천신하는 일의 체모는 지극히 존엄하여 감히 다른 귤로 대신 봉진(封進)할 수 없기에 5개를 가지고 삼가 전례를 원용해서 모두 봉하여 예조에 올려 보냅니다. 예조에서 상의 뜻을 여쭈어 진헌(進獻)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본조의 등록(謄錄)을 살펴보니 열매를 맺은 과실이 적을 때에는 혹 수량을 줄여 봉진하는 예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당금귤 5개는 막중한 천신에 갖추어 사용해서는 안 되기에 도로 내려 보내며, 5개만 봉진하고 상의 뜻을 여쭈어 진헌하는 것으로 말을 만든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니 제주목사를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였다(1797년 12월 10일). 

  다음해에도 당금귤의 진상 숫자가 부족하였다.  

 “방금 제주목사 조명집의 장계를 삼가 보니, ‘종묘(宗廟)와 경모궁(景慕宮)에 천신한 당금귤은 열매를 맺은 것이 19개밖에 되지 않기에, 삼가 전례를 원용하여 예조에 올려 보내니 예조에서 상의 뜻을 여쭈어 진헌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이와 같은 때면 수를 줄여 진헌하던 예가 있으니, 지금 봉진한 수가 비록 적긴 하지만 근자의 예대로 천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여, 윤허하였다(1798년 11월 17일). 예조에서는 제주의 당금귤(唐金橘)을 수를 줄여 바치라하고 있다. 어차피 생산된 것이 적어서 조정에서도 현실에 맞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근세인 고종 1~30년(1864~1893) 실록에는 제주에서의 감귤 진상과 관련된 기사가 23년간이나 나타난다. 1864년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천신할 유감 등을 전례대로 봉진하지 못하므로 대죄한다.”는 제주방어사 정기원의 장계가 올라왔고 예조에서는, “방금 제주목사 양헌수의 장계 등보를 보건대, 금년 12월에 천신할 귤과 중에 유감과 동정귤을 일일이 다 땄으나, 유감이 112개, 동정귤이 253개뿐이므로, 종묘와 효문전 산릉에 천신할 유감과 동정귤, 경모궁에 천신할 유감을 정해진 숫자대로 채울 수가 없기 때문에 전례에 의거해서 모두 예조에 올려 보내니, 품지해서 진헌할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전에도 귤과의 결실이 잘 되지 않은 때에는 수를 감하여 진헌한 예가 있었으니, 이번에도 전례에 따라 분배해서 당일에 천신하고, 산릉의 천신은 혼전 내관이 예에 따라 능소로 가지고 가서 천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즉 제주 감귤의 흉작이어서 진상할 물량이 부족하고 이에 따라 천신 물량을 조정하자는 비슷비슷한 내용이 23년이나 반복된 것이다. 제주의 감귤 생산이 흉작이어서 전체 진상물량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어느 특정 품종이 부족한 경우도 생긴다. 문제가 된 감귤 품종은 동정귤과 유감이었다. 이 품종들이 풍흉을 심히 타서 생산이 불안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진상외의 중앙의 무리한 요구도 있었다. 연산군 8년에 제주목사 남궁찬(南宮璨)에게 하서하기를, 

 “귤[柑子]과 유감(乳柑)은 비록 이미 철이 지났지만, 따서 저장한 것이 있으면 봉하여 올리고, 나무에 달린 것이 있으면 가지에 붙어 있는 채로 올리라.” 하였다(1502년 3월 11일).

 

  음력 3월이면 한창 봄인데 제주에 저장된 감귤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또 가지에 붙은 채로 보내라니 상당히 무리한 요구였다. 그래도 왕명이니 제주에서는 사람들이 나서서 어디에 철 지난 감귤이 남아 있는지 찾아야 했을 것이다.  

 

  진상 감귤이 부족한 것은 해마다 수요가 늘고, 또 생산은 감소되는 탓도 있었지만, 수송의 불편에도 기인하였다. 감귤 산지인 제주에서 궁궐이 있는 한양까지 진상 감귤을 운송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감귤이 운송되는 도중에 부패하는 등 품질이 떨어지게 되는 현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세조1년 실록에 감귤 운송 문제에 대한 논의가 나온다.  

 “유감을 심어 감자(柑子)가 된 것은, 몸이 작고 껍질이 연하고, 잘 터지며, 그 맛이 보통 것보다 갑절 좋으나, 봉하여 진상할 때에 부드럽고 연함으로 인하여 쉽게 물러 허물어지므로, 다방(茶房)에서 퇴자를 놓고, 논핵이 뒤따라 일어나니, 수령들이 책임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맛이 좋은 물건을 공상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별도로 그릇을 만들어 담고, 사이에 다른 물건을 끼워서 부딪쳐 깨어지지 않게 하고, 표를 붙여서 별도로 진상하도록 하라.”고 하였다(1455년 12월 25일).  

 

  저장성이 약한 품종은 진상을 하는 도중에서 품질이 변하기 쉬웠기에, 수령들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 그 품종이 맛이 좋음에도 진상하기를 기피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포장을 잘 해서 다른 품종과 구분해서 별도로 수송하라는 지침까지 내린 것이다.

 

고종21년 실록에 감귤을 배로 운송하자고 논의한 기사가 있다.  

  “방금 전라감사 김성근(金聲根)의 장계를 보니, 삼가 관문의 내용에 의하면 감귤의 운송을 편리한 대로 하라고 제주목사에게 신칙하였습니다. 해당 목사 심현택(沈賢澤)의 첩정에 ‘진헌하는 것은 참으로 육운(陸運)하는 것이 만전의 계책인데, 연로의 각 읍에서 즉시 바꾸어 운송하지 않아 매양 썩게 됩니다. 대개 배로 운반할 경우에는 다행히 바람을 잘 만나면 한 달 안에 도착할 수가 있지만 만약 바람에 막히면 썩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비용이 육운보다 크게 덜 들기 때문에 배로 운반하는 것으로 정하였으며, 배 두 척에 분배하면 그 비용은 800냥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공물 진헌이 지체되는 탄식이 없게 되고 연로에 비용이 많이 드는 폐단을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금년 과일 공물부터 시작하여 배로 운반하는 것으로 마련하고,,,, 그리고 인천에서 옮기는 절차를 미리 강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편리하게 거행하도록 경기감사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1884년 6월 27일). 육로 운송이 시간이 걸리게 됨에 따라 도중에서 진상 감귤이 부패하였기 때문이었다.  

 

  제주 백성들을 괴롭게 하던 감귤 진상은 근세인 고종31년(1893)에야 폐지되었다. 진상제도가 폐지된 후 과원의 감귤과수원은 황폐화되고, 현재 제주시 도련동, 광령리 등에 남아 있는 수령 250년이 넘은 귤나무 몇 그루를 통해 조선시대 과원의 흔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후일 감귤산업은 민간산업으로 발전해서 제주 농업의 대표적인 고소득 작물이 되었다. 1950, 1960년대에는 감귤 몇 그루만 키우면 그 소득으로 자식들을 대학교에 보낼 수 있다고 해서, ‘대학생나무’라고 불리기도 했다. 제주 감귤 진상에서 품질이 문제가 되었던 재래종은 온주밀감 신품종으로 대체되었고, 그 외에도 많은 품종이 개량되고, 도입되어 다양한 맛을 선사하고 있다.  

 

  현재 재배 감귤의 주종은 온주밀감(溫州蜜柑)으로 엄탁가(Esmile J. Taque) 신부가 1911년 일본에서 도입하였던 품종이다. 그중 한 그루가 현재 서귀포시 서홍동에 있는 천주교 복자수도원에 남아 있어 오늘날 제주도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고 있는 온주밀감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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