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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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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틈으로 본 조선이야기(9), 소 돌림병 온 조선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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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틈으로 본 조선 이야기(9) 

소 돌림병 온 조선을 뒤흔들었다

 

   

 

하상(夏祥) 이두순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근년 들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가축의 전염병은 농업에 타격을 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충격을 주고 있다. 2010년에는 소 구제역(口蹄疫)이 전국적으로 발생해서 축산업에 큰 피해를 주었고, 2015년에 이어 2016년에도 구제역이 발생했다. 조류인플루엔자(AI)가 거의 매년 발생하다가 작년 올해 뜸하여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아프리카 돼지열병(ASF)이 발생하여 또다시 큰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옛 사회에서는 가축 질병이 없었을까? 조선시대에도 가축질병은 만연하였고,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특히 소 전염병이 돌면 나라 전체가 흔들렸다. 우선 소의 전염병인 우역(牛疫)에 대해 읊은 시를 살펴본다.

 

만백성이 재앙 같은 소 돌림병을 걱정하니,

수 천 마리의 소가 병에 걸렸다네.

어찌 호남지방에만 퍼진 것이랴,

듣자니 요동에서 옮겨왔다 한다네.

약을 써도 신통한 효과 없고,

원통한 기운 흰 무지개 되었다.

촌아이 소모는 피리소리는 옛 일이어,

시내에 바람 살랑대도 다시 들리지 않네.

具瑩(1584∼1663, 竹牖詩集)

萬姓憂灾疫, 千牛病勢同. 豈徒遍湖右, 傳道自遼東.

藥物無神效, 寃氛化白虹. 村童舊牧笛, 不復弄溪風.

 

  시인이 활동하던 시대는 병자호란 전후인 인조, 현종시대였다. 큰 전란을 겪은 후 소의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창궐해서 수 천 마리의 소가 병에 걸렸다. 소 모는 목동의 피리소리가 없어졌을 정도로 소가 없어졌다고 하니 심각한 상황이었다. 시인은 소 전염병이 요동지역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항간의 설을 말하고 있다. 당시 소는 중국과 교역이 되었으며, 만주에서 소를 들여오기도 했다.

  소의 전염병을 읊은 시를 더 살펴본다.  

 

 <소 돌림병을 걱정하며>

소가 있으면 병이 걱정이고 병들면 죽을까 걱정인데,

내 본래 소가 없으니 근심꺼리는 없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동네의 소가 다 죽어버렸으니,

서쪽의 밭을 갈려는데 누구의 소를 빌려야하나.

柳宜健(1687∼1760, 花溪集卷之二)

有牛憂病病憂死, 我本無牛可不憂. 但恐人家牛死盡, 西疇有事借誰牛.

 

  소가 병으로 많이 죽어 사람들 모두 걱정하지만, 우리 집에는 소가 없어 홀로 근심꺼리는 없었다. 그런데 소가 다 죽어 없어지면 밭을 갈 때 소를 빌릴 데가 없으니 어찌 걱정스럽지 않은가? 소는 키우지 않지만, 농사일이 걱정이라는 것이다.

  현대 수의학에서 우역(牛疫)은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 소의 전염병을 말한다. 일단 우역에 걸리면 고열이 나고, 소화기 점막의 염증과 괴사가 생기며, 심하게 설사를 해서 전염율과 폐사율이 높은 소의 급성 법정전염병이다. 우리나라의 소는 우역에 대한 감수성이 매우 높아서 폐사율이 거의 100%에 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러스의 실체를 잘 몰랐던 시기에는 소가 걸리는 급성 전염병, 돌림병을 총칭해서 우역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소가 없어지면 무엇보다 큰 일이 농사에 지장이 막대한 것이다. 소는 농경사회에서 땅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의 하나이다. 소는 논밭을 깊이 갈고 엎어서 농작업을 쉽게 한다. 땅을 깊이 갈면 잡초도 덜 나오고 작물의 뿌리내림이 좋아서 증산을 기할 수 있다. 소는 사람을 대신해서 무거운 짐을 날라서 일손을 덜어준다. 또 소를 키우면 외양간에서 퇴․구비가 나와 좋은 비료가 되어 농사의 유기적 순환을 가능케 해주는 역할도 한다.

  소는 이같이 농경사회에서 영농의 근본이었고, 전통사회에서 소를 키우는 것은 부농과 빈농의 구분점이 되었다. 소가 없는 사람은 남의 소를 빌려 써야 했으며, 소 주인의 일부터 해야 했으므로 농작업의 우선권도 없었다. 소를 빌려 쓰면 사람 품 2, 3개로 갚아야 했다.

  시인들이 걱정했던 소 돌림병의 발생 상황을 살펴본다.

  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과 같은 국고문헌에는 소의 돌림병 발생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가장 상세한 것은 왕조실록으로 1541~1763년, 즉 중종37년에서 영조39년 사이에 모두 90건의 우역에 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지방에서의 소병 발생 상황 보고와 이에 대한 중앙의 대책 수립이 주를 이룬다.

  중종 이전의 실록에는 소병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실제 병 발생이 없었는지, 아니면 기록상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소 돌림병에 관한 실록 기사 중 발생 상황만을 연도별로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542년: 함경도 회령부와 덕원․함흥․홍원 등의 고을에 우역이 크게 번져 소가 매우 많이 죽었다(중종37년 2월 19일).

1557년: 함경도 경흥․경원․온성․종성에 우역이 치성하여 수개월 사이에 많이 폐사하 였다(명종12년 3월 25일).

1636년: 평안도에 우역이 크게 번져 살아남은 소가 한 마리도 없다(인조14년 8월 15일).

1636년: 우역이 치성하여 서쪽에서 남쪽으로 번지고 경성에도 죽는 소가 줄을 이 으니 소 값이 갑자기 떨어지고 살아 있는 것은 도살하였다(인조14년 9월 21일)

1636년: 황해도와 평안도[西路]에 우역이 크게 치성하여 열 마을에 한 마리의 소 도 없었다. 조정이 소를 사서 보낼 것을 의논하였다(인조14년 10월 12일).

1660년: 북도(北道)의 경흥부에 우역이 크게 치성하였다(현종1년 7월 28일).

1663년: 경기와 황해도, 평안도[兩西]는 더욱 우역이 심하였는데, 관서지방은 1천 마리 가까이 죽었다(현종4년, 8월 13일).

1663년: 강원․충청 양도에 우역이 크게 번져 죽은 소가 매우 많았다(현종4년 9월 20일).

1663년: 황해도 해주․곡산에 우역이 크게 번져 1천여 마리가 죽었으며 관가의 돼지 [官猪]도 많이 죽었다(현종4년 10월12일).

1663년: 강원도에 우역이 크게 돌아 1,770여 마리가 죽었다(현종4년 12월13일).

1664년: 개성부에 여역(癘疫)이 치성하였으며 우역도 치성하였다(현종5년 11월 5일).

1665년: 황주․금천․서흥에 우역이 극성하였다(현종6년 8월 21일).

1665년: 충청도에 우역이 극성하였다(현종6년 8월28일).

1665년: 전라도내 각 고을에 우역이 점점 번져 죽은 숫자가 매우 많았다(현종6년 9월 23일).

1665년: 경상도에 우역이 크게 치성하였다. 선산․영천 등 30여 고을에 전후 죽은 소가 6,400여 마리였다(현종6년 11월 5일).

1665년: 전라도에 우역이 크게 치성하여 전후 폐사한 것이 1,300여 마리에 이르렀 다(현종6년 11월 21일).

1665년: 우역이 크게 치성하여 전생서(典牲署)에서 기르던 검은소 중에서 14마 리가 병으로 죽었다. 당시의 우역이 팔도가 모두 그러했는데 제주가 더욱 극심하여 희생(犧牲)을 제공할 수 없을 정도였다(현종6년 12월 25일).

1667년: 함경도에 우역이 크게 성하여 수없이 많은 소가 죽었다(현종8년 2월 6일).

1668년: 함경도에 우역과 마역(馬疫)이 크게 퍼져 전후로 죽은 것이 18,100여 마 리였다(현종9년 5월 8일).

1669년: 황해도 신계․평산․금천․토산 등지에 우역이 크게 번졌다(현종10년 8월 2 일).

1668년: 경기에 우역이 크게 발생해 죽은 소가 100여 마리나 되었다(현종9년 8월 3일).

1671년: 황해도에서 여역과 우역이 함께 발생하였다(현종12년 1월 2일).

1671년: 함경도에서 우역으로 죽은 소가 10여 마리였다(현종12년 3월 24일).

1671년: 경상좌도의 각 고을은 우역이 크게 치열한데 저절로 죽은 것의 고기는 혹 사람에게 해로울까 염려하여 파묻었다(현종12년 7월 5일).

1671년: 전라도에서 6월에 염병으로 죽은 자가 3,534명이었고 굶주려 죽은 백성이 725명이었고, 함평 등 고을에서 우역으로 죽은 소가 147마리였다(현종 12년 7월 25일).

1671년: 각도의 우역은 점점 치성해지고 있는데, 양남(兩南)과 원양도(原襄道) 가 더욱 심하였다(현종12년 10월 29일).

1676년: 함경․강원․평안․충청도에 비․서리․우박 등의 재해가 있고 전라도는 우역이 성하였다(숙종2년 8월 22일).

1680년: 전라도에서 우역으로 소 435마리가 죽었다(숙종6년 8월 2일). 1680년: 충청도 각 고을에서 우역이 극심하게 발생하여, 소 220여 마리가 죽었다 (숙종6년 8월 4일).

1680년: 여러 도에서 우역이 극성하여 죽은 소가 매우 많다고 각도의 감사들이 서 로 잇달아 장계하였다(숙종6년 윤8월 1일).

1680년: 전라도에서 우역으로 죽은 소가 4,100여 마리였다(숙종6년 10월 6일).

 1681년: 경기의 광주 등 13고을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소가 200여 마리나 되었다 (숙종7년 8월 4일).

1681년: 경기 여러 고을에 8월 이후 전염병으로 죽은 소가 2,378마리였는데, 다른 도에서도 대략 그와 같았다(숙종7년 9월 14일).

1683년: 함경북도에서 역질(疫疾)이 크게 번져 백성들이 많이 죽었다. 제주에서는 우역으로 소가 수만 마리나 죽었다(숙종9년 윤6월 10일).

1684년: 평안도 태천 등 스물네 고을에서 우역이 크게 성하여 전후에 죽은 것이 1,950여 마리였다(숙종10년 4월 10일).

1684년: 평안도에 우역이 크게 성하여 1,600여 마리가 죽었다(숙종10년 5월 11 일).

1684년: 충청도 홍주 등 14읍에 벌레가 화곡(禾穀)을 손상시켰고, 함경도 홍원 등 의 고을은 충재(蟲災)가 함경남도와 마찬가지이고 우역으로 죽은 소가 또한 400여 마리에 이르렀다(숙종10년 7월 25일).

1684년: 경기도 장단 등 일곱 고을에 우역으로 700여 마리가 죽었다(숙종10년 8 월 25일).

1685년: 황해도에서 문화와 안악 등의 읍에 염병과 우역이 치성하여 번졌다(숙종 11년 1월 17일).

1701년: 평안도에 염병과 우역이 치성하여, 죽는 자가 서로 뒤를 이었다(숙종27년 12월 25일).

1717년: 경상도 각 고을의 백성으로 염병을 앓고 있는 자가 930여 명이고 죽은 자 가 150여 명이고, 우역으로 죽은 소가 3,700여 마리였다(숙종43년 2월 25일).

1749년: 강화도에서 우역으로 죽은 소가 천여 마리나 되었다(영조25년 8월 23일).

1763년: 우역이 크게 번졌다(영조39년 5월 8일).

1763년: 호남에 우역이 발생하여 죽은 소가 1만 마리나 되었다. 제도에 명하여 소 잡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영조39년 12월 2일).

 

  현종2년인 1661년에서 현종12년인 1671년의 11년간에는 무려 23건의 우역 발생 기록이 나온다. 1665년에만도 6건의 기록이 나타난다. 지방별로 급박한 우역 발생을 중앙에 보고하고 있어, 오늘날의 재해발생 현황판을 보는 것 같다.

  또 숙종 재위시기에도 15건의 기록이 남아 있으며 1680년대 초반에 몰려 있다. 당시는 소의 병 발생뿐 아니라 흉작이 이어졌고, 사람들도 돌림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우역이 전국적으로 펴졌고, 혹은 죽은 소가 만 마리를 넘는다는 기록도 있어 소 전염병 피해가 극심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경제 규모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이었을 것이다.

  왕조실록에는 단지 ‘우역’이라고만 기록하였지, 병의 증세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없어 오늘날 어떤 질병을 말하는지 딱히 판단할 수 없다. 현종, 숙종 때는 소의 질병뿐 아니라 사람의 전염병도 발생하고, 농업에는 흉작이 들어 사회 전반이 어려움이 가중된 시기였다. 역사상 최대의 대기근이라는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도 현종 때인 1670년(庚戌年)과 1671년(辛亥年)에 일어났다. 조선 전체의 흉작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으며,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피해가 생겼다.

 

  우역이 발생하면 나라에서도 대책 수립에 분주하였다. 소의 돌림병 대책의 우선은 병의 치료였다. 당시에도 나름의 치료법은 있었다. 중종36년 실록에도, “소의 전염병[牛疫]은 치료할 방법이라도 있지만 돼지는 치료할 방법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1541년 11월 2일).”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소의 질병에 대한 처방은 여러 농서에서 나타난다. 그 중 우역이라고 명시된 처방을 살펴본다.

 ○ 우역이 든 근처에 우선 소변을 누고, 병이 걸리지 않은 소에 먹인다. 하루에 3, 4차 그리하면 소는 병에 걸리지 않는다. 항상 소는 사람의 소변을 좋아한다. 남자가 직접 소의 입에 오줌을 누면 소가 바로 받아먹는다. 가장 효과가 있는 방법이다(『과농소초』).

 ○ 우역이 들면 파초뿌리를 캐어 짜서 즙을 취해서 입으로 주입한다. 매번 한 주발정도 부어주면 비록 독한 병이더라도 3일 동안 계속 부어주면 백 마리에 한 마리도 잃지 않는다. 이 풀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어서 향촌에서는 종자를 미리 준비해 두면 우역을 방지할 수 있다(『과농소초』).

 ○ 『서씨농서』에 소를 키우는 여러 방법 중 병에 걸리는데 대비한 처방이 있다. 혹시 모른 우역에 대비하여 민간에게 반포하여 가르칠 만하다. 소 돌림병에는 소의 쓸개를 소의 입에 부어주면 낳는다. 또 한 가지는 안식향을 외양간 울타리에서 태우는데 향을 피우는 것과 같다. 한 마리에서 두 마리가 이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면 바로 끌어내서 코로 숨 쉬게 하면 낳는다. 또 한 가지는 12월에 토끼 머리를 태워서 회와 섞은 다음 물 5되에 풀어 입으로 부어주면 좋다. 『유산일초(酉山日鈔)에 이르기를, “파초는 우역을 치료하는 효능이 있다. 줄기와 뿌리를 취해서 찧은 다음 부어 먹이면 효과가 있다.” 또 이르기를, “외양간 옆에 파초를 3, 4뿌리 심어 놓고, 소를 해를 보게 하고 루른 하늘과 우거진 나무 아래에 두면 비록 우역이 극심하더라도 이 소는 병이 없다. 농가가 알아 둘만 하다.”고 하였다(『호전육조』○권농).

 ○『산림경제』 양우(養牛)의 처방이다. 소가 열병에 걸려 입이 황흑색으로 변해 마치 푸른 진흙과 같고 네 다리를 오므리지 못할 때에는 백출산(白朮散)을 쓴다. 백출 2냥 5전(錢), 창출(蒼朮) 4냥 2전, 자완(紫莞) 2냥 3전, 우슬(牛膝) 2냥 2전, 마디를 떼어 버린 마황(麻黃) 3냥, 후박(厚朴) 3냥 1푼, 당귀(當歸) 3냥 5전, 고본(藁本) 3냥 3전을 가루로 만들어 한 번에 2냥씩 먹이되, 술 2되를 젖은 풀 위에 놓아두었다가 약 가루와 합쳐 먹이면 즉시 차도가 있다(『거가필용』). 또 검은 참깨 잎을 찧어 즙을 내어 먹이면 즉시 차도가 있다(『한정록』·『신은지』).

 ○ 발병하기 전에 침을 흘리는 것은 바로 온역(瘟疫)의 조짐이니, 황벽나무[黃柏]를 갈아서 낸 즙과 백석(白石: 陽起石의 이칭)을 태운 재를 술에 섞어 입에 들이부으면 예방이 된다(『고사촬요』). 침을 계속 흘리는 경우에는 참먹을 간 먹물과 쪽[藍]의 즙을 내어, 매번 3푼에 석회 1홉과 술 반 되를 혼합하여 먹인다(『치료방』).

 ○ 소나 말이 전염병을 앓을 때 흑두(黑豆)를 삶은 물을 먹인다(『증류본초』).

 ○ 소나 말이 전염병을 앓을 때는 백출(白朮)․여로(藜蘆)씨․궁궁(芎藭)․세신(細辛)․귀구(鬼臼)․석창포를 같은 분량으로 거친 가루를 만들어 코앞에서 태워 그 연기가 뱃속으로 들어가게 하면 즉시 낫는다(『우마의방』).

 ○ 소의 병은 일정하지 않은데 약을 쓰는 데 있어서는 사람과 서로 비슷하다. 다만 약을 지을 때 양을 많게 하여 조제해서 먹이면 낫지 않는 병이 없다.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은 열을 받아서 생긴 병이니 피를 보하는 약[血藥]으로 다스린다. 냉이 뭉치면 콧물이 마르고 헐떡거리지 않으니 발산시키는 약을 투여하고, 열이 뭉치면 콧물이 흐르고 헐떡거리니 이질[下痢]을 다스리는 약을 투여한다. 이는 혹 우역이 유행할 때 흔히 훈김이 서로 전염되어서 그런 것이니, 다른 소가 있는 곳에 가는 것을 피하고 나쁜 기운을 제거하면서 약을 쓰면 혹 살릴 수도 있다(『한정록』치농).

  소의 역병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산림경제』에는 소와 말 같은 대가축의 돌림병 치료법이 있다.

 ◯ 소와 말 같은 가축의 돌림병은 술에 사향을 약간 섞어 부어 준다(『증류본초』).

 ◯ 소와 말의 여러 가지 병에는 버들잎과 소젖을 같이 찧어서 환약을 만들어 말려두었다가 사용할 때 빻아서 우유에 섞어서 부어주면 효과가 좋다(『증류본초』).

 ◯ 소가 병이 난 후 내장이 꼬여 똥을 싸지 못하면 쌀 1되를 하룻밤 물에 담가 하룻밤을 재웠다가 찧어서 새 기름 반 되와 섞어서 부어주면 차도가 있다(『치료방』).

 

  당시에 쓰던 우역의 처방이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처방들이 당시 나름 과학의 소산이고 효과가 있었기에 농서와 의서에 수록된 것이리라. 세 번째 처방은 효과가 더 있었기에 당시의 법전인 『호전육조』에 수록되었을 것이다. 『한정록』처방에서 ‘다른 소가 있는 곳에 가는 것을 피하고’라는 것은 병든 소를 격리시키는 것을 말하며 오늘날의 예방의학과 같은 맥락이다.

  우역으로 죽은 소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현종12년 실록에 경상감사가,

“좌도(左道)의 각 고을은 우역이 크게 치열한데 저절로 죽은 것의 고기는 혹 사람에게 해로울까 염려하여 파묻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굶주린 백성들이 밤을 틈타 파내어 먹고는 죽은 자가 매우 많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1671년 7월 5일). 당시에도 우역으로 인해 죽은 소의 처리는 원칙적으로 땅에 묻는 것이었다. 우역이 다른 소에 전염되는 것을 방지하고, 죽은 소고기를 먹고 사람이 피해를 입는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에도 가축이 걸리는 바이러스성 질병은 현대 수의학에서도 백신 접종으로 예방은 할 수 있어도, 일단 병증이 나타나면 치료는 불가능해서 죽여서 태우거나 땅에 묻는다. 현대 축산에서 ‘살처분(殺處分)’이라 부르는 처치수단이다.

  우역으로 인해 농지를 경운할 소가 부족해졌어도 농사는 지어야만 했다. 논밭을 소로 갈지 못하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다. 소가 없으면 사람의 힘으로 대처해야 했지만, 인력으로 경운을 하면 소에 비해 작업 효율이 낮다.

  인조15년 실록에도, “사람이 대신 전답을 가는데 반드시 10여 명을 써야 하지만 1마리 소가 가는 것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며칠을 갈고 나면 피곤하여 그 괴로움을 감내하지 못하고 열 집이 하루 동안 겨우 소가 하루 가는 만큼밖에 갈지 못합니다(1637년 11월 8일).”라는 보고가 있다.

  사람은 성인인 경우 짧은 시간에는 0.5마력 정도의 힘을 낼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힘을 쓸 경우에는 0.1마력정도의 힘밖에 안 된다. 실록에서 열 사람이 소 한 마리만 못하다는 것도 타당한 의견이다.

  인조 15년 실록에, “우역이 크게 치성하여 한 마을에 한두 마리도 없으니, 이는 매우 좋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밭을 간다면 앞에서 대여섯이 끌고 뒤에서 한 사람이 밀어야 소의 힘을 대신할 수 있는데, 그저 먹을 것이 없는 것이 근심거리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밟을 텐데 어찌 깊이 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1637년 4월 17일).

  여러 사람이 동원되어 소 대신 경운을 하더라도 작업이 복잡하고 효율도 낮았던 것이다. 인조16년 실록에도 그 폐단이 나와 있다. “병화를 겪은 뒤에 우역까지 겹쳐서 소 한 마리면 가는 밭을 열 사람의 노동력으로 대신하여 겨우 파종은 하였지만, 싹이 난 뒤에 바로 가뭄이 들어 제초가 전보다 열 배나 힘이 드니, 백성들이 힘들게 일하고 고생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1638년 9월 1일).”라고 보고하고 있다.

  소로 심경을 해서 토양을 반전시켜 아래위 흙을 뒤섞어야 잡초가 적게 생기고, 깊은 땅의 지력을 이용해서 증산이 된다. 소 대신 사람이 경운하는 것[人力耕]은 간신히 파종할 흔적을 만드는 것이지 힘도 들고 농작물 수량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현종 4년에 좌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우역이 몹시 번져 부림 소가 다 죽고 가을갈이를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하기 때문에 씨앗을 땅에 뿌려도 제대로 심어지기 어렵다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1663년 10월 5일).”라고 하였다.

  소를 쓸 수 없으니 다른 경작방법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소를 대신한 재배방법의 하나로 구종법(區種法)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우역이 유행하니 구종을 하도록 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개 소에다 쟁기를 메워 가는 번거로움이 없이도 두둑을 구역지어 씨 뿌리고 북돋울 수 있는 것입니다(『다산시문집』 ‘농책’ ).”

  구종은 소로 논밭을 갈아엎어 두둑을 만들지 않고 구덩이를 파고 씨를 뿌리는 방법이다. 그러나 콩과 같은 작물에는 구종법이 적합하지만, 심경을 해서 두둑을 짓는 재배법보다 대체로 작물 수량이 적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구종법은 논농사에 적합지 않아서 인력으로 소 경운을 대체하기 어렵다.

  따라서 부족한 소의 마리 수를 늘려 사육기반을 원상으로 복구하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였다. 조선시대에도 호역이 발생하면 소를 공급하는 대책을 세운다. 중종36년 실록에, “평안도 소들이 거의 대부분 병으로 죽었고 황해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 때문에 호조로 하여금 소를 사들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들으니, 평안도의 농사일은 다른 도와 달라서 이곳의 소를 보내 주더라도 2~3년 안에 그곳의 밭갈이에 익숙하기 어렵다고 합니다(1541년 2월 1일).”라는 논의가 있다.

  소는 어린 소일 때부터 일을 배워서 세 살은 되어야 제 구실을 하는 일소로 키워낼 수 있다. 또 지방마다 소가 일하는 방법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경사가 급하고 돌이 많은 산골지방에서는 소 2마리를 쌍으로 메워서 경운을 한다. 만약 평야지대의 소가 산골로 가면 배운 것이 달라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것이다.

  인조 15년에는 남도의 소들을 황해도와 평안도로 보내고 있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하삼도(下三道)에서 올라온 소가 지금 이미 2,200여 마리인데, 그 가운데는 살지고 튼튼해서 쓸 만한 것도 있고, 비쩍 마르고 피로에 지친 것도 있고, 우역에 걸려 죽어 가는 것도 있었습니다. 경성에서 필요한 600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몰아서 황해도와 평안도로 보냈는데, 먼 길을 가면서 어린 풀밖에 먹지 못한 소는 비록 혹시 도달한다 하더라도 결코 올해 농작에 사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비쩍 마르고 우역에 걸린 것들은 반드시 중도에서 쓰러져 죽고 말 것이니 몹시 아깝습니다. 지금부터는 쓸 만한 것을 가려 뽑아서 먼저 황해도와 평안도로 보내고 그 나머지는 경기도의 여러 읍에 수량을 더해 나눠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시험 삼아 경작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잘 먹여서, 풀이 자라나 다시 튼튼하게 된 뒤에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1637년 4월 9일).

  소의 감소를 막고, 역우기반을 조성하기 위해서 소의 도살 금지가 건의되기도 한다. 인조 14년 실록에, “우역이 치성하여 서쪽에서 남쪽으로 번지고 경성에도 죽는 소가 줄을 이으니 소 값이 갑자기 떨어지고 살아 있는 것은 도살하였다. 한성부에서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법을 거듭 밝히기를 계청하니 왕이 이에 따랐다(1636년 9월 21일).”

  그러나 특권층에서 도살 금지령을 무시하는 사건도 생겼다. 인조 25년 실록에, “병자년에 우역이 전국에 널리 퍼져 소가 거의 멸종되기에 이르렀을 때 조정에서 도살을 엄금하여 살인한 것과 같은 죄를 적용하도록 하니 축산이 차차 번성하게 되었는데, 소를 도살하여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궁가에 투속하여 제멋대로들 도살하였다. 형조판서가 소 도살자의 숫자를 한성부에 물으니, 인평대군(麟坪大君) 집 소속이 42인, 능원대군(綾原大君) 집 소속이 38인이었다. 이에 두 궁의 18인씩을 뽑아서 아뢰고 한성부로 하여금 조사해서 전가사변(全家徙邊)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부득이하여 따랐다(1647년 2월 2일).”는 기록이 있다.

  왕이 ‘부득이하여 따랐다’는 것은 인평대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이었고, 능원대군은 인조의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전가사변(全家徙邊)은 조선시대에 죄인의 전 가족을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한 형벌이다.

  그래도 소의 도살이 그치지 않자 소를 죽인 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현종4년 실록에 지평 윤우정(尹遇丁)이 아뢰기를, “올해 우역이 매우 참혹하게 번져 앞으로 종자가 끊길 염려마저 있습니다. 일찍이 정축년에 우역이 있었을 때 소를 죽인 자는 사람을 죽인 것과 똑같은 죄를 적용하기로 법령[令甲]에 기재하였으니, 지금도 이 법에 의거하여 통렬히 금하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따랐다(1663년 9월 15일).

  현종11년에 우역이 심한 것을 이유로 도살장을 혁파하자고 청이 있어 왕이 조정에서 의논했는데 찬반의견이 한결같지 않았다. 현종은, “더욱 신칙하여 지나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중간 의견을 취한다(1670년 10월 19일).

  숙종 7년에 팔도에 소 전염병이 날로 심해지고 있으니 경외(京外)의 도사(屠肆)에 도살을 금지하도록 계청이 있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1681년 8월 23일). 일시적인 도살금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살을 제한하여 소 감소를 줄이는 한편, 다른 지역에서 소를 사와서 공급을 늘이는 시책도 진행되었다. 인조15년에는 비변사에서, “우역이 이런 지경에 이르러 내년 농사가 매우 걱정됩니다. 듣자니, 제주에서 생산되는 소가 가장 많이 번식하여 빈천한 사람이라도 저마다 10여 마리의 소를 기르기 때문에 그 값이 매우 싸서 많아야 5, 6필(疋)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참으로 넉넉히 만여 마리의 소를 사서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낸다면 농사를 짓고 종자를 얻는 데에 반드시 많은 보탬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너는 일이 매우 쉽지 않습니다. 반드시 서둘러 조치를 취하여 해가 바뀌면 즉시 바다를 건너도록 해야 농사철에 댈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계청이 있었다(1637년 8월 7일). 왕은, “아뢴 대로 하라. 또 실어 오는 일은 우역이 종식된 뒤에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주에도 우역이 심하게 발생해서 제주 소를 내륙으로 들여오는 일은 어려웠다.  

  인조15년에 제주에서 소를 들여오는 것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지난번 비국에서 이미 계청하였으므로 제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사 오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1637년 10월 5일). 같은 날 기록에도, “대마도에서 소를 사 오는 일도 비국 당상 1인으로 하여금 전담하여 시행하게 하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다. 같은 해에 예조의 문서를 작성하여 역관 홍희남을 대마도에 보내겠다는 비변사의 계가 있었다(1637년 10월 17일). 그러나 대마도에서 소를 가져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 부족한 소는 북방지역에서 구입해 왔다. 인조 15년에는 비변사에서 몽고지방에서 소를 사오자는 청이 있자 왕은, “나라가 불행하여 우역이 있지 않은 곳이 없어 거의 절종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실로 절박한 재앙이고 더할 수 없이 큰 근심이다. 내년이 지난 뒤에도 마련해 낼 곳이 없으니 비록 농사철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넉넉한 숫자를 사 와서 앞으로 경작하고 자식(孶息)할 바탕으로 삼으라.”고 하였다(1637년 12월 14일). 그리고 실제로 몽고에서 소가 도입되었다.  

 1638년, 비변사의 낭청[備局郞]인 성익(成釴)이 상단을 이끌고 몽고에 가서 181마리의 몽고 소를 구입하여 돌아왔다. 구매 결재대금으로는 조선에서는 거액의 포목을 들여 왜관에서 구입한 지삼(枝三, 일본에서 만든 가늘고 정교하게 썬 잎담배)과 조선산 담배[南草]를 준비했다. 대금 지불방법으로 청서피(靑黍皮), 청포(靑布), 면포(綿布), 한지[紙地], 지삼(枝三) 등이 검토되었고(승정원일기, 1637년 12월 14일), 실제는 담배를 주축으로 결재되었다. 당시 담배는 귀한 고가품이어서 청나라에서는 은의 유출을 걱정해서 교역을 금지한 품목이었다. 그러나 청나라 황제의 묵인 아래 몽고에 가서 소를 살 수 있었고, 이는 조선이 몽고와 직접 무역한 역사상 최초의 사례이다.  

  현종 4년에 시정을 논하는 과정에서, “금년 들어 우역이 크게 번졌습니다. 경기와 양서지방은 더욱 심하였는데, 관서지방은 1천 마리 가까이 죽었다니 이야말로 큰 이변입니다.” 왕이, “정축년에는 우역으로 죽은 소가 얼마나 되었는가?”하고 인조 때의 일을 묻자, 대신 정태화는, “병자년부터 정축년(1637)까지 죽은 소가 수도 없어 거의 남아있는 종자가 없었으므로 나라에서 성익을 시켜 몽고 땅에서 사왔습니다. 지금 있는 소들은 모두 그 종자입니다.”라고 대답한다(1663년 8월 13일). 우리 한우의 뿌리는 몽고 소에도 그 연원의 한 가닥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어려운 가운데 청나라에서 조선의 소를 사가겠다는 무리한 요구도 있었다. 인조 27년에 함경감사 이후원이, “청나라 차인(差人)이 후춘(厚春)에서 나와서 농우 130마리를 기어이 사려 합니다. 각 고을에 분정(分定)한 것은 70마리뿐인데, 그가 줄곧 내라고 요구하면 몇 마리까지 주어야 합니까? 북도(北道)는 막 병화를 겪고 또 우역을 겪었는데, 농사철을 당하여 백성의 소를 몽땅 털어서 다른 나라의 수요에 응할 수는 없습니다. 묘당을 시켜 지휘하소서.”하였다. 비국(備局)의 회의에는 100마리로 한정하기를 청하였지만 인조는, “100마리는 너무 많으니 8, 90마리로 정하도록 하라.”고 하교한다(1649년 3월 15일).

  숙종 11년에도 우역이 심했던 조선이 소를 중국에 수출하려 하지 않자, 청나라에서는 소의 교역을 금지한 일로 벌금을 요구했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은사 박필성(朴弼成) 등이 소의 교역을 정지하기를 청한 일 때문에 현지에서 곤욕을 치렀고, 사신들은 쫓기다시피 돌아왔다. 사신이 황주(黃州)에 오자 청나라에서 회신을 의주로 보냈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1685년 8월 15일). 

 “살펴보건대 지금 조선 국왕 모(某)는 황상(皇上)이 진휼하는 높은 은혜를 여러 번 입었으니, 도리 상 마땅히 공손하고 삼가기를 더욱 더해서 알맞게 보답하기를 힘써 도모하여 일체 사무를 모두 정해진 규례에 따라야 할 것인데, 이에 소가 우역으로 죽었다고 일컫고는 제본(題本)쓰기를 미루어 핑계하고 있으니, 이는 매우 합당하지 못하다. 이 때문에 장차 조선 국왕 모에게 은(銀) 1만 냥(兩)을 벌금으로 내게 하려 한다.” 그러나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국고문헌에 중국에 소를 수출하지 않아 실제 배상을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영조14년에도 북관지방에 우역이 번졌다. 청나라 차원(差員)과 무역하는데 쓸 소 600마리 중에 죽은 것이 550여 마리나 되었다. 송인명(宋寅明)이 함경도[南關]의 소를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영조가 이르기를, “다른 소를 들여보내도 반드시 병들어 죽게 될 것이니, 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우역이 없어지기를 기다려서 무역하도록 하라.”고 명한다(1738년 2월 7일). 청나라와 소 교역마찰이 어찌 무마되었는지는 실록에 보이지 않는다.

  중국이 무역을 통해 조선에 소를 요구하는 것은 그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세종 때 명나라 선종황제(宣宗皇帝, 1398~1435)가 칙서를 보내 우리나라에서 농우 1만 마리를 요동에 보내되, 비단과 포목으로 무역하자 하였다. 세종이 정부와 육조에 명령하여 의논 끝에 우역으로 소가 부족하지만 상국에 대한 의리로 보내기로 한 사례가 있다(『동각잡기』). 소 무역은 나라 사이의 무역이라기보다는 중국의 일방적 요구였다.

 

  우역이 심하게 발생하자 우역이 걷히기를 바라는 제사[祈禳牛疫]를 지내자는 의견도 있었다. 영조25년 실록에 강화유수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강화에서 우역으로 죽은 소가 천여 마리나 됩니다. 제(祭)를 베풀어 비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영조 임금은, “소를 위하여 제를 지낸 것이 문헌에 있는가?”라고 물었고, 그러한 예가 없다고 하자 중지하였다고 한다(1749년 8월23일).

  그러나 승정원일기에는, “원경하의 말을 받아들여 장차 우역을 빌려고 이 제도를 다듬고 대신에게 물으니, 다른 말이 없었다. 단을 살곶이[箭串] 마장(馬場) 안에 쌓고 봉상시(奉常寺)에서는 위판(位版)을 만들어 제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1749년 9월 18일). 영조 이전 사람인 허목(許穆, 1595~1682)의 우역이 걷히기를 바라는 제문[祈禳牛疫文]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우역이 그치기를 비는 제사는 있었던 것이다. 제사는 매년 5월 강일(剛日)에 제사를 거행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우역이 걷히기를 바라는 제문, 許穆(1595~1682)〉

요악한 귀신이 재앙을 일으켜서 사람들이 돌림병에 걸리고, 소와 짐승이 많이 죽습니다. 십익(十翼)에 땅은 소로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홍범(洪範)에는 흙에서 농사를 짓는다 하였습니다. 소는 밭을 갈아서 땅에서 농사를 짓게 합니다. 소에 화근이 생김은 농사의 재해입니다. 소가 없으면 경작할 수 없어지고, 경작하지 않으면 농사가 되지 않습니다. 농사가 되지 않으면 식량이 없고, 식량이 없으면 사람을 죽습니다. 흙이 베풀어 줌은 어머니의 어질음이어서 중생들은 부르짖으며 호소함은 귀신과 서로 감응하고자 함입니다. 흙을 지키는 자는 신인을 주인으로 삼습니다. 지성으로 기도해도 감응이 없으면 신이 없는 것입니다. 귀신을 위해 제물을 바치오니 소병을 걷으시어 농사가 되도록 하소서. 농사를 잘 되게 해주시어 백성을 살려주심은 귀신들의 책임입니다. 백성이 기쁘면 귀신도 즐거울 것이며, 길이 향기로운 보답이 있을 것입니다.

 

  우역의 실체를 잘 모르던 당시로서는 소 돌림병은 재앙의 하나였다. 닥친 현실,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제사를 통해 우역을 피하려고 통치자의 열과 성을 다하는 제례행사로 단순히 미신이라고 치부할 수만도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 수백 년을 괴롭힌 우역의 실체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구한말 순종 3년인 1910년에 수출하는 소의 검역법(檢疫法)이 반포되었다. 그 제2조에, “본 법에 수역이라 일컫는 것은 우역탄저(牛疫炭疽) 및 유행성아구창(流行性鵝口瘡)을 말하며(‘本法에 獸疫이라 稱은 牛疫炭疽及流行性鵝口瘡을 謂며’), 병우(病牛)라고 일컫는 것은 수역에 걸리거나 또는 그러한 의심이 있는 축우를 말한다.”고 소의 전염병명을 명시하고 있다.

  이 법에서 ‘우역탄저’라 하는 것은 한 가지 병이 아니라 우역과 탄저병을 말한다. 우역이 우역바이러스(rinderpestvirus)에 의한 질병인 반면, 탄저병은 탄저균의 감염에 의하여 일어나는 사람·가축 공통 전염병이며 주로 소·말·양 등 초식동물에 발병한다. 급성전염병이어서 일단 감염되면 동물이 죽고 난 뒤에야 발병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발열·치아노제·호흡곤란·피하부종 증세를 보인다.

  유행성아구창은 구제역(口蹄疫)을 말한다. 구제역은 소·돼지·양·사슴 등 발굽이 두개로 갈라진 동물에 발생하는 제1종 바이러스성 가축 전염병으로 전염성이 강하고 감염률이 높다. 감염되면 고열이 나며 입과 발굽, 유방 등에 물집이 생기고 침을 흘리며, 식욕부진과 다리를 질질 끄는 증상을 보이다가 죽는 질병이다. 감염 동물 자체와 배설물은 물론 사료·차량·사람 및 공기를 통해서도 전염되고 폐사율이 높다. 특별한 치료법도 없으며, 구제역에 걸린 가축은 가축전염예방법에 따라 모두 도살·매립·소각하도록 되어있다.

  왕조실록에 나오는 우역(牛疫)이란 병명은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 실제 우역일 수도 있고, 또 탄저병과 유행성아구창 등을 총칭한 병명일 수도 있다. 가축의 돌림병에 대해 잘 몰랐고 뾰족한 대책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재앙(災殃), 재이(災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조선사회를 뒤흔들고 어려움을 주었던 소의 급성 돌림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농업, 우리 농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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