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nJ 농정전략연구센터 소장  고영곤

신생 독립국 슬로바키아와 타트라 산맥

  헝가리를 벗어나 북으로 국경을 넘어 슬로바키아에 이르렀다. 역시 고속도로 톨게이트 같은 국경을 넘었지만 농촌 풍경은 멀리 높은 산이 보인다는 것 외에는 농지의 모습이나, 농촌 마을 또는 집들의 모양에서 다른 나라에 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널따란 농경지, 붉은 색 지붕과 하얀 벽으로 되어 있는 집들이 드문드문 몇 채씩 모여 있는 농촌 마을, 어쩌면 오스트리아나 헝가리나 슬로바키아나 그리도 비슷한가. 사탕무를 수확한 땅인지 가끔씩 드러나는 검은 색의 비옥한 토양도 비슷했고 들판 가운데 평지에 조성되어 있는 숲도 비슷했다. 이런 농촌 풍경은 폴란드나 체코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는 요금소도 없었다.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과속 단속용 속도측정기처럼 필요한 곳에 센서를 달아놓고 지나가는 차량에 대한 통행료가 자동적으로 계산되는 것은 우리나라 톨게이트의 하이패스 시스템과 유사한 것 같다. 차량에 속도 측정기가 장착되어 있어 그런지 비엔나에서부터 우리와 함께한 슬로바키아 국적의 운전기사는 과속운전을 할 생각조차 않는다.  

  한 참을 달린 후 우리는 널찍한 주차장 가운데 조그만 가게하나와 주유소가 있는 휴게소에 내려 기지개도 켜며 잠간 쉬는 동안 멀리 사슴 비슷한 동물이 밭 가운데 노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게 사슴이냐 노루냐 고라니냐 하고 갑론을박을 하다 카메라들을 들이 대기도 했으나 너무 멀어 결론을 내지 못하고 버스에 올랐다.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었다.

  슬로바키아는 국토면적이 약4만9천 k㎡로 우리나라의 절반정도이고, 인구는 540만이다. 슬라브계의 슬로바키아인이 국민의 86%이고 헝가리 마자르족이 10%가 조금 못되며 그 밖에 소수 민족들이 4,5%를 차지한다. 이 나라는 원래 모라비아 왕국에 속했으나 907년 마자르족이 모라비아를 점령한 이래 1918년까지 헝가리와 운명을 같이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 속해있었다. 그러다가 1차 대전 이후 합스부르크 왕조가 무너지자 체코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가 되어 2차 대전 때는 독일의 점령지가 되고, 전후 1948년부터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그러나 1989년 자유화 바람을 타고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표면화되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에 2년여의 논쟁이 벌어졌다. 연방정부형태로 단일 국가를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각각 독립국가로 갈라설 것이냐가 초점이었다. 그 결과 1993년 1월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이 각각 분리 독립함으로써 슬로바키아는 처음으로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니까 올해 독립14년을 맞는 문자 그대로의 신생독립국인 셈이다. 

수도는 인구 50만이 채 안 되는 조그만 도시 브라티스라바(Bratislava)로 이 나라의 서쪽 끝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위치해 있어 비엔나와의 거리도 60km가 채 안 된다.

 슬로바키아의 1인당 GDP는 18,000달러 수준, 우리나라의 75%수준인데, 실업률이 10%를 넘고 있어 경제적인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기아자동차가 5억 달러를 투자하여 공장을 짓고 올해부터 자동차생산을 시작하는 등 여러 기업들이 진출해 있다.

영원으로의 초대, 타트라 호수

  어둠이 깔릴 무렵 우리는 타트라 산맥의 해발 약 1,400m가까운 지점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했다. 해발 2,500m가 넘는 봉우리 25개가 이어진 타트라산맥은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의 국경을 이루는데 산맥의 80%가 슬로바키아 땅이고 나머지 20%가 폴란드에 속한다. 1949년에 이미 ‘타트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 산맥에는 관광 휴양지가 여러 곳에 발달해 있어 여름철에는 등산과 피서, 겨울철에는 스키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호텔에 도착할 무렵 수천 평이나 수만 평씩 될 법한 넓은 면적에 그 큰 나무들이 뿌리가 뽑힌 채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04년 9월에 폭풍이 불어 약 100만평 가까운 면적에서 이런 피해를 입었다고 하니 이 세상 어디에서도 자연의 힘은 역시 무서운 것임을 실감한다.

  호텔의 식당에는 우리 이외에도 한국인 관광객이 두어 그룹 더 있었고 종업원은 간단한 우리말을 알아듣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한국인 관광객을 만났는데 이런 오지에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 관광객이 세계를 누비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한국의 여행사들이 제공하는 단체관광코스로 단골 메뉴인 곳들을 우리가 따라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곳 깊은 산골에도 이렇게 우리 관광객이 많은 게 한편으로 자랑스럽고 또 한편으로 너무 빨리 축배를 들었다는 한국경제에 대한 지적도 생각났다.

  고산지대의 밤공기는 차갑고 청량했다. 울창한 숲 속에 지어진 호텔이어서 밖은 어둡고 보일 듯 말듯 한 가로등 불빛이 안개 속에서 드문드문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겨우 3일째 밤인데 일행들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아직도 시차극복이 안 되었는지 새벽 두, 세시에도 잠이 깨곤 했다.

다섯 시 조금 넘어 호텔 밖으로 나오니 우리 일행들은 벌써 창문을 열고 상쾌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바로 앞, 팔을 벌리면 금방 손끝에 닿을 것 같은 눈 덮인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아침인사를 나누었다. 숲속으로 난 길을 조금 걸으니 눈앞에 널따란 호수가 나타났다.  

넓고 잔잔한 호수는 새벽안개가 피어오르고 마침 떠오르는 아침노을을 받아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슬로바키아에 가거든 반드시 타트라 호숫가를 걸어보라던 지인의 편지는 이러했다.

 폴란드에서 타트라로 가는 길엔 비가 내렸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극한 상황에서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처절한 일인지, 고통과 공포로 일그러진 그 많은 사진속의 눈동자들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폴란드에서 몇 군데 돌아보고, 비 내리는 타트라 산맥을 넘으며 객수감과 비탄에 젖은 마음이 내리는 빗속으로 젖어들었습니다.

 타트라의 아침은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영원으로의 초대였습니다. 찬란하게 햇살이 떠오르다 한 순간 밀려드는 물안개에 호수는 모습을 감추었다가 다시 얼굴을 드러내고, 그 호숫가를 따라 걸으며 삶과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생성과 소멸.

 역사란 한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점과 같은 인간들의 궤적이 선을 이루고 다시 면을 이루며 흘러가는 것임을. 모래알 같은 인간의 삶이 왜 이리 복잡한 것인가.

 그는 우리가 가는 길을 역순으로 여행했던 모양이다. 순간적이 모래알 같은 인간은 점(點)이요, 그 점들의 궤적이 선(腺)을 이루고, 선이 다시 면(面)을 이루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으로 보는 그의 견해가 인상적이었다. 그의 편지대로 호수는 그 청명한 자태를 보이다가도 곧 짙은 안개 속에 완전히 파묻히고 잠시 후 다시 반짝이는 수면을 드러내곤 하였다. 호숫가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호텔 뒤쪽 산봉우리 방향으로 올라가니 바로 눈썰매장이 있었고 한참 위로는 스키장이 있었다. 스키장 위로 눈 덮인 봉우리들이 구름 같은 안개 아니면 안개 같은 구름사이로 역시태곳적부터 간직해 왔을 영원한 위용을 나타냈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인적 없는 새벽 산속, 잘 닦인 도로변의 깨끗한 관광안내판이 호수(Strbske)는 해발 1,355m, 스키장은 해발 1,830m, 그 뒤와 오른 쪽 눈 덮인 산봉우리들은 각각 해발 2,000m가 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