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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1
제목
문틈으로 본 조선 이야기(7), 조선의 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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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틈으로 본 조선 이야기(7) 

조선의 온실

 

   

 

하상(夏祥) 이두순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01년 10월, 한 폐지더미에서 『산가요록(山家要錄)』이라는 옛 농서가 발견되었다. 새로운 고농서의 발굴이라는 점도 반가운 사건이었지만, 무엇보다 농학자들을 흥분시킨 것은 ‘겨울철 채소 재배[冬節養菜]’라는 이름으로 채소를 재배하기 위해 온돌을 이용하는 가온 시설, 즉 온실이 그 책에 기록되어 있었던 점이다.

 

『산가요록』은 ‘농촌에 사는 사람에 꼭 필요한 기록’ 이라는 뜻으로 조선전기인 세종, 문종, 세조의 어의로 지낸 전순의(全循義, 생몰 미상)가 지은 요리책이자 농서이다. 한문 필사본으로 1450년경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된다(김영진, 2003). 전순의는 의관 노중례와 함께 우리 한의학의 3대 저술 중의 하나인 『의방유취(醫方類聚)』를 공동 편찬했으며, 의서인 『식료찬요(食療纂要)』를 지은 당시 권위 있는 의사이며 식품학자였다.

 

『산가요록』은 술·밥·죽·국·떡·과자·두부 등 229가지의 조리법을 수록한 현존하는 우리 요리책 중 가장 저술시기가 이른 책이며, 양잠, 재상, 과수, 대나무, 채소, 염료작물, 가축(물고기·꿀벌 포함) 등에 관한 농업기술을 망라한 종합농서(綜合農書)이다.

 

 관련학자들은 『산가요록』의 전모를 파악하고 국역을 추진하는 한편, 가장 관심을 끄는 ‘동절양채(冬節養菜)’의 학술적 의미를 분석 평가하였다. 연구 결과 ‘15세기의 우리 농업을 이해하는 면에서 획기적인 내용’으로 평가되었고(김영진, 2003), 또 세계 최초라고 알려져 있던 1619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온실보다 170년이 앞선 것으로 결론지었다.

『산가요록』의 ‘동절양채’ 기사는 한자 112자이며 그 내용을 새기면 다음과 같다.

 

겨울철 채소 가꾸기 [동절양채: 冬節養菜]

 

 집을 짓되 크고 작기는 임의대로 할 것이며, 삼면은 벽을 쌓고 종이를 바르고 기름을 먹인다. 남쪽 면은 모두 살창을 달고 역시 기름먹인 종이를 바른다. 굴뚝[堗]을 만들어 연기가 나지 않게 하고, 구들[突] 위에 흙을 한자반 가량 쌓으면, 봄에 먹을 채소를 모두 심어 가꿀 수 있다. 아침저녁으로 따듯하게 하고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해야 한다. 날씨가 몹시 추우면 두껍게 짠 거적으로 창을 가려주고 날씨가 따듯할 때는 철거한다. 날마다 이슬처럼 물을 뿌려주어 방안이 항상 온화하고 물기가 항상 감돌게 하여, 흙이 희게 마른 곳이 없게 한다. 또 (어떤 이는) 이르기를, “아궁이를 집 바깥에 만들고, 벽 안쪽에 솥을 걸고는 아침저녁으로 불을 때서 솥 수증기의 훈기가 방 안에 두루 퍼지게 해야 한다.”고 한다.

 

 <원문>

山家要錄, 冬節養菜

造家大小任意, 三面築蔽, 塗紙油之. 南面皆作箭窓, 塗紙油之. 造堗勿令烟 生, 突上積土一

尺半許, 春菜皆可栽植. 朝夕令溫勿使入風氣. 天極寒則厚編飛介掩窓, 日暖時則撤去. 日日

酒水如露, 房內常令溫和有潤氣, 勿令圡白處. 又云, 作㘢於築外, 掛釜於壁內, 朝夕使釜中

水氣薰遍房內.

 

 원문에서 이 시설이 세 면의 담을 쌓았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흙벽돌로 쌓았거나 흙벽으로 만든 건물이다. 그리고 남쪽 면은 종이 즉 당시의 한지로 채광창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부에는 온돌이라는 난방시설이 있는 오늘날의 가온온실과 같은 건물이다. ‘동절양채’ 온실 기록은 짧은데다 한문으로 기록된 것이어서 역자에 따라 해석도 여러 뜻으로 차이가 있게 새겨질 수도 있다. 또 필사본인 한자의 판독 문제도 있을 수 있다. 원문을 통해서 동절양채 온실 모습을 실제화,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여러 추론이 필요하다. 추론을 위해 원문을 구절별로 검토해본다.

 

 三面築蔽: ‘삼면을 쌓아 막았다’고 하니 목재가 아니라 흙벽돌이나 흙벽으로 만든 건물이다.

 塗紙油之: ‘기름을 먹인 종이를 발랐다’고 하나, 건물 외벽이 아니라 채 소를 재배하는 온실 내벽에 방습처리를 했다는 뜻이다. 햇빛의 반사를 통한 채광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南面皆作箭窓塗紙油之: 온실 건물 3면은 막혔으며, ‘남쪽 면 전부를 살창으로 만들 고 기름을 먹인 종이를 발랐다’고 한다. 남면은 전면이 채광창인 것이다. 기름을 흠뻑 먹인 한지는 인장 강도가 비닐 못지않아 빗물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빛 투과율이 높다. 원문만으로는 살창이 남쪽 벽면에 설치되었다고 보이 며, 이 경우 살창은 여닫이문이 될 수 있다. 창문에 먹인 기름 종류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피마자기름이나 들기름일 것이다.

 厚編飛介掩窓: 기온이 내려가거나 눈이 오면 남면의 창을 ‘두껍게 짠 거적이나 이엉으로 보온 조치를 했다’는 것인데, 평벽이라면 거적 같은 것을 창에 기대어 펴서 세웠다, 거뒀다 했을 것이다. 경사가 있는 지붕창이라면 이엉이나 거적을 덮고 걷는 작업이 편하다. 그러나 원문에는 남쪽 면[南面]으로만 되어 있지 경사가 있다는 언급은 없다.

 日日酒水如露: ‘날마다 물을 뿌려주어 방안에 항상 이슬이 맺히게 하는’ 것은 온실내부에 수증기를 공급해서 실내 습도를 조절하고 재배상토가 건조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作㘢於築外, 掛釜於壁內: 온실에 아궁이를 설치하고 솥에 물을 끓여 수증기를 만들어 온실에 공급하고 있다. 그러나 아궁이가 건물 밖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건물 안의 벽에 있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또 솥을 단 곳이 벽의 안이라고 했는데, 온실 내부가 벽으로 가온실과 재배실로 구획이 지어진 것일 수 도 있다. 그러나 원문에는 온실 내에 구획이 있다는 언급은 없다.

 使釜中水氣薰扁房內: ‘솥에서 생긴 수증기를 재배실로 보내 온실의 습도를 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온실과 재배실로 구획이 지어져 있다면 증기를 재배실로 보내기 위한 별도의 장치가 필요한데 원문에는 언급이 없다. 구획이 없이 재배실의 구들 아래쪽에 아궁이를 설치하고 솥을 건 것으로 볼 수도 있 다. 이 경우 솥뚜껑을 여는 정도로 수증기의 실내 공급량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겨울 원예 역사

 

『산가요록』 이외에 가온하는 원예시설이나, 겨울철 원예작물 재배에 관한 우리 기록은 더 없는 것일까? 옛 시설재배의 모습을 자료를 통해 살펴본다. 

 조선시대에 제주도의 감귤을 내륙의 남해안에 이식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태종12년에는 상림원(上林園) 별감(別監) 김용(金用)을 제주로 보내어, 감귤 수백 그루를 순천 등지의 바닷가에 위치한 고을에 옮겨 심게 하였다(1412년 11월 21일). 또 태종13년에도 감귤 수백 그루를 전라도의 바닷가 여러 고을에 옮겨 심었다(1413년 10월 20일).

 

 감귤을 내륙에 이식하려다보니 무리한 시도도 있었다. 세종20년 실록에,

 “강화(江華) 인민의 말을 들은즉 당초 귤나무[橘木]를 옮겨 심은 것은 본시 잘 살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는데, ‘수령이 가을에는 집을 짓고, 담장을 쌓고 구들을 만들어서 보호하고[守令秋而造室, 築墻作堗而守護]’, 봄이 되면 도로 이를 파괴하여 그 폐해가 한이 없으며, 그 귤나무의 길이가 거의 10척이나 되기 때문에 집을 짓는 데 쓰는 긴 나무도 준비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이 몹시 곤란을 겪는다 하옵니다.”라는 보고가 있어 왕이 시정을 명한다(1438년 5월 27일).

 

 남방인 제주에서 자라는 감귤나무를 강화도에서 월동시키려고 보호시설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집을 지어 겨울에 감귤나무를 보호했다니 이 역시 온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산가요록』의 ‘동절양채’ 온실보다 20여년이 앞선다. 그러나 강화도의 감귤보호시설은 겨울철 한철을 위한 가설건물이었고, 그나마 유지관리에 폐단이 많았다.

 

 실록 번역과정에서 작돌(作堗)은 ‘온돌을 만들었다’고 해석되었고, 이후 여러 자료에서 강화도에 온돌로 가온하는 옛 온실이 있었던 것으로 인용되었다. 그러나 강화도의 온실이 3m나 되는 감귤나무 주위에 집을 지어 보호했다고 했으나, 감귤을 온돌 위에 심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또 감귤이 심겨져 있는 채 해마다 봄이 되면 온실을 헐었다가 저온기가 되는 가을에 다시 지었다는 점도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가 된다. 강화도의 온실에서 온돌이 아니라 난로, 화로와 같은 다른 가온방법을 썼더라도 온실 내부의 연기가 빠져나가고 공기순환을 위해서는 환기 굴뚝이 필요했을 것이다. 작돌(作堗)을 문자 그대로 ‘굴뚝을 만들었다’고 새기는 것이 오히려 주위 여건과 상황에 잘 부합된다.

 

 『산가요록』을 쓴 전순의와 동시대의 인물인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쓴 『양화소록』에는 토우(土宇)라는 화훼의 월동시설이 나온다. 토우는 ‘흙으로 만든 집’, ‘토담집’, ‘움막’, ‘움’이란 여러 뜻이 있어 가려서 새겨야 한다.

 

 강희안이 이 친지에게 파초뿌리를 선물하면서 월동보관법을 설명하는 ‘파초를 키우는 법[養蕉賦]’라는 글에서 월동시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당시의 일반적인 파초 뿌리의 월동방법은 뿌리를 캐어서 ‘겨울엔 질그릇 속에 간직해 두는 것’이었지만, 월동 후 생육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양초부에 나오는 파초 뿌리의 보관법은 다음과 같다.

 

 “된서리 내리고, 나뭇잎 모두 질 때, 종을 시켜서 흙을 파헤치고, 한 자쯤 줄기를 남기고 베어 낸다. 모두 움집[土宇]에 간직하되, 한 가운데가 아니라, 기슭에 나란히 심는다. 마른 등겨[乾糠]로 북돋을지니, 사람의 기운도 관계없고, 따뜻이 함이 가장 좋다. 차고 습함은 금물이니, 손상되기 쉬운 때문이다. 잘 살펴서 법대로만 한다면, 잘 안 될 걱정이 무엇인가. 엄동이 와서 몹시 춥고 어두울 때, 한 줄기 미약한 양기를 통하여서 따뜻이 보호해 주면, 그대로 싹도 나오고 움도 틀 것이다.”

 

 파초 뿌리를 저장하는 움집은 지붕을 씌워서 비바람을 막는 한편, 유기물 피복으로 보온하고 지온의 도움으로 월동하는 것이다. 움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짚으로 지붕을 만들어 덮은 것으로 겨울철 냉해나 비바람의 피해를 막고 식품을 장기간 저장하기 위해 설치하는 구조물이다. 화초나 채소를 넣어 두기도 한다. 월동시설 중 가장 작고 기본적인 것이 움이고, 지상부에 건물 같은 구조물을 세운 것이 움집, 토담집이며 고서에 토우(土宇)라고 기록된 것이다.

 

 『양화소록』의 화훼의 갈무리방법[收藏法]에는 토우의 모양이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 “갈무리하는 법은, 먼저 높고 건조하면서도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땅을 파고 움집[土宇]을 만든다. 남쪽으로 출입구 겸 환기구(煥氣口)를 내되 화분을 들이고 내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너무 협소하지 않게 한다. 갈무리는 너무 일러도 좋지 않다. 2~3차례 서리를 맞힌 다음 움집 속으로 들여놓는 것이 좋다. 날씨가 따뜻할 때라도 출입구 겸 환기구를 열어 놓아서는 안 된다. 만일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면 이엉이나 거적 등으로 두껍게 덮어 얼지 않게 해 주어야 한다. 입춘이 지난 다음에는 가끔 덮은 것을 걷어 주어야 한다. 한식 이후에 밖으로 꺼낸다.”

 

 화분을 들여놓는다니 화훼의 갈무리에 쓰는 움집은 채소를 저장하는 지하의 움보다 높이가 있어야 할 것이어서 건물다운 모습을 갖춘 움집일 것이다. 『양화소록』의 움집에는 환기를 하는 한편 추위를 막기 위해 피복재를 덮어주었다. 역시 겨울철 화훼식물의 보관이 목적이었지, 적극적으로 난방 가온을 하는 화훼 겨울철재배까지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조선왕실의 겨울 원예

 

 조선시대 왕실에는 장원서(掌苑署)에서 궁궐의 정원, 동산, 화초, 과수 등을 관리하였다. 성종 때 『국조보감』에 장원서에서 꽃을 바친 것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성종2년에 장원서가 영산홍(暎山紅) 화분을 올리니 왕이,

“겨울에 꽃이 핀 것은 인위(人爲)에서 나온 것이며, 또 나는 화훼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다음에는 다시 올리지 말라.” 하였다(1471년 11월 21일).

한겨울인 음력11월에 영산홍 꽃이 폈다니 재배과정에서 온도조절로 개화를 촉진한 것이다. 그러기에 성종이 인위적으로 꽃피웠다고 지적한 것이다.

연산군11년 실록에는 좀 더 구체적인 채소 시설재배의 모습이 나오는 기사가 있다. 왕이 전교하기를,

“승검초[辛甘菜] 따위 여러 가지 채소를 장원서(掌苑署)·사포서(司圃署)로 하여금, 흙집을 짓고 겨울 내 기르게 하라[築土宇, 過冬培養.].” 하였다.

 

 조선 궁궐에서는 입춘에 입춘절식(立春節食)이라 하여 움파, 멧갓, 승검초 등 햇나물을 캐내어 임금께 진상하였고, 궁중에서는 이것으로 오신반(五辛飯: 새봄에 나오는 다섯 가지의 자극성이 있는 나물로 만든 음식이다.)을 장만하여 수라상에 올렸다. 이 기사에서 ‘겨울을 넘겨 기르게 한다[過冬培養]’는 것은 『산가요록』의 ‘동절양채’와 의미가 상통한다. 그러나 실록의 승검초의 재배과정에서 가온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명종7년 실록의 기사에서 화훼의 보온재배에 대한 비판 기사가 있다. 검토관(檢討官) 왕희걸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국조보감』을 보건대, 성종조(成宗朝) 때 장원서에서 영산홍을 바치자 이를 물리쳤다고 하였으니, 그 의도가 참으로 훌륭합니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장원서가 꽃을 잘 기르지 못하였다 하여 관리를 추문하였습니다. 또 겨울철에 꽃을 기르는 것은 폐단이 매우 큽니다. 토우(土宇)와 시목(柴木)의 역사에 백성들이 많이 시달리고 있는데, 초목의 꽃과 열매는 천지의 기운을 받는 것으로 각각 그 시기가 있습니다. 제때에 핀 것이 아닌 꽃은 장난감[戲玩]에 가까운 것이니 무슨 관람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 일을 그만 두소서.” 하였다(1552년 1월 2일). 화훼재배에서 가온온실을 짓고[土宇], 연료로 땔나무[柴木]를 쓰는데 대한 비판이었다.

 

 조선 궁궐에서는 꽃을 재배하는 전용시설을 두고 운영하였다. 1820년경에 조선왕궁인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에는 왕실에서 화훼를 관리하던 시설인 창순루(蒼荀樓)가 있다.

 

 창순루는 18세기 정조 시절의 궁중온실이었으며 겨울철에 꽃을 피워 대전과 왕대비전에 올렸다. 동궐도에 그려진 창순루 앞에는 반 타원형체의 둥근 지붕, 창살이 없는 문과 섬돌이 있고, 툇마루가 있는 초가집 온실이 있다. 이 온실은 실내 온도를 데워주기 위해 벽장이라는 가온시설을 갖춘 독특한 목조건물이다. 그리고 뜰에는 붉은 꽃이 핀 화분이 놓여 있다. 이 뜰은 화분식물들로 키우고 보관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순루에서는 평상시에는 주로 노지에서 꽃나무들을 키우다가 겨울에는 실내에서 춘화처리를 하여 일찍 꽃을 피워 임금에 진상하는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과 유럽의 겨울 온실 기록

 

 동절양채 온실기술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지만 당시 사정으로 미루어 왕실과 같은 특수 계층의 제한된 용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동절양채’ 기술은, ‘비용과 대중적인 수요는 고려하지 않은 채 공급에만 관심을 보였던 15세기 실험농학의 성과’로 평가되기도 한다(이호철, 2003). 어떤 의미에서는 ‘동절양채’ 아이디어는 그 시대를 너무 앞선 기술이었고, 실용성과 일반화에 의문을 남기고 있다.

 

 또한 농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고대 중국에도 겨울철 채소 가온재배는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의 동절양채 기술이 세계 최초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기원전 중국 한나라 때 사람인 소신신(召信臣)의 열전에, “궁중음식 전담기관[太官]에서 겨울에 파, 부추 등 채소에 지붕을 씌우고 주야로 불을 때어 따듯하게 해서 키웠다. 신신(信臣)이 그 모두가 ‘제철 아닌 물건이며[不時之物]’, ‘사람에게 해로움이 있으니[有傷於人]’ 왕께 바치는 것에 합당하지 않으며, 그것은 ‘도리에 어긋난 음식[非法食物]’이니 그만 두기를 상주해서 세비 수천만전을 절약했다. 조정에서도 이런 재배를 금지했다.”고 한다(「漢書」「循吏傳」).

  

 현대 중국에서는 소신신의 기록에 나온 시설을 고대온실의 효시로 보고 있다. 지붕을 씌웠다는 것 외에는 시설다운 점이 없지만 가온재배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본격 온실로 보기에는 시설이 미흡하며, 가온방식도 불분명하다.

 

 중국에서 가온재배로 화훼작물을 월동시킨 사례는 더 있다. 송나라 주밀(周密, 1232~1298)은 『제동야어(齊東野語)』에서 꽃을 조기 개화[堂花]시키는 방법을 기록하였고, 명나라 때 장훤(張萱, 1553~1636)은 『의요(疑耀)』에서, “지금 경사에서는 겨울이 되면 움집[地窖]에서 꽃을 키운다.”고 하였다. 또 청나라 때 유정섭(俞正燮, 1775~1840)은 『계사류고(癸巳類稿)』에서 가온해서 꽃을 키우는 방법[燂花法]을 기록하고 있다. 현대 중국에서는 이러한 화훼를 키우는 시설을 고대 온실로 보고 있지만, 역시 『양화소록』 수준의 월동시설인 움집에 불과하며 본격 온실로 보기에는 미흡하다. 

 

 서양에서는 1619년에 만들어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온실’이 최초의 온실로 공인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온실’은 난로를 사용해서 난방을 하였으며 토양재배가 아니라 화분재배였다. 서양의 본격 온실이라는 하이델베르크 온실보다 170년 앞선 ‘동절양채’ 온실은 세계 최초(最初)의 온실로 볼 수 있다.

 

『산가요록』은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지만 ‘동절양채’ 온실은 『농상집요』에도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타 농서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창적인 발명이었다고 평가된다(김영진, 2003). 폐지로 사라질 위기에서 『산가요록』을 살려내고, ‘동절양채’ 관련 기술을 세계에 내보이려 노력한 관련학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아직도 발굴되지 않고, 공개되지 않은 좋은 농서가 더 있을 것이고, 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옛 농업기술도 더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옛 것을 공부하는 것은 과거를 알고자 함이 아니라, 옛 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공부하기 위해서이다.

 

 

 

 일러두기

1. 이 글은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농경마루 2호로 발간한 『문틈으로 본 조선의 농업과 사회상』의 일부를 농경연의 허락을 얻어 전재한 것이다.

2. 원 글에는 인명, 시설, 책명, 고용어 등에 대한 수많은 각주가 있지만 이글에서는 독자의 편이를 위해 생략하였다. 관심 있는 분은 원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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