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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02.27
제목
[이정환의 겨울산골 살기 1] 탈도 많고 걱정도 많지만, 그래도 간다  (1)
첨부파일
 

* 이정환 이사장의 겨울 산골 살기 첫번째 에세이입니다.

 

 

「이정환의 겨울산골 살기 1」

탈도 많고 걱정도 많지만, 그래도 간다.

   

 

GS&J 이사장 이정환

 

 

 내일 강원도 인제 곰배령으로‘동안거’를 떠난다. 그런데 아무 준비도 하지 못했다. 그저 생각만 한다. 작년‘동안거’에서 올해 중 발간한다고 계획을 세웠으나 곁눈질만 하고 있던‘농업과 정부’라는 책의 세부 목차와 내용을 정하자. 일부는 초안도 써보자. 인문학책도 몇 권 읽고, 평소 마음속에서만 똬리 틀고 있던 몇 가지 개인적인 일도 한다. 이런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책 세부 목차를 만들고 초안을 써보려면 관련되는 자료를 가져가야 하는데 어떤 것을 가져가야 하나? 책은 어떤 걸 읽지?

연구소 일은 어젯밤에 겨우 마무리 지었다. 작년부터 끌어온 쌀 과제가 남아있었으나 보고서를 오늘 새벽 끝냈다. 사실 작년에 연구과제를 맡을 생각은 없었다. 올해 중 책을 내기로 했으니까. 그런데 7월 농협에서 쌀값 대책 연구를 해줄 수 없느냐는 제안이 왔다. 쌀 가격이 폭락세를 보여 최대의 농정 쟁점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쌀문제를 오래 연구한 사람으로서 이 같은 사태의 원인과 대책에 대해 아무말 못하고 있는 것에 자괴감이 들던 터였기에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팔팔하던 60대 때 열을 올렸던 쌀 모형(KORIS)을 대폭 확장하는 일에 야심차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정말 몇 달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본래 계량모형 작업은 시간을 잡아먹는 피 말리는 일인데 이 나이에 무리였을까? 연말이 되었다. 이것저것 미진하고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할 수 없다. 분명히 갈 길은 남았고 더 가면 더 많은 것이 보일 것 같지만 포기했다. 그리고‘이런 연구는 어느 단계에서 포기해야 끝나는 거잖아’라고 위안한다. 그렇게 분석작업은 접고 올해 들어 보고서 쓰는 작업에 돌입했다. 쌀 모형(KORIS) 분석 결과를 엑셀 파일에서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원고를 쓰는 일은 시간이 걸렸다. 그 와중에도 모형은 때때로 나에게 속삭였다. “네가 바라던 것이 있어. 한 번만 와 봐!” 미련이 나를 다시 허겁지겁 달려가게 했고, 그것은 대부분 거짓이었다. 아무튼 오늘 새벽 보고서를 넘겼다.    

보고서와 씨름하는 와중에 느닷없이 미국에 사시는 큰 누님이 이제까지 사시던 뉴저지 넓은 자택에서 딸이 있는 뉴욕의 작은‘노인의 집’으로 이사했다는 연락이 왔다. 전화를 걸었다. 누님은 새로 이사 온‘노인의 집’에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 언제 미국에 오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누님들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으며 자랐지만, 이 누님은 각별하게 나를 좋아했다. 삶에 관한 생각이나 정치적 견해가 누구보다 비슷해서 서로 의기투합하곤 했다. 혹시 몇 달 사이에 정말 나빠지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내가 오기를 정말 바라신다는 생각에 서둘러 3박 4일의 미국행을 결심했다.    

70도 되기 전에 돌아가신 작은 누님이 임종 얼마 전 휠체어를 타고 병원 마당을 산책하시며 그렇게 행복해 하셨다. 민들레와 개망초꽃에 황홀한 미소를 지으셨다. 누님은 여고 시절 누구보다 감성적인 문학소녀여서 시도 쓰고 학교 교지에 수필을 발표하셨다. 후에는 수필가로 등단하여 수필집을 발간하시기도 했다. 주말농장에서 모닥불을 피우면 그 불꽃이 다 스러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다보시곤 했기에 이 순간 누님의 감상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행복했다. 한 번 더 함께 그 소박한 행복의 순간을 누리기 전에 누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한 번 더 찾아뵐걸’ 했던 그 아쉬움이 결심을 재촉했다.  

오랜만의 미국행, ESTA인가 뭔가를 제출해서 허가를 받아야 한단다. 인터넷 신청을 한다는 데 잘 안되 애를 먹다가 겨우 신청은 했다. 미국에 신형 코로나가 난리라던데 내가 걸리면 어쩌지, 그보다 내가 연로한 누님에게 옮기게 되면 어쩌지, 덜컥 겁이 났다. 보고서도 써야 하니 3월로 연기할까, 이미 간다고 알렸는데 이제 연기한다는 게 말이 되나---그러는 사이 시간에 떠밀려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누님은 나를 만나 아주 만족하셨다. 답답한 심정을 들어드리며‘let it be’하시라고 위로했다. 다행히 뉴욕은 따듯하여 맨해튼 빌딩 숲과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며 브루클린 해변을 산책했다. 귀가 많이 어두워지셔서 대화가 끊기곤 했지만, 어릴 적 이야기, 6.25때 피난 갔던 이야기,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나누었다. 잘 다녀온 것은 분명했지만 보고서는 그만큼 늦어졌다.

 

 

일주 전쯤 신문을 보니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어 마지막 여야 타협, 의결, 거부권 행사로 숨 가쁘게 이어질 판이었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지금 쓰고 있는 보고서는 의미가 없어진다. 서둘러 작성 중인 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담아 농정개혁 차원의 새로운 대안을 제안하는‘시선집중’부터 작성하여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그리고 다시 보고서에 매달려 어제 밤늦게, 정확히는 오늘 새벽에 어찌어찌 끝냈다. 위스키를 한잔하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무언가에 쫓기는데 가방이 없어져서 안달복달하는 꿈을 꾸다 깨었다. 세를 놓고 있는 상가 임차업체가 별안간 나가겠다는 통보를 해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내년 3월이 계약기간인데 중도 해약하겠다고. 10년은 있겠다며 들어오더니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지! 계약할 때 중도 해지 조항을 양해했던 게 결국 바보짓이었구나!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일단 부동산에 내놓았으나 이 부동산 불경기에 공실이 길어지면 어쩌지, 그 세를 받아 살고 있는데, 불안하다. 그래도‘동안거’를 가야 하나? 가야지, 부동산에서 연락이 오면 산에서 내려오면 된다. 이제 취소할 수는 없다. 서랍 깊숙이에서 장기 여행을 떠날 때마다 써두었던 유서를 꺼냈다. 별로 추가할 말이 없다. 날자만 다시 적어 넣고‘사후 개봉’이라고 쓰인 봉투에 다시 넣어 봉인하였다.

 

오늘 하루가 있다. 동안거 준비다. 우선 서재에서‘지도 만드는 사람’등 눈에 띄는 대로 몇 권 골라서 박스에 담았다. 아내가 요 며칠 옷가지를 싼 트렁크와 먹을거리를 챙긴 쇼핑백 몇 개가 방안 한켠에 잔뜩 자리잡고 있다. 뭐가 이리 많지! 이 여자는 항상 짐을 너무 많이 싸서 문제야. 아주 이민 가방을 싸지! 혼자 투덜거리며 암튼 자동차에 두 번에 나누어 실었다. 오늘은 남양주 농장집에서 자고 떠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곰배령까지 가는 시간이 한 시간 이상 단축된다. 아내의 안색이 안 좋지만 그건 당신 사정이구! 아내와의 말 없는 불화가 나를 괴롭히던 터라 그저 심통만 났다.  

이제 책방을 가야 한다. 어제 네이버를 서둘러 검색하니‘결정하는 뇌’, ‘욕망의 이론’,‘하얼빈’이 눈에 들어왔다. 주문하면 내일 도착한다지만 떠나는 시간에 못 맞출 수 있으니 책방에 가서 사기로 했다. 교보문고가 현대백화점에 있단다. 달려갔다. 백화점은 넓고 서점 가는 길은 복잡했다. 물어물어 짜증에 짜증을 내면서 겨우 샀다. 그리고 보니 아불싸! 어제 서재에서 동안거 중 읽을 책을 골라 담은 박스를 집에 두고 왔다! 아내에게 전화하니 이미 집을 나왔다고. 젠장 벌써 나왔어! 도움이 안된다니까! 다시 돌아가 좀 가져다 달래고 싶었지만 괜한 심통에 전화를 끊고 집으로 갔다. 책 박스를 들고나오는데 전화가 온다. 서점이란다. 아까 결재하고 신용카드를 두고 갔다고. 맙소사! 그 복잡한 길을 다시 휘더듬어 카드를 찾고 연구소로 가려는데 이건 뭐야! 네비를 켜니 스마트폰이 먹통이다. 내일 강원도 산골로 가서 3주나 머무는데 스마트 폰이 안되면 이건 문제다. 서둘러 삼성 서비스센터로 갔다. 유심 고장이라 LG 유플러스로 가란다. 어디에 LG 유플러스 있지? 스마트 폰이 안되니 찾아볼 수가 없다. 일단 PC가 있는 사무실로 가는 수밖에 없다.

 

사무실에서 그동안 내가 쓴 칼럼과 ‘시선집중’ 프린트한 것을 챙겼다. 내가 이제까지 무슨 말을 한 건지 리뷰하는 것부터 해야 할 것 같아서. 프린트물이 든 박스 두개를 카트로 끌어다가 차에 실었다. 그리고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유플러스가 있어서 유심은 쉽게 교체했다. 눈이 감겨서 견딜 수가 없었으나 겨우 농장집에 왔다.

몸이 기진맥진이다. 입맛도 떨어지고 기운도 없고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는다. 조금 열도 있는 느낌이다. 코로나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내일부터 곰배령 산속으로 가는데, 어찌해야 하지—동안거고 뭐고 다 집어치울까. 암튼 일단 아내와 밥도 따로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2층에서 혼자 머물렀다. 도리어 잘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또 쫓기는 꿈이다.

다행히 아침 일어나니 몸 상태는 어제보다 낮았다. 별다른 증상이 없는 걸 보니 코로나는 아닌 것 같다. 예정대로 11시에 곰배령으로 출발한다.   

 

(2023. 02. 09) 

 

tang7  [date : 2023-02-28]
출발하기 직전은 원래 chaos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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